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 2019년 봄학기 홍성강좌 '한국 근대사의 카이로스 3·1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김마리아' 9일 오후 첫 강의에서 양현혜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부)는 교과서와 언론보도 등으로 나타난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일본의 3.1운동 인식과 변화를 살폈다.
양 교수는 "오늘날 3.1운동의 재현은 무엇인가. 하나된 민족으로서 일본에 항거하고 하나의 나라를 만들고 싶어했지만 이루지 못했는데, 오늘에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남북한의 교집합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이 3.1운동이다. 남북 어느 정권에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한 교과서에 나타난 3.1운동의 '기억 투쟁'
남한의 경우, 해방 후 첫 교과서는 1946년 군정청 학무국에서 발행한 <초등 국사교본>이었다. 여기서는 한국 근대사를 3.1운동, 임시정부(임정), 의사들의 활동, 광복군의 선전 포고-해방이라는 구도로 서술했다. 3.1운동 배경으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강조되고, 임정이 민족해방 운동을 이끈 것처럼 기술했다.
전쟁 후인 1954년 제1차 교육과정에 의거해 발행된 <중등 국사>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3.1운동과 임시정부와 직결시키고, 3.1운동을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의 결과로 서술하고 그 결과 일본이 문화 통치로 전환됐다고 체계화했다.
양 교수는 "이러한 체계화는 이후 대한민국이 견지하게 된 3.1운동의 기본적 서술 기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1950년대 후반부터 독재를 강화하던 이승만 정부가 3.1운동 의의를 '전 민족이 이해관계를 돌보지 아니하고 합심한' 사례라면서 이를 '3.1정신'으로 규정했다. 3.1운동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재해석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1973년 제3차 교육과정에서는 역사교과서가 국정체제로 전환되지만, 3.1운동에 관한 기본 서술 기조는 유지됐다. 이때 <중학교 국사>에선 3.1운동과 임시정부를 동일선상에서 이해하게 하고, 임시정부가 국가 체제를 갖춘 민족해방 운동의 지휘본부였음을 강조했다.
양 교수는 "그러나 임시정부가 국가 체제를 갖췄다든가, 민족해방 운동을 총지휘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며 "이 시기 특징은 3.1운동 서술과 관련해 '거족적, 민족의 단결' 같은 표현이 상당수 등장해 3.1운동이 '민족 단결'의 표상으로 형상화한 점"이라고 했다.
1987년 제5차 교육과정에 의한 <고등학교 국사(하)>는 국내외 연구 성과를 반영, 3.1운동의 배경으로 외적 요인만이 아니라 의병 전쟁, 비밀 결사운동, 국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등 주체의 성장을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기본적인 서술 기조에 균열이 보여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역사교과서의 검인정 체제로 전환이었다. 검인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들은 3.1운동 지도 세력들이 민족 대표에서 학생들로 옮아가는 과정, 노동자와 농민들의 적극적 참여, 반제 운동으로서의 중국 5.4운동과 인도의 반영(反英) 운동과의 관련성 등 다양한 측면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남한은 최근까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직결시키면서, 임시정부의 민족주의 계열 중심으로 3. 1운동 이후의 민족 해방 운동사를 해석했다"며 "한편 3.1운동 정신을 역대 정권 담당 세력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재해석하는 '기억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고 정리했다,
▲대한민국의 예전 교과서들. ⓒ이대웅 기자 |
북한 교과서에 나타난 3.1운동의 '기억 투쟁'
북한 교과서도 분석했다. 양 교수는 "김일성이 3. 1운동에 대해 '일제에 대해 전 민족적 투쟁을 전개한 날이며 우리 민족이 자기의 자유를 위해 고귀한 피를 흘린 날'이라며 중요성을 인정했듯, 3.1운동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했다"며 "그러나 그 서술 기조는 남한과 상당히 달랐다"고 언급했다.
북한 교과서는 3.1운동이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3.1운동이 민족 대표자들의 안이한 방략으로 실패한 것이 전환점이 되어 이후의 조선 역사가 노동자 계급이 지도하는 운동의 새로운 단계, 즉 근대를 지나 현대로 진입했다는 점, 따라서 앞으로의 민족해방 운동은 전위 정당의 지도 아래 강력한 무장투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1960년대 발행된 <조선력사>는 3.1운동의 공식 명칭을 '3.1인민봉기'로 확정했다.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한 역사서술 방침에 의거해 노동자와 농민의 진출을 강조한 명명으로, 현재까지 고수되고 있다.
