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군(The Salvation Army)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구세군은 영국의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그의 부인 캐더린(Catherine)이 창시한 종교단체다. 19세기 영국 산업혁명 결과로 나타난 빈민들을 위해 전도, 자선 및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부스는 1865년 런던에 본부를 두고 천막을 치고 전도에 전념하였다. 본래 이 단체의 이름은 ‘동 런던 부흥전도단,’ 또는 ‘기독교 전도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전도단은 후에 부스가 ‘기독교인의 사명은 구세군이 되는 것이다.’라고 한 말에 따라 1878년부터 ‘구세군’이라 불렀다. 부스는 구세군을 창설한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자기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살기를 그만 두고 세상의 불행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한 몸을 바쳤다. 세상 어디를 가든지 죄와 슬픔이 없는 곳은 없다. 그런 슬픈 자의 눈물을 씻고 죄에 빠진 자들을 구원함은 나의 평생소원이다. 나는 선량한 정부의 친구다. 모든 인민은 나의 벗이다. 나는 모든 인류가 이 세상에서는 행복하게 내세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도록 힘쓸 것이다.”
구세군은 그들 조직을 군대식으로 하였고 부스 자신이 대장(大將)으로 취임하였다. 이들의 사업은 활발하게 진행되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됐다. 1895년에는 일본에 진출하였으며, 한국에는 1908년 10월에 호가드(R. Hoggard) 정령(正領) 일행이 도착하여 새문안에 영(營)을 설치하고 개전(開戰:전도)함으로써 그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항상 군인제복을 입고 길거리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전도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그들의 군복 착용으로 인해 박해를 자주 받았다. 성탄절이 되면 길모퉁이에 자선냄비를 걸어 놓고 모금을 하여 그 기금으로 빈민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봉사하는 단체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09년에는 구세군사관학교(신학교)를 설립하고 사관(목사) 양성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가난 및 사회악과의 대결로써 복음을 전하였고, 고난 속에 살아가는 이 민족들에게 꿋꿋한 정신으로 봉사했다. 또한 사회사업으로 애오개에 있던 소녀 고아원을 경영하면서 일제 침략으로 함께 밀려들어 온 여러 사회악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구세군은 호남 지역 선교를 위해 전주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로드(Ensign Lord)와 그의 부인을 보내 선교토록 하였다.
다음으로 침례교회의 조직을 살펴본다. 1900년 엘라 딩 선교회로부터 선교활동 일체를 인수한 펜윅(M. C. Fenwick)은 홀로 선교활동을 이끌어 갔다. 그는 함남 원산을 중심으로 선교하면서 1901년 엘라 딩 선교회의 사역을 한국순회선교단과 병합하여 한국에서의 침례회 선교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펜윅은 전직 훈장 신명균을 충청도에, 장기영(張基永)을 전라도에 파송하여 순회 전도하게 하였다. 신명균은 공주에 성서학원을 설립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특이한 것은 이 학교에서는 성경뿐만이 아니고 기술교육을 위해 측량부(測量部)를 두어 교육하였다는 점이다.
적극적인 전도와 선교로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이 늘어나자 교회 조직의 필요를 느낀 펜윅은 1906년 10월 충청도 강경의 강경교회에서 전 사역자를 소집하여 대회를 열었다. 그는 교회의 성격을 ‘인류의 선결은 화목이요, 그리스도인의 선결도 화목’이라 하고 조직의 명칭을 ‘대화회’(大和會)라 하고 교단 명칭은 ‘대한기독교회’로 정했다. 초대 감목(총회장)에는 펜윅이 선출되었고, 교회 본부는 원산에 두기로 했다. 이 때 이 교회는 그 전도구역을 한국을 위시하여 해외 남·북만주, 러시아, 시베리아까지로 결정하였다.
이 교회는 그 교단의 명칭을 여러 차례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본래의 명칭이었던 ‘대한기독교회’는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에 ‘대한’이라는 용어를 쓰지 못하게 억압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1921년 16회 대화회에서 교단 이름을 ‘동아기독교회’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이름을 사용한 지 10년 후에 펜윅이 ‘교회’라는 이름을 싫어하여 1933년에 이르러서는 ‘동아기독대’(東亞基督隊)로 바꾸었다. 펜윅은 교회라는 이름은 기독교회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천도교에서도 사용하고 있어서 ‘성별’(聖別)의 의미가 사라졌으므로 ‘하나님의 성별된 무리’라는 의미로 ‘대’(隊)라는 명칭이 적합하다고 주장하여 이를 채택한 것이다.
다음은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 대해 알아본다. 안식일교회는 19세기 중엽 미국의 농부 출신 침례교 밀러(William Miller)에 연원한다. 그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계시록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여 자기 나름대로 예수의 재림 날짜를 계산하였다. 그는 1843년 초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예언하면서 모두 주님 맞을 준비하라고 외치고 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유혹을 받아 생활을 정리하고 흰옷을 입고 산에 올라가 재림 주를 맞으러 갔으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밀러는 자기가 계산을 잘못했다며, 1년 뒤인 1844년에 오신다고 예언하였다. 역시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대부분 흩어졌다. 그러나 일단의 무리가 모여 만든 교회가 곧 ‘예수재림제7일안식일교회’(The Seventh Day Adventists Church)다. 이들은 안식일에 예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시켰다.
한국의 안식일 교회는 1904년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손흥조(孫興祚)와 하와이 개발공사 직원이었던 임기반(林基盤)에 의해 도입되었다. 손흥조는 하와이로 가던 중 일본에 잠시 머무는 동안 신호(神戶)에서 제7일안식일재림교회의 국유수(國谷秀) 목사에게서 침례를 받음으로 한국인 첫 안식교도가 되었다. 손흥조와 임기반은 서류 불비(不備)로 하와이 행이 불발되자 한국에 돌아와 평안도 용강(龍岡)에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교리를 깊이 알지 못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일본의 국유수 목사와 미국인 선교사 필드(F. W. Field)가 1904년 내한하여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보다 안식일을 성수를 강조하였다. 즉 일요일은 로마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 the Great)이 331년 공휴일로 선포하여 지켜진 것이라 주장했다. 성경보다 교리를 강조한 이 교회는 성경에 기초한 여타 교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안식일 성수 주장으로 인해 대부분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 같이 1900년대 초에 여러 교파가 자리 잡으면서 한국에서 위치를 확보하고 그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