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조상 아담이 창조되어지면서부터 엿새 동안 하나님이 하늘과 또 땅과 바다 속의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위임하시며 이 모든 것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이 놀라운 특권은 깨닫고 보면 우주 전체에 있는 만물과 또 지상과 수중에 있는 모든 피조물, 이 모든 것들을 인간들에게 주시기 위한 선물로 만드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를 귀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의 한 부분을 우리들 속에 파생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천하보다 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이 파생되어져서 피조물이 된 인간들이 그 영으로 지옥 가는 것이 너무나 괴로우시기 때문에 그 영들을 하늘나라로 되돌리시기 위하여 아들을 희생양으로 십자가 대속의 죽임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의 육천년 역사를 기억하며 되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공명심, 자기명예를 위하여 또는 자기허욕과 육신의 안위를 위하여 집착하고 이성을 잃을 정도로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영적가치를 망각한 상태가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그 하나님과 가치 기준이 일치한 겁니다.
이전에는 영이라는 것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고 그저 속물근성만으로 살아왔기도 합니다. 속물근성이라는 것은 물질에 예속되어 있다는 뿌리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칼 막스라는 사람은 러시아를 통해서 볼세비키 혁명을 일으키며 스탈린이라는 사람이 세계를 공산화하겠다고 시작할 때 유물사관을 내세웠습니다. 유물사관은 오로지 물질이 우리에게 천국을 만들어 주는 최고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장차 망할 성이라고 해서 장망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뿌리를 세상에다 더 뻗으려고 물질기대와 허욕에 시간과 정욕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면서 그 세상에서 무엇을 얻어 보자고 하는 것은 천국소망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것을 좋아하는 하늘 시민권자는 하나님은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유익한 이득이 되게 내버려 두실리가 없습니다. 이 세상 것을 사랑한 만큼 세상 것으로부터 엄청난 환난과 고통, 시련을 겪게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의 도시 소돔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실 때에 천둥 번개 소리가 나더라도 너는 절대로 뒤돌아 보지 말고 소알 평지로 갈 때에 앞만 보고 가라고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에게 당부를 했었고, 그 당부를 받고 이제 소알 평지를 향해 달려가는데 뒤에서 번개 불이 번쩍이고 천둥소리와 천지 개벽하는 소리에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보다 세상에 두고 가는 물질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 간절해서 명령을 거역하고 뒤를 바라보다가 그 즉시 선 채로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물질적인 기대 심리를 버리지 못해 하나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은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허망한 것을 행하지 말라는 것은 그것을 좇지 말라는 것입니다. 허망한 것이란 허무맹랑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네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아니하고 도움도 되지 아니하고 보람도 될 수 없는 허무맹랑한 것을 위하여 헛수고 하지 말라, 그렇게 허망한 것을 위하여 시간과 정욕을 아낌없이 집중하는 인생은 18절과 같은 사람이 된다고 하십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총명은 옳고 그른 것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지각입니다. 그런데 총명이 어두워져서 어느 것이 귀하고 어느 것이 더 무익하고 비천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지적으로나 또 결과적으로 윤리적 도의적으로 내가 해서 안될 짓인가 하는 것에 대한 전혀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에 감동도 회개도 없고 변화도 없이 길바닥에다가 금덩어리를 던져 주어도 길바닥은 그것이 새똥인지 금덩어리인지 전혀 분별도 못하고 가치도 모르고 반응도 없고 감각도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굳어진 심령에 아무리 생명의 보배로운 진리 말씀이 떨어져도 전혀 귀한 줄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의 사람입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방임(放任)이라는 것은 방탕에다 자기를 내던져 버린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진짜 예수님을 정확하게 소개받고 그분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심을 받았다고 하면 22절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타락한 인간의 자기 의지적 결단이나 노력으로 거듭날 수는 절대로 없다는 것이고 택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성령을 보내시어서 성령이 그에게 불가항력적 은혜로 집중적인 역사를 하실 때에 자기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한 계획 속에 성령이 불같은 역사로 말미암아 피동적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절대주의로 사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중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구제하고 전도하고 교회 봉사하고 하나님 뜻을 받들어 교회적 사명에 앞장 서게 되고 목자의 목회에도 적극적인 이해와 아낌없는 정성으로 손발 잘 맞추어서 협력 봉사할 수 있도록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 되는 재창조의 주인공이 되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25절부터의 말씀처럼 살라고 하십니다.
저질스럽고 속되고 악한 말은 절대로 안 써야 합니다. 상스럽고 더러운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유익을 위하여 필요한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서든지 한 샘이 단물과 쓴물을 같이 낼 수는 없습니다.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로 은혜 끼치는 말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의 언어습관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의 보증은 내가 모시고 있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것, 말하는것, 행동하는 것, 모두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이 다 보시고 지키시고 듣고 계십니다. 거듭난 성도의 삶을 통하여 생활 현장에서 확실히 인격 수양과 언어 예절과 행동목표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받들어 섬길려는 의도로 일치하는 처신이 되어진다면 성령이 그 사람을 근심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너희는 노하고 분내고 떠들고 남 잘하는 것 훼방하고 모든 악한 의도까지 함께 다 버리라 하셨습니다. 성도 상호간에 인자하게 하라는 말은 서로를 불쌍히 여기라는 겁니다. 그것은 존귀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오른팔로 쓰실 사람을 마귀가 시기하고 미워 질투하고 죽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악을 쓰고 훼방해 올 수 밖에 없기에 대적과 행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애타게 자존심을 다 버려 가면서 속마음을 다 비우고 전도를 하려고 여러 해 집중적으로 엄청 투자하고 애를 썼는데도 전혀 하나님 나라에 같이 갈 수 있을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고 진리의 교회로 부르셔서 성령으로 집중적인 조명과 계시로 역사하셔서 불가항력적 은혜를 주심으로 나같은 죄인 살리심이 감사하게 생각되어진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용서하신 것 같이 성도 상호간에도 먼저 용서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점수를 따는 일일 것입니다.
신자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을 잊지 말고 하나님과 가치관을 일치시켜서 이 영적 가치 제일주의를 지켜서 믿음 있는 자로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영적 성과를 더 많이 하나님 앞에 이뤄 드리기 위해 애써 보시기 바랍니다.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밀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