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안창호, 조만식,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김치선, 이성봉,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김정준, 남궁억.... 이들은 모두 한국 초기교회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순교자이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 죽고, 세상에 대하여 죽은 여러 의미의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인 지도자였다. 한국 순교자의 소리는 한국 초기 교회 순교자들이 전했던 말씀과 설교를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 쇠퇴의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오는 11월 22일부터 매주 화~금요일 새벽 6시 정릉 고가도로 아래에서 '언약갱신예배'를 드린다고 밝혔다. 예배에서는 한국 초기 순교자들의 메시지를 나누고 성만찬하는 순서로 진행한다.
예배를 드리는 정릉 고가도로 밑은 한국 초기 기독교인 교사인 김교신 선생이 매일 아침 한국을 위해 부르짖은 장소다. 당시는 암벽들로 둘러싸여 있고 옆에서 폭포가 떨어지던 평평한 바위였다고 한다.
한국 순교자의 소리 공동설립자이자 CEO인 에릭 폴리 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와 분단된 요즘 한국의 심각한 문제의 해결책은 초기 한국교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겸손히 귀를 기울일 때 주어질 것"이라며 예배의 취지를 설명했다. 페이스북, 유튜브에서 다시보기(VOD) 서비스를 제공하며 추후 AM 및 단파, 인터넷 라디오 등으로도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특히 22일 첫 예배에는 김교신 선생의 딸이 동참한다. 본지는 한국 순교자의 소리 공동설립자이자 CEO인 에릭 폴리 목사의 언양갱신예배에 관한 기고를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문의 02-2065-0703)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나를 좋아했지만 한국인이 아닌 사람과의 결혼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저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나와 결혼을 한다 해도 전혀 한국사람이기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생각은 사실 나에게 있어서 지키기 쉬운 약속이었다. 아내를 만난 날부터 나는 한국에 대해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읽기 시작했고, 그 모든 것이 매우 흥미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국 음식만 먹기 시작했고, 모든 한국 음식이 맛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체중까지 크게 줄어들면서 더욱 건강해졌다. 그 어떤 것도 내게는 희생 같지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더 많이 배우게 되었다.
우리가 결혼한 후, 아내를 설득해 함께 한국을 섬기자고 했던 것은 바로 나였다. 춤에 선천적인 소질이 없으면서도 아내의 한국 전통 무용 공연에서 그녀와 함께 공연하기 위해, 나는 밤새도록 차고에서 한국춤을 연습하면서 아내를 거의 미치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몇몇 작은 한인교회에서 영어사역 목회자로서 파트타임 사역을 맡기도 했다. 비록 전세계 1,500개 이상의 사역 단체와 교단들에게 조언과 상담을 해주는 일과 훨씬 더 큰 미국 교회와 사역 단체의 담임 목회자로서 섬겼었지만 말이다. 나는 한국을 통해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으며, 할 수 있는 한 어떤 방법으로든 그렇게 배운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내 나를 놀라게 한 사실은 정작 한국인들은 한국 문화나 역사, 혹은 한국이라는 기본적인 존재를 높이 평가하는 나의 생각에 대개 공감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울의 스카이라인(하늘을 배경으로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윤곽)만 보더라도, 현대 한국 문화에 관한 깊이 있는 진실을 알 수 있다. 한국인들은 오래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얼마 되지도 않은 건물을 허물어버리고는 그곳을 새 건물로 대체해버린다. 한국인들은 스스로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대한다. 마치 자신이 못생기게 태어난 것이 의심할 나위 없는 진실이라 여긴다. 그래서 점점 더 어린 나이에, 그리고 점점 더 심한 외과적 방법으로 성형 수술을 감행하여 이러한 선천적 결함들을 뜯어고쳐야 한다. 흰머리가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로써 젊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것조차도 한국인들에겐 힘겨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기독교인들 가운데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자신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일은 거의 강조되고 있지 않는다. 독특함과 다름은 없애야 할 약점이 되었다. 언제나 인기 있거나 대단하거나 성공적인 것과의 유사성이 추구되기 때문이다. 현대 남한의 기독교 모습에서는 모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미국을 제외하고 남한에 있는 교회건물들보다 더 미국같아 보이는 곳은 없다. 미국을 제외한 그 어떤 곳의 목회자도 남한보다 더 미국인처럼 옷을 입지는 않는다. 아니면 적어도 남한의 교회는 미국 교회들이 보여주었던 방법과 미국 목회자들이 입었던 옷을 모방한다.
그리고 결혼한 초기에 내가 만났던 남한 목회자들은 그런 모습을 최신의 모습으로 바꿔야 할 때가 아닌지에 대하여 고심하고 있었다. 1991년부터 남한 교회의 교인 수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래서 남한 목회자들은 전 세계를 돌면서 부흥과 회복을 가져다 줄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한 남한 목회자들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나와 아내는 이러한 남한 목사로 구성된 큰 그룹들을 우리 집에서 대접하였다. 그들은 나를 만나고 싶어했는데, 내가 미국 사역 단체들의 최고 지도자들 다수와 친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쁘게 그들을 소개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한국 목회자들이 설명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이 성공한 미국 목사들로부터 청종함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영적으로 말해서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한국 교회와 분단된 요즘의 한국의 심각한 문제들에 관한 해결책이 모두가 초기 한국 교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겸손히 귀를 기울일 때에만 비로소 주어질 수 있도록 정하셨다고 믿는다. 이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살던 시대의 훨씬 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훨씬 더 큰 문제들과 마주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 기독교 역사상 거의 유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문화와 언어와 문자와 심지어는 고난을 견딜 능력까지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개조하거나 버릴 수 있는 원료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에 사용되는 하나님의 선물로써 그것들을 수용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