삶을 위한 민족 이념인가, 민족 이념을 위한 삶인가?
박욱주 박사님의 이번 영화 평론에서는 지난 주에 이어 2019년 연말 최고 기대작이자 개봉 후 3일만에 100만 관객을 가뿐하게 돌파한 <백두산>을 분석합니다.
이 영화는 이병헌(리준평), 하정우(조인창), 마동석(강봉래), 전혜진(전유경), 수지(최지영) 등 초호화 배우 캐스팅과 <골든슬럼버>의 이해준 감독, 김병서 감독의 공동 작품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는 백두산 화산 폭발 이후 마지막 폭발을 앞두고 최악의 재난을 막기 위해 지질학 교수(마동석)의 도움으로 남북의 특전사들이 비밀 작전에 투입되는 한편,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반 사람들의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재난과 생사: 삶과 죽음의 극적 대비와 카타르시스
지난 주 개봉된 영화 <백두산>의 관람 후 평가를 살펴보면, 관객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초반부 재난 영화로 시작해 후반부 민족주의 첩보 영화로 귀결되는 서사가 불만족스럽다는 평이 많다.
왜 이런 서사 진행이 재난 영화 <백두산>에 대한 실망감을 초래하는 것일까? 통상 재난 영화로부터 관객들이 기대하는 바는 무엇일까?
전 세계에서 재난 영화를 가장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일 것이다.
미국은 광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답게 숱한 자연재해(대표적으로 허리케인, 지진, 화산폭발, 토네이도 등)를 겪어온데다, 기독교적 종말론 문화 요소를 갖고 있어 대규모 자연 재해를 미디어 콘텐츠 소재로 자주 활용해 왔다.
일본은 영토는 미국에 비해 작지만 지각 변동이 극히 활발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화산활동, 지진, 그리고 해일(특히 지진해일인 쓰나미) 등이 일상화된 곳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일본 문화 속에는 종교적으로 불교의 공(空) 사상에 깊게 영향 받은 신토 사상이 널리 퍼져 있기에, 재난으로 인한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허무의 한 측면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강하다. 일본에서는 이런 점들이 여러 편의 걸작 재난 영화를 제작하는 데 기여해 왔다.
한국도 영화에 투입되는 자본이 늘어나고 CG 기술이 일반화되면서, 점차 전문적인 재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2009년의 <해운대>(지진해일 소재), 2016년의 <판도라>(지진으로 인한 원자력 폭발사고 소재)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 자연재해를 소재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역시 재난 영화 카테고리에 속하는 <엑시트>(2019, 가스 테러 소재)도 최근 개봉된 바 있다.
한미일 삼국 어디에서든, 재난 영화가 그 자체로서의 매력을 갖기 위해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절박하고 충격적으로 갈리는 서사를 전해야 하고, 영화의 장면들 역시 그 절박함에 걸맞는 연출 방식을 따라야 한다.
무엇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소재가 되는 재난이 주는 위기감과 불안으로 가득해야 한다. 그래야 관객들이 그 재난 상황에 집중할 수 있고, 등장인물들이 그 재난에서 벗어나 살아남는 결말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백두산>은 재난 영화 고유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초반부 서울 강남역 지하철 및 대형빌딩 붕괴와 한강 장면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재난의 심각성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후반부 서사 자체가 백두산의 추가 폭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북한 군인과 첩보요원의 협력에 집중되어, 서사의 흐름이 두 방향으로 분산되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백두산 폭발이라는 대형 재난을 소재로 삼기는 하지만, 남북한 민족 단합이 만들어낼 시너지 사례 제시를 위해 이 흥미로운 소재를 희생시킴으로써, 재난 영화 고유의 매력을 놓쳐버리는 듯하다.
게다가 후반부 서사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이야기, 즉 대형 재난에 의해 북한 정권이 붕괴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벌어질 일들에 대한 예측마저 그리 치밀하지 않다.
때문에 재난 영화로서도, 첩보 혹은 액션 영화로서의 서사적 개연성도 모두 확보하지 못하고 있고, 이것이 이 영화를 혹평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문제점으로 보인다.
