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자신의 삶은 혼자서 이루는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의 목적이 ‘함께 하는 삶’으로 완성됨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사람을 창조하실 때 ‘돕는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 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창2:18; 새번역) 성경은 배우자를 ‘돕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고 나면 사람을 보는 관점을 달리 해야 합니다. 사람 속에 담긴 하나님의 계획이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 또는 인연 속에 담긴 하나님의 간섭이 보여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흔히 인연을 중시하는 종교가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교는 인연의 심오함은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인연을 끊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반면에 성경은 불교보다 더 인연을 강조합니다. 모든 인연 속에는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연을 아름답게 가꾸고, 인간관계를 증진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일수록 인연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예수님 혼자서도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공생애 기간 동안 사람 속에 묻혀 사셨습니다. 홀로 보내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홀로 보내신 시간조차도 고독을 즐기기 위해 홀로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사람을 물리치신 것일뿐이었습니다. 신약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함께, 서로, 피차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10:24, 25; 새번역) 그 날이란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화 국제시장에 한국전쟁 당시 흥남 철수 장면이 있습니다. 눈보라가 쏟아지는 어느 날, 흥남 부두에서 미군 군함들이 군수물자와 군인들을 싣고 대대적인 철수작전을 개시합니다. 당연히 피난민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철수하는 배편에 몸을 싣고자 부두로 모여듭니다. 미군 수송선이 피난민들을 태워줍니다. 피난민들은 서로 먼저 이 수송선에 올라타기 위해 사투를 벌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역사의 종말은 어쩌면 사람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될 수 있는 그런 시점이 아닐까요? 자신이 생존하기에 급급한 그런 순간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역사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오히려 사람을 가까이하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에 성경이 제시하는 인연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아닌, 나 자신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공동체적 삶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는 삶을 위해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함께 하며 격려와 사랑을 나누는 삶이 없이,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함께 하는 삶을 주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합시다. 그리고 함께 하는 일을 통한 엄청난 유익을 경험합시다. 함께 하면 역사를 이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