여기에 1981년 출판한 북한의 공식 역사서인 <조선력사>에서는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김일성 가계의 활동'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의 영향으로 반일운동이 고무되고, 김형직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평양의 '3.1인민봉기'를 주도했으며,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과 외삼촌 강진석이 만경대 봉기를 이끌었고, 어린 나이의 김일성도 따라 나섰다는 것.
양 교수는 "이렇듯 주체사상에 의거한 김일성의 가계 중심의 서술뿐 아니라, 운동의 발상 지역이 평양이라는 점도 강조됐다"며 "김형직이 3.1운동 지도자였다는 것은 평양 중심의 주장과 더불어, 지도자 중심의 역사관을 위한 '기억 투쟁' 작업의 일환이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김형직은 평양숭실학교를 1년 정도 다니다 중퇴한 인연으로 기독교계 민족 운동가들과 교분이 있었고, 평양 창덕학교를 세운 기독교 장로이자 교육자인 강돈욱의 사위였다는 점에서 민족 운동에 가담했다고 볼 수 있다"며 "숭실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 단체 조선국민회 활동도 함께했기에 김형직의 3.1운동 당시 역할을 짐작할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또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가 일어난 7개 도시 중 서울을 제외한 6개의 도시가 북쪽에 위치했다.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많이 살던 북쪽에서도 첫 날 만세 시위를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별 혹은 연대해 준비했다"며 "이날 북쪽의 만세시위는 안주를 제외하고 모두 민족대표들이 준비한 것이었다. 민족 대표 33인 중 15명이 북쪽 출신이었다. 하지만 분단 탓에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가 일어난 도시 가운데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북쪽 6개 도시는 남한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러한 의미에서 북쪽 지역의 만세 시위를 남측이 주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면서도 "그러나 북측이 평양 중심의 북쪽 지역을 강조하고 민족 대표의 역할을 폄하하는 것 역시, 분단에 따라 3.1운동의 기억을 독점하고자 하는 '기억 투쟁'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3.1운동 관련 서술과 해석
일본의 3.1운동 관련 서술과 해석은 일본 사회에서 신뢰받고 있는 '아사히신문' 보도 내용을 토대로 했다. 3월 3일자 '도쿄아사히신문'은 3.1운동에 대해 탑골공원 독립선언에 대한 내용을 누락한 채, 경무총감부의 신속한 활동 개시만을 알렸다. 이어 '볼온 문자'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만세를 절규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후 3-4월 평양, 사천, 선천, 대구, 맹산, 영원, 철원, 부산, 대전, 정주, 러시아령 우스리스크, 간도 등에서의 독립운동을 '소요'라는 이름 아래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3.1운동 발생 원인이나 조선인의 요구 사항, 각지의 탄압 실상 등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오히려 진압 과정에서 일본이 입은 피해를 과도하게 부각시키며 무력 진압을 정당화했다.
예를 들어 3월 7일 '사천, 성천에서 봉기, 주재소와 파견소 요타(燎打), 헌병이 참살되고 경관이 포로, 헌병 중위 부상입어 사망'이라는 소제목으로 보도하고 있다. 조선인 피해 상황은 누락되고 일본 측 피해만 과장되게 보도해, 일본인들에게 3.1운동에 대한 편견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양 교수는 "이러한 적개심과 주장에 힘입어 4월 8일 일본 육군성은 조선에 군대 증파를 결정했다"며 "그러나 운동이 장기화되자 3.1운동을 조선인들의 경거망동과 부화뇌동 혹은 선교사들의 선동으로 보려는 논조에서, 운동 원인을 총독 정치의 폭압성에서 찾으려는 논조도 대두됐다"고 말했다.
1919년 9월 중 눈에 띄는 보도는 상해임시정부 관련 기사이다. 9월 3일 '음모단의 내막, 이미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미국, 프랑스, 독일, 인도인을 고문으로 러시아, 미국, 일본 각국에 연락을 취하고 기회가 도래하기를 대망하다'는 소제목을 붙여 상해 임시정부 임원진 등에 관해 상세히 보도했다. 9월 4일에는 이승만을 손문과 견주어 설명하고, 안창호를 철학 박사라고 소개했다.