재난과 민족: 민족 이념이 정해놓은 자기 이해의 한계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최고조의 신앙적 혹은 종교적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이 불가항력의 상황이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재난의 상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실제 재난으로 죽음 앞에 놓인 인간이 가장 절박하게 떠올리는 것이 민족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점에서 인간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생명과 죽음이 갈리는 데 따른 무한한 절박함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재난 너머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인간들을 지켜보는 초월적인 존재, 즉 신에 대한 여러 감정들이다.
그래서 재난 영화의 서사는 '인간 자체'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휴머니즘을 내세우거나, 아니면 여전히 자연과 초월적인 것 앞에 나약하기만 한 인류의 미약함과 유한성을 반성하는 종교적-철학적 사고를 추종한다.
이런 재난 영화의 정석적 루트를 벗어난 <백두산>의 민족주의적 메시지는 한국 문화계가 작위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족 이념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일 것이다.
재난 영화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이나 초월적인 힘 앞에 겸비하는 심령이 아니라 민족 화합을 내세우는 처사, 이것은 한국에서 민족 이념이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하나의 우상화된 신념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문화 콘텐츠가 이처럼 상식 수준을 벗어나면서까지, 서사의 개연성을 포기하면서까지 민족을 강조하는 자민족 중심주의 성향은, 주로 정치적-문화적 후진국에서 쉽게 발견된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이다. 중국의 문화 콘텐츠는 한국에서와 그 양상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문제의 해법이 하나된 중국 민족에 기대는 것뿐이라는 사고를 주입하려 한다.
민족에 갇힌 이런 국수적 정치 이념이 우상화되고 극단화되는 일, 이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당연히 지양되어야 할 일이다.
제국주의 열풍이 전 세계에 몰아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대부분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는 기독교가 식민지인들의 민족 이념과 융화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현재도 여전하다. 당시 기독교 선교가 제국주의 지배의 한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피지배 민족에게 배척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특이하게도 기독교 문화가 거의 힘을 쓰지 못하던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게다가 식민지 시기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민족의 자주 독립을 지지하고 여러 방면으로 힘을 보탠 까닭에,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이념이 일심동체로 연합하는 특수한 사례를 보여준다.
사실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의 민족 이념을 허용했던 이유는, 같은 한국인이 아니면 전도를 잘 수용하지 않는 한민족의 폐쇄성으로 인해 네비우스 선교 전략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던 존 네비우스(John Nevius)는 중국 민중 특유의 자민족 중심주의 때문에, 우선 중국인 지도자를 양육하고 이들로 하여금 지역과 이웃 전도를 주로 담당하게 하는 선교 전략을 구상했다.
이 방법은 민족 중심 사고, 국수주의 사고에 물들어 있던 한국인들의 전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문제는 이로 인해 한국인들의 기독교 신앙조차 민족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 개신교회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빠른 양적 성장을 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범세계적인 신앙의 교제에 서툴고 인색한 이유,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선교적 포용성을 온전히 담지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처럼 교회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국수적 민족주의일 것이다.
민족을 강조하는 강한 정치적 신념은 약간의 계기만 주어진다면 즉각적으로 광신 혹은 우상이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저명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변증가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종교적 광신을 비판하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대응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종교 광신자가 있을 수 있듯(또 실제로 있듯), 정치 광신자도 있을 수 있다(또 실제로 있다). 문제는 광신이지 종교 자체가 아니다(맥그래스, <새로운 무신론>)."
국제화된 기독교인이나 문화인 관점으로 볼 때, 한국이나 중국에서 볼 수 있는 국수적이고 폐쇄적인 자민족 중심주의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하나의 광신에 가깝다.
광신이라는 감정은 합리와 개연을 부정하는데, <백두산> 같은 영화들이 결국 서사의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커다란 고통과 재난 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보다 초월적인 것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 앞에 겸비하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재난 영화가 진정한 개연성을 갖추려면 삶과 죽음의 무게감, 그 앞에서 초월을 지향하는 인간 본성에 집중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백두산>은 현세중심적이고 민족중심적인 정서 때문에, 커다란 고통과 재난 앞에서도 조국과 민족을 찾는 부조리한 서사를 선보인다.
이는 <백두산>뿐 아니라 근래 국내에서 제작된 반외세 민족주의 영화 대부분의 공통적 특성으로서, 현재로서는 관객들의 외면을 자초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 영화계가 지금처럼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천편일률적으로 민족주의적 교훈을 선사하는 데 머물러 있는 한, 관객들의 기대감 저하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