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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송사에서 다문화 며느리와 토종 시어머니의 고부 갈등을 다루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면, 매번 패턴이 같다. 한국 문화를 모르는 며느리가 유교적인 시어머니와 갈등을 빚지만, 사돈댁을 방문하면서 며느리 마음을 조금 이해한다는 식의 구성이다.

이 방송을 가끔 보면 문화를 이해하기 싫어하고 예절을 잘 몰라 버릇없이 구는 며느리들도 문제지만, 시어머니들의 행동은 정말 세계 유일의 '갑질'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며느리가 잘 한다는 게 아니다. 왜 어머니가 다른(?) 부부 일에 사사건건 끼어드느냐는 거다. 아들도 '남의 남편' 아닌가?

한국 며느리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명절이 되면 며느리들의 고통이 시작된다. 그 정도도 못하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 왜 온 가족이 모여서 그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람도 늘고 있다.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옳다는 뜻이 아니라, 왜 며느리나 젊은 사람들의 뜻은 아무렇지 않게 묵살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이 드신 어머니들만 문제일까? 아니다. 많은 젊은 엄마들이 자기 자식들을 지금 그렇게 키우고 있다. 자식은 가르쳐야 할 대상, 무언가 제시해 줘야 할 대상, 내가 모범을 보여야 할 대상.... 아무튼 아직 어리고 부족해서 지도편달을 게을리하면 내가 직무유기가 되는 그런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게 왜 문제냐고? 조금만 기다려 보라.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아는 법이다.

크리스천들은 그 강박이 조금 더 심하다. 자녀를 훈계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끼고 앉아 형식적인 가정 예배라도 드리거나 뭐라도 한 가지 주입하지 않으면 큰 일 나는 것으로 안다.

어떤 사람들은 스무 살이 넘은 다 큰 자식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기도 한다. 여기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패륜 사건도 발생할 수 있다.

어떤 정승이 환갑이 넘었는데도 여든 넘은 어머니로부터 회초리를 맞아 평생 슬기로운 벼슬아치가 되었다는 식의 어릴 때 읽은 이야기가 머리에 남았는지, 부모는 아무리 늙어도 자식을 초달해야 하고 자식은 아무리 늙었어도 부모에게 어릴 때와 다름없이 (자기 의견 없이)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성경과 유교를 섞어서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개역성경에 '채찍'으로 자녀를 훈계하라는 말(잠 13:23, 23:13)은 '회초리(rod)'의 오역이며, 회초리도 아직 어릴 때 '늦기 전에(betimes, 잠 13:24)' 사용하라고 되어 있다.

개역성경은 '어릴 때에'라는 말이 빠져 있어서,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에게 때릴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게 성경대로 잘하는 일인 것처럼 번역돼 있다.

이런 단어가 성경에 있으니 아이들을 가혹하게 때려가며 징계해도 된다는 생각이 유교적인 군사부일체의 권위와 일제식 군대 문화가 맞물려 정당화된다. 그것도 다 큰 자녀에게 폭력에 가까운 훈계를 행사하는 모습이 우리나라 크리스천들에게도 일부 남아있지 않나 싶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뭐든 징계를 해야 바르게 자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에게 맞고 자란 사람이라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서 다소 자학적인 세계관을 지니게 되어, 그나마 자기가 이만큼 제대로 성장한 것은 매의 효과였다고 믿기도 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배우자가 자기보다 느슨한 교육관을 갖고 있으면, 애들을 오냐오냐 키우며 나쁜 버릇을 들인다며 책망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순종하지 않거나 잘못이라도 하면, 저런 말씀을 엄하게 실천 안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런 부모의 마음에는 어떤 심리가 있을까? 정말 아이가 바르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도 당연히 있고, 그 마음이 간절해서 그러는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음은, 이 자녀가 내 것이라는 생각, 또 나는 부모로서 이 정도의 권력과 권위는 행사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나아가 이런 강력한 훈계를 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결과에 대한 책임 회피 의식도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할 일을 다 했으니 잘못되면 네 책임이다' 하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기 위해 명분을 쌓아두는 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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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언제부터 어른일까? 1단계의 어른이 되는 것은 만 12세인 유대인의 성년식 기준이다. 2단계는 사회적 미성년자를 벗어나는 시기, 3단계는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룬 후인 것 같다.

