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 그러므로 믿음은 미래를 향한 담대함을 갖게 한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죽음조차 담대하게 맞는다. 기자는 큰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을 보아 왔다. 암이나 치명적인 병마와 싸우며 초라해 지는 사람도 봤다. 반면에 믿음의 자세로 병마와 싸우며 담대하게 현실을 이기는 근사한 신앙인들도 만났다.
기자가 믿음으로 담대한 사람 손미자 권사(웨스트힐 장로교회)를 만났다. 손 권사는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기자를 만나는 것이 혹시 섬기는 교회나 담임 목사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과 자신이 만난 하나님, 그리고 받은 은혜를 고백할 때에는 힘이 넘쳤다. 손을 떨며 자신을 소개하던 손 권사는 확신의 찬 음성으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고백을 들려주었다.
어린 날에 만난 교회 할아버지
손 권사는 경기도 오산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머니는 절을 지을 만큼 독실한 불자였다. 그런데 그 시절 마을 교회를 잊지 못한다. 어머니께 혼나서 울며 교회를 찾아가면 늘 반겨주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할아버지는 교회를 지키고, 교회 종을 치고, 교회를 청소하셨다. 그분은 참 따뜻하셨다. 울며 교회를 찾아간 어린 미자를 반겨주시고 포옥 감싸주시며 기도해 주셨고 눈물과 울음이 진정될 때까지 교회에서 재워주셨다. 교회가 참 따뜻한 곳이라는 추억을 갖게 되었다.
어렴풋한 빛이 비췰 때
손 권사는 기독교 학교를 다녔다. 중고등학교가 미션 스쿨이었다. 성경시간도, 채플시간도 있었지만 요리 조리 피해 다녔다. 찾아온 복음의 빛을 피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결혼했다. 미국행을 결심한 남편은 결혼식 직후 미국으로 건너가고 막내 시누이와 송탄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같은 집에 셋방살이를 하던 연세 많으신 할머니 권사님이 손 권사를 전도했다. 권사님을 따라 새벽기도회를 다니다 담임 목사님의 권면으로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다녔다. 그러나 복음의 빛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형편이 나아져 천안으로 이사하고 교회를 다녔다. 교회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에 있던 남편이 아내를 데리러 한국에 잠시 나왔다. 남편을 전도하려고 설득했으나 쉽지 않았다. 남편 전도를 위해서 남편이 좋아하는 영화 구경도 제안했으나 남편은 영화만 보고 교회는 잘 가지 않았다.
은혜를 체험하고
그러던 중에 손 권사가 갑자기 토하는 증세를 보였다. 쉬지 않고 토했다. 물도 마시지 못할 만큼 상태가 아주 심했다. 그래서 망향기도원을 찾아가 집회에 참석했다. 집회에는 교통사고를 당한 남편을 두고 홀로 참석한 사람이 있었다. 그 남편은 교통사고를 당한 자신을 돌보지 않고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아내에게 불만을 품고 기도원에서 난동을 부렸다. 난동을 부리는 그를 성도들이 붙잡아 진정시키고 부흥사가 안수 기도를 하자 그는 금방 나았다. 기적이었다. 그가 목발을 버리고 걸어서 집으로 가는 모습을 목격한 손 권사와 남편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남편(손인국 안수 집사)도 자신(손 권사)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손 권사는 가슴에 돌덩어리 같은 것이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게 되었고 남편도 머리에서 불덩어리 같은 것이 튀어 나가는 것을 체험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손 권사는 그렇게 심했던 구토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진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다. 기도원에서 내려와 손인국 손미자 부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주일 예배를 회피하던 남편이 더 적극적으로 주일을 준비하고 예배를 드렸다. 그 후 8개월은 참 좋았다. 미국 이민을 준비하면서 부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시련과 훈련의 시간들
미국으로 건너와서 라스베가스에 정착했다.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아 한동안 교회를 다니지 못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만난 할머니의 인도로 라스베가스 순복음교회로 나가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남편은 이 시절에 신앙적 방황도 했다.
