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 우리 모두가 주인 노릇을 할 수는 없다." - 셰익스피어, 『오셀로』
유방의 참모 가운데 군사로 천하를 호령했던 인물이 한신이었다면 책략으로 천하를 호령한 인물은 장량이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장량만큼 지략이 뛰어난 인물은 없었다. 장량의 자는 자방이다. 탁월한 식견과 안목을 가진 참모를 일컬어 장자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장량에게서 유래되었다. 장량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도 뛰어나 일찌감치 천하 쟁탈전의 향배를 점치고 유방 편에 섰다. 장량은 유방을 가리켜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고 말했다. 2인자로서 성공한 장량이 가진 가장 큰 덕목은 인내심이었다. 장량은 상황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결코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일이 없었다. 항상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유방을 설득해 천하의 대세를 유방 쪽으로 기울게 했다.
장량은 유방의 탐욕을 적절하게 제어하면서 그를 보좌했다. 유방은 진의 수도에 입성한 후 궁궐의 금은보화와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넋을 잃는다. 측근 장수 번쾌가 유방에게 남들의 이목도 있고 하니 궁궐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지만 유방은 듣지 않았다. 이에 장량은 다음과 같이 충고해 유방의 발걸음을 돌려 세운다.
"진나라가 무도했기 때문에 패공께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천하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검소한 것이 가장 큰 밑천입니다. 지금 진나라에 입성하자마자 재물을 탐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패공께서는 부디 번쾌의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 <사기, 유후세가>
이에 유방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도 장량의 말을 따랐다. 유방이 홍문연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장량의 지략 덕분이었다. 항우에 의해 파촉으로 쫓겨난 유방이 투덜거릴 때도 장량은 오지로 가 있으면 항우를 방심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라며 유방을 설득해서 파촉 땅으로 가게 했다. 당대 최고의 무장이면서 천하 쟁패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었던 한신을 유방에게 돌려세운 것도 장량이었다.
한신이 제나라를 접수한 후 유방에게 사신을 보내 지역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필요하다며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假王)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유방은 불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옆에 있던 장량은 사신이 눈치채지 못하게 유방의 발을 꾹 밟고는 한신을 가왕이 아니라 진왕(眞王)으로 임명하라고 조언한다. 머리 회전이 빠른 유방은 곧바로 사신이 들으라는 듯 "사내가 가왕이 뭐야, 이왕이면 진왕을 해야지!"라고 말해 국면을 수습한다. 그리고 곧바로 한신을 제나라의 왕으로 봉하는 조서를 내린다. 제나라의 진짜 왕이 된 한신은 유방의 통 큰 인사에 만족해하며 이후 유방에게 적극 협력한다.
어느 날 유방은 측근 역이기의 조언을 듣고 과거 주나라 왕족의 후손들을 찾아내 각 지역의 군주로 삼으려 했다. 민심을 얻으려는 방책이었지만 유방의 진영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세우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는 위험한 수였다. 유방이 역이기의 제안에 최종 결재를 하려고 했을 때 장량이 나서서 상황을 반전시킨다. 장량은 마침 식사 중이던 유방에게 젓가락을 달라고 하여 이리저리 놓아 가면서 역이기가 제안한 방책의 허점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결론을 맺는다.
"천하의 인걸들이 고향을 떠나 폐하를 따르는 것은 그저 한 치의 땅이라도 얻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6국을 복구하여 한, 위, 연, 조, 제, 초의 후손을 세우면 천하의 인걸들은 모두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과거의 주인을 섬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는 누구와 함께 천하를 도모하시렵니까? 그 식객의 계책을 채택하신다면 폐하의 패업은 끝장나고 맙니다." - <사기, 유후세가>
장량은 뛰어난 지략가였지만 결코 1인자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다. 그것이 한신과의 차이였다. 지략에서는 자신이 유방보다 몇 수 위였지만 천하의 주인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1인자가 될 사람과 2인자로 만족해야 할 사람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장량은 유방과 자신의 관계를 인간과 인간이 아니라 군주와 신하로서의 관계로 명확하게 설정했다. 그리고 절대로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황제의 자리는 오르지 못할 나무였으며, 장량은 그 나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직접 천하의 주인이 되겠다는 욕망을 품을 수도 있었으며 충분히 그러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장량은 2인자로서 멈추어 섰다.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 족한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고 한 노자의 말처럼 장량은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알았기 때문에 천하통일 후에도 화를 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한신이 어설프게 1인자를 꿈꾸다가 비참하게 몰락한 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장량이 고금을 통틀어 가장 성공한 2인자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냉철한 현실 인식과 절제된 처신이 뒷받침된 '관계의 기술' 덕분이었다.
- 『관계의 비결』 중에서
(박영규 지음 / MID / 320쪽 / 15,000원) <북코스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