실제로 성경에는 만 12세 넘은 자녀가 부모의 지나친 간섭을 받는 내용이 별로 없고, 특히 며느리나 결혼한 자식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교훈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고부 간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이방 여인인 며느리를 딸처럼 여겨 오히려 과부가 된 룻을 다른 친족에게 결혼시키기까지 한다. 이는 참견이 아니라 진심으로 도운 것이며, 이 일로 메시아의 혈통인 다윗 왕이 태어난다.

우리에게는 이방인인 동남아의 다문화 여성도 얼마든지 현숙한 여인이 될 수 있으며 귀한 혈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부모가 먼저 인격을 존중하고 정말 딸처럼 여긴다면, 명절에 친정 갈 스케줄부터 살펴줘야 하고, 부엌 일도 공평하게 하고, 시누이와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그 모든 것 이전에, 아들 가정의 독립성을 지켜줘야 한다. 모든 배려는 여기서 시작한다. 도대체 왜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이기 전에 아직도 내 아들이고, 또 며느리는 왜 내 아들에게 필요해서 존재하는 여자냐는 말이다.

제 역할을 못하는 못난 아들도 많지만, 어른이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다른 효도도 변변히 못하면서 어찌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겠는가. 물론 한 번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도 그 선을 뛰어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효도일 수 있지만, 어느 한국 남자가 쉽게 어머니를 실망시키면서 아내와의 독립된 가정을 주장할 수 있을까.

의존적인 딸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남편보다 잘 챙겨주니, 엄마와 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이득이 있으니 의존적인 생활은 남편이 감수할 일이라고 여긴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이브 부부로부터 금세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 안에서 온갖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어찌 보면 다 친족이고 가족이다. 하지만 전혀 그런 관계는 소개되지 않고 각각의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등장한다.

족보가 등장하면서 누가 누구를 낳고 몇 살에 죽고 이런 내용이 세세히 등장하지만, 이것은 연대를 계산하도록 하여 성경의 사실성과 역사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그들이 누구에게 예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고멜 같은 악처도 나오고, 여자에게 속은 삼손도 나오는 등 갖가지 일들이 등장하지만, 시부모가 끼어들어 책망하고 대신 결정해 주고 그런 예화는 기억이 안 난다. 또한 부모에게 물어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마마보이'나, 괴롭힘당한 며느리가 오뉴월 한을 품는 이야기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런 일이 벌어질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이거나, 기록할 만큼 중요한 교훈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 민족의 전통과 풍습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아무리 가깝게 지내더라도 끼어들 일과 아닌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아무리 자식이지만 다른 가정의 주인 행세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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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정도를 살고 오래 전에 이혼한 여성이 있다. 교회에서 나름 VIP라는 장로님 아들과 결혼을 했는데, 서로 성격이 안 맞아 갈등도 많았지만 이혼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아이들 둘이랑 우리 가족끼리는 그런대로 지냈어요. 그런데 시어머니만 끼면 일이 커지고, 어떤 대화도 어려웠죠. 어머니가 개입되면 남편도 평소 남편이 아니었고요."

결국 시어머니의 강력한 개입으로 이혼을 했다. 양쪽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 일이겠지만 그녀는 평생 그 정도 대접을 받을 만큼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 튀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다. 잘못이 크다 해도 두 사람이 결정할 문제다.

실제로 부모가 이혼을 직접 나서서 시키거나 중대한 원인 제공을 하는 일은 부지기수다. 결혼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유가 있다 해도 당연하다는 듯 앞장서서 이혼을 강요하고, 강제적인 조치를 하는 등의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부모들, 주로 어머니들의 행동은 명백한 권한 남용이다.

그렇게 자란 남편은 부모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고생해서 키워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놓고 어떻게 가정의 행복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께 불효를 할 수 없어서 침묵하고, 아내와의 불화를 택한다.

나름의 사정은 있겠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는 부모다. 당장 불효할 수 없는 아들에게 장기적인 '평생 불효'라는 못할 짓을 시키는 거다. 이혼을 해도 본인이 해야 한다.

그러면 부모님들이 자식의 가정에 과도하게 참견하는 것은 월권이니 무작정 거부해야 할까? 크리스천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어리석은 해법이다.

