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지하교회 활성화(1998년~현재)

1990년대부터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 북녘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이름의 무서운 경제난을 겪었는데 식량이 부족하여 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다. 수많은 사람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넜는데, 그곳에서 복음을 접하고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북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북송당하기도 하고, 일부는 남으로 왔다. 이들을 통해 북녘에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고, 남녘에는 지하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탈북민들은 남에 오면 조사기관을 거쳐 정착지원 시설인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고 사회로 나온다. 조사기관(현재의 대외명칭 '북한이탈주민 보호센터')이나 하나원에는 종교시설들이 있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 두 기관의 예배를 인도했는데, 2000년대부터 지하교회 출신들을 만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지하교회는 전통교회가 지상에서 자취를 감춘 1950년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그루터기 교회'라고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 활성화된 것이다. 지하교회에 대한 이야기들은 확실하지가 않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구술(口述)들을 닥치는 대로 모아 대조, 확인하면서 공통점과 흐름을 찾아내는 것이 역사연구의 한 방법인데, 지하교회에 대해 이 방법을 시도했다가 포기한 일이 있었다.

현재 북녘교회는 재출현과 지하교회 활성화, 이 '투 트랙'의 연장선 위에 있다. 중국의 삼자교회와 가정교회가 있는 것과 비슷한 모습인데, 중국의 경우에 비춰보아 이 투 트랙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⑦현재(2000년대)
2000년대에 북녘에 세 번째 통치자가 등장하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 북녘의 국가교회는 큰 변화 없이 존속되고 유지되고 있다. 1990년대에 첫 번째 통치자가 사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북녘의 국가교회가 그 체제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신교의 일은 아니지만, 2006년에는 러시아정교회의 정백사원이 준공되었다. 정백사원은 교회의 성격, 설립 동기, 북녘과 러시아의 관계 등 여러 면에서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06년 8월 13일에 열린 정백사원 준공식에는 북녘의 내각부총리, 외무성 부상, 러시아 대사, 러시아에서 온 정교회 대표단이 참석했다. 최근에는 교황의 북녘 방문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북은 1980년대에도 같은 일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톨릭'(가톨릭의 북녘 표기)도 주목의 대상이다.

2000년 이후 북한교회에서 제일 두드러진 점은 리더십의 세대교체이다. 2012년 1월에 조그련 3대 위원장인 강영섭 목사가 사망하고 이듬해에 그의 아들인 강명철 목사가 4대 위원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의 담임목사들도 새 인물로 교체되었다. 50대 전후인 이들은 이전의 지도자들과 달리 전통교회의 체험이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이 북한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주목과 분석이 필요하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북한은 조선로동당의 통일전선부가 종교문제를 담당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통전부장을 지낸 김양건이 2015년 12월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군부 강경파로 잘 알려진 김영철이 통전부장이 되었다. 이 일이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점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뭔가 영향이 있는 것 같은데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조그련 지도자들은 여전히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을 비롯하여 홍콩, 독일, 스위스, 멀리 브라질 등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도 참석하고 있다. WCC, NCCK와의 교류도 여전하다. 작년 6월 17일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CC 70주년 축하행사에서 조그련의 강명철 위원장이 피아노를 치며 남북대표단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과 '아리랑'을 같이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중성

하나,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북녘에서 1992년 발간된 '조선말대사전'에는 종교용어의 뜻풀이에서 적대감이 사라져 큰 화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선교사'라는 말의 뜻풀이를 보면 1981년에 나온 '현대조선말사전'에는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이 예수교를 선전하고 보급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의 탈을 쓴 침략의 앞잡이'(1430쪽)라고 되어 있는데, '조선말대사전'에는 '기독교를 보급선전할 사명을 띠고 다른 나라에 파견되는 사람'(1권, 1736쪽)으로 바뀌었다.(참고: 북에서는 2007년에 전 3권으로 된 '조선말대사전' 증보판이 나왔다. 증보판의 뜻풀이는 1992년과 거의 같은데 다만 '기독교'가 '그리스도교'로 바뀌었다. 아마 어문정책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북조선기독교도연맹도 1950년대에 조선기독교도련맹이 되었다가 1990년대 말부터 현재의 이름을 쓰고 있다.)

이렇게 바뀌었을 때 남에서는 대단히 흥분했다. '북한의 종교정책이 바뀌었다' '마르크스 레닌의 종교관에서 주체사상의 종교관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고들 했다. 그런데 '로동신문'을 보면 선교사와 관련된 기사가 나올 때는 1981년 판 해설을 그대로 적용한, 아니 그보다도 더 심한 문장들이 등장한다. 가장 최근의 경우는 2017년 11월 9월인데, '인두겁을 쓴 승냥이 미제는 우리 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선교사들을 '<자선>의 탈을 쓴 침략의 선발대들'이라고 부르며, '허시모 사건'을 말하고 '<구세병원>, <제중병원>, <아동병원> 등으로 <자선>의 탈을 쓴 병원들은 철두철미 우리 인민을 노예로 만들고 침략적 야욕을 채우기 위한 미제 승냥이들의 소굴이였다' '언더우드 2세 놈은 순진한 학생들 속에 승미노예굴종사상을 불어넣는 것과 함께 우리나라에 대한 정보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활동을 벌렸다'고 비난했다.

사전과 신문이 왜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는데, 그것이 바로 북녘의 이중성이다. 그래서 북녘을 연구할 때는 행간을 읽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앞의 '허시모 사건'은 1925년 7월 25일에 평남 순안의 안식교 병원 원장이었던 헤이스머(Haysmer, 許時模)가 자기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친 소년의 두 뺨에 염산으로 '됴젹(도적)'이라고 쓴 사건을 말하는데, 공산정권은 이 일을 선교사를 공격하는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탈북민들에게 종교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면 거의 빠짐없이 이 사건을 이야기한다.

분북사 연구, 성숙한 모습으로 활성화되어야 한다

필자는 통일선교학교에서 북녘교회사에 대해 강의할 때 간추린 강의원고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는데 아무리 간추려도 20쪽이 넘는다. 그리고 분단 이후의 일의 중요한 흐름은 앞의 '분북사의 대강'에 다 들어 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통일선교를 하려면 분북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분북사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활성화되는데 성숙한 모습으로 활성화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사는 요즘 실증사관에 의한 연구가 대세이다. 실증사관은 '역사적 자료에 충실하는 동시에 사료 내용을 편견이나 선입견 등 기타 종교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끝까지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방법을 포함해서, 엄격한 사료 비판과 사실(정확한 사료)에 충실한, 있는 그대로의 서술을 강조하는 역사 연구 방법론'(다음 백과사전)을 말한다. 분북사 연구에 특히 적용되어야 할 방법이다.

유관지 목사(북한교회연구원 원장, 성화감리교회 원로목사)
유관지 목사(북한교회연구원 원장, 성화감리교회 원로목사)

실증사관의 영향으로 일차자료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현재 '북한기독교사전'을 편찬하고 있는데, 이차자료는 될 수 있는 대로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충실하기 위해 필자는 '로동신문' '김일성 전집' 등에서 종교관련 자료들을 검색, 추출하는 작업에 착수해서 지금도 진행하고 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제약을 안고 있는 자료들이고,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아, 기존의 분북사 연구가 많이 수정, 보완되어야 하겠구나!'하는 것을 느낀다. 통일선교에 있어서 분북사 연구는 필수적이다. 졸고를 통해서 이런 인식이 한구석에서라도 조그맣게 싹이 텄으면 정말 좋겠다.<끝>

-전방개척선교 2019년 1∙2월호-

유관지 목사(북한교회연구원 원장, 성화감리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