11월 28일 '조선 독립 운동의 수령으로 옹립된 이강공' 기사도 흥미롭다. 상해로 탈출하려다 실패한 이강공 사건을 불량선인들에 의한 강제 유괴로 보도한 것이다.
같은 날 여운형이 일본에 들어간 사실도 보도했는데, 3.1운동 수습책 일환으로 지도자의 한 사람인 여운형을 회유하기 위해 동경에 초청했으나, 도리어 3.1운동을 '세계적 조류'이자 '조선만이 아닌 동양 평화'를 위한 운동이라고 당당히 말해 당황한 일본의 모습이 나타난다.
12월 19일에는 '야소교도로 이루어진 조선 부인 음모단'이라며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도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는 사건의 전모와 더불어 "경성부 회장 기독교 장로파 정신여학교 교사 김마리아(26), 동 서기 신의교(신의경의 오기, 22), 동 재무부원 장선의(장선희의 오기, 24), 동 서기 김영순, 세브란스 간호부 이정숙(22), 택사장(결사장의 오기) 기독교 감리파 배화여학교 교사 이성완(23)"이라고 썼다.
양 교수는 "이 많은 오기(誤記)들은 당시 일본 언론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동시에, 조선 여성들의 이름이 일본 언론에서 최초로 실명 거론되고 있다"며 "이 사건은 조선 여성을 독립 운동의 주체이자 정치적 주체로서 일본인에게 각인시킨 최초의 사건"이라고 했다.
양현혜 교수는 "일련의 3.1운동 관련 기사의 논조를 살펴보면, 일본에서 정론지로 인정받은 그들이 조선의 3.1운동을 이해하고 조선 민중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기 어렵다"며 "안으로는 민본주의를 갈망하면서도 밖으로는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를 지지했던 까닭이다. 이러한 모순은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군국주의의 화신인 천황제 위에서, 민주정을 구현하려는 소위 '임페리얼 데모크라시(황제 민주주의)'라는 이중성에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또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3.1운동 발생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본인들의 '양심 마비'를 비판하거나 조선인을 '친구'라 호칭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이들 역시 조선인의 독립 요구를 자신의 처지로 수용하고 실천하기는 역부족이었고, 조선인의 '자결'을 허용하자는 견해에 머물렀다"고 했다.
일본 역사교과서도 1986년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에서 발간한 <신편일본사>를 중심으로 살폈다. 그는 " 먼저 문제되는 부분은 3.1운동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돼 일어났다는 기술이다. 물론 국제적 조건으로 커다란 계기가 됐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조선인의 주체적 요인을 과소평가한 기술"이라며 "3.1운동 원인에 대한 객관적 기술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3.1운동에 대한 용어에 대해서도 "당시 일본 언론은 운동을 '폭동, 소요' 등 악의적 의미로 표현했다. 일본의 호의적 '선정'에 항거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라며 "교과서에서는 '운동'이 아니라 부정적 의미가 깃든 '사건'으로 기술하고, '만세사건'이라는 관헌 측 호칭을 사용하면서 과소평가했다"고 했다.
또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기술도 누락돼 있다. 중국 5.4운동에 대한 기술도 없고, 3.1운동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며 "이 교과서는 검정을 통과했지만, 한국·중국 등의 반발로 일본 총리가 주변 국가를 배려한다는 '초법규적' 수정지시를 내려 결국 교과서로 채택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양현혜 교수는 "2001년 우익집단에서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독자적으로 편집해 문부성에 검정을 신청했다. 바로 '후소샤(扶桑社) 간행 역사교과서'로, 이 교과서의 3.1운동 관련 서술은 <신편일본사>보다 훨씬 후퇴했다"며 "검정 전 서술은 겨우 2행 밖에 할애하지 않았고, 저변에 흐르는 인식은 앞에서 언급한 교과서의 인식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검정 후 5행으로 늘어났지만 그것 또한 조선인의 주체적·내재적, 운동과정을 왜소화시킨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