자식은 회초리로만 훈육하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이는 일이 먼저다. 시어머니가 정말 악독하게 했다 쳐도, 그 반응에 따라 내 본분을 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에서 타인이 어떻게 했는가는 둘째 문제이고, 우리가 선으로 갚았는지를 먼저 보신다고 믿는다. 그럴 때는 부모에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한다고 생각하고 선으로 되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명절이면 부모는 물론 친척들까지 챙기고, 며칠 동안이나 손에 물이 마를 날 없도록 고생을 한 것이 사실이라도, 그것을 악으로 갚거나 뒤에서 욕하면 자식들은 다 배운다. '부모에게도 받은 만큼만 하면 되는 거구나'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라면 손해를 보면서도 내 도리는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의 방식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기준이다. 결혼한 후에도 부모의 지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돈과 모든 지원을 받으면서 다른 모든 것은 완벽히 독립한다는 자체가 모순이기도 하다.

아무리 크리스천이라도 우리나라의 정서와 전통, 그리고 사회적 통념이나 타인들의 일반적 기준을 고려해 적절히 지혜롭게 행동할 필요도 있다. 이 모든 생각을 합리적으로 판단해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자는 것이며, 이를 세상의 모범으로 전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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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문제다.

또 다른 지인은 '돌싱'인데 연애만 몇 년째다. 상대방 부모님의 생신도 챙길 정도로 가깝기는 하지만, 며칠씩 서로의 집을 오가며 살더라도 절대 결혼은 하지 않을 거란다. 자기만의 편한 생활을 포기하기 싫은 것 이상으로 소모적인 '시월드 놀이'는 더 이상 단 하루도 하기가 싫단다. 그랬으면 벌써 두 번째 이혼을 했을 거라고, 상대방과 어른들이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한다.

크리스천에게는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죽 했으면 그럴까 싶기도 하다.

갈등을 겪고 싸우다가도 화해하고, 미워했다가도 이해하는 것이 가족이 되는 과정이다. 얼마든지 반목할 수도 있고, 서로 상처를 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자녀의 가정이 깨지도록 유도하는 일은 크나큰 죄악이다.

최소한 기독교인들이라도, 자식의 가정에 대해 부모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기 전에 성경을 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시어머니'를 찾으면 불과 13구절뿐이다. 여기서 룻기의 아름다운 고부 간을 빼면 단 3구절이 남는데, 문맥상 시어머니의 역할과 관계 없는 구절이다. 장모는 단어로 딱 한 곳에 나오고, 내용으로는 5군데 정도 나온다. 이 역시 사건의 단순 서술과 율법에 관한 것뿐이다.

자식이 잘했다는 게 아니다. 자식들은 늘 잘못한다. 자식은 잘해 주든지 못해 주든지, 가르치든지 안 가르치든지 잘못하는 존재이며, 부족하고 괘씸한 존재다. 하지만 계속 인생을 떠먹여 주면, 영영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각자의 인생을 책임지게 하라. 흘리든 묻히든 쏟아버리든, 좌충우돌 하면서 배우는 게 인생이다. 없어도 될 때는 끊임없이 끼어들고 정작 필요할 때는 없는 부모가 아니라, 늘 한걸음 떨어져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좋은 부모가 아닌가 한다.

오늘도 자식들은 잘 살든 못 살든 지나치게 거리가 가까운 부모를 향해, 우리 인생에서 조금만 물러서 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 딱 한 걸음만 물러나 달라는 뜻을 비춰도, 어떤 부모들은 "뭐라고? 빠지라고? 그래, 내가 죽어야지, 내가 이런 대접 받으려고 열 달 배 아파서 나았나" 한다.

스크린도어가 없는 지하철 승강장에서는, 열차가 들어올 때 안전선을 넘어가 서 있으면 위험하다. 한 걸음 물러서 있어야 한다. 지금은 내 시간이 아니다. 자신들의 인생 열차를 운전하고 있는 그들이 당신을 보고 놀라 급정거를 하느라 우왕좌왕하며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 아닐까.

자신들의 문제로 헤어지는 일도 세상에는 넘쳐난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부모님 때문에 헤어졌다'는, 은혜롭지 않은 간증(?)은 더 이상 듣지 않게 되길.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30여 종
www.woogy68.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