이 와중에도 손 권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다. 출석했던 순복음교회 사모님이 자녀를 갖지 못하는 7가정을 위한 특별 기도를 했는데 모든 가정들이 자녀를 잉태했고 사모님도 늦둥이를 임신했다. 물론 손 권사도 임신해 아들(손죠셉)을 얻었다. 기도 응답을 경험한 축복의 시간이었다. 지금 든든하게 자란 아들을 보면 그 시절의 은혜가 새롭다. 소중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힘을 얻은 손 권사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여고시절에 익힌 한국고전 무용을 교회에서 가르쳤다. 배우는 아이들이 백여명이 될 정도로 그는 열심히 가르치고 봉사했다.
남가주에서 새로운 신앙생활
LA지역으로 이사했다.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은 만만치 않았고 건강 악화와 교회를 찾는 어려움을 핑계 삼아 신앙생활을 쉬었다. 영적으로 방황하며 약 4년간 교회 출석을 하지 않았다. 신앙과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그는 그 시절을 돌아보면 소름 돋도록 섬뜩하다. 신앙생활을 쉬는 것이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곧 적응되어 편안해지는 영적 무감각증을 경험했다.
그래도 영적인 갈망이 있었다. 늘 돌아가야 할 신앙의 자리가 보였다. 우연한 기회에 웨스트힐 총동원 전도주일 전도팀을 만나서 웨스트힐장로교회로 찾아 갔다. 온 가족이 이 교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은퇴하신 김인식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아울러 현재 오명찬 목사님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고 있다. 건강한 모습으로 세대교체를 이룬 이 교회가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병상에서 경험하는 새 은혜
손 권사는 평생 건강과 싸우고 있다. 늘 건강이 걱정이다. 다른 삶의 형편은 점점 좋아지고 있는데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단순한 질병이나 약함이 아닌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다. 2016년 8월에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검진도 수술의 과정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든든하고 감사했다. 혈압 때문에 마취에서 쉽게 깨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손 권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하나님의 치료를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빨리 퇴원해 집으로 돌아가기를 고집했다. 퇴원 후 수요예배에 참석해 예배를 드리는데 은혜가 쏟아졌다. 늘 앉아서 예배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예배할 수 있음이 감사했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감이 감사와 기쁨이었다.
그의 삶은 죽음을 직면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이 완치된 것도 아니고, 고질적인 당뇨로 여러 합병증이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벌써 죽었어야 할 자신의 몸 상태였는데 하나님이 여기까지 지켜주셨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에게 주어진 고전무용 사역을 쉬지 않는다. 고전무용이 전도의 도구가 되기를 소망힌다.
기도제목과 비젼
손 권사는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매일의 삶을 소중하게 보낸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손 권사는 시시때때로 드리는 기도가 있다. 그의 마음의 담긴 기도제목들을 정리해 본다.
첫째, “주신 사명을 감당케 하옵소서!” 손 권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다가 주님께로 돌아가고 싶다. 둘째, “환우들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그는 건강을 잃은 자의 아픔을 안다. 건강한 사람은 이 아픔을 알 수 없다. 손 권사는 많이도 아팠다. 병상에 누워서 남편과 아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던 시간도 있었다. 그는 애잔한 마음으로 아픈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셋째, “고전무용 레슨이 전도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손 권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전 무용을 했다. 고전무용이 은사요 재능이다. 그는 부채 하나만 있으면 전도가 가능하다. 배우는 아이들도 훗날 이렇게 주님 섬기기를 기도하며 일하고 있다. 넷째, “추억 속에 있는 교회 할아버지 같은 따스함을 품게 하소서!” 손 권사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면 어린 시절 고향 마을 교회 할아버지께 받은 영향이 매우 크다. 할아버지 같이 따스한 자,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교회를 향한 기도, 남편과 아들을 향한 기도들을 고백하면서 손미자 권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들인 까닭이다. 운전해주고 동행해준 아들을 옆에 두고 담담히 토해내는 간증은 따스하고 강렬하고 은혜로왔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의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