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현실의 해체: 포스트모더니즘이 초래하는 영혼 상실의 위기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요소는 무엇일까? 관객에 따라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잡탕'스러운 설정이 가장 눈에 띄었다. 한국의 산문 문학과 영화 시나리오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오마주와 패러디의 향연이 이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펼쳐진다. 달리 말해, <살인자의 기억법>은 브리콜라주의 미묘한 풍취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눈앞에 드러나는 오마주만 나열해도 <살인자의 기억법>이 보이는 브리콜라주적 성격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영화의 최초 및 최후에 등장하는 '철로 터널' 장면은 이 영화의 주연배우 설경구를 스타 반열에 올려 준 <박하사탕(1999)>의 대표 장면을 연상시킨다. 원신연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박하사탕>의 장면을 재현할 의도가 있었다고 직접 시인한 바 있다.
주인공인 김병수(설경구 분)의 기본 설정은 미국의 드라마 <덱스터(Dexter, 2006-2013)>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영화 <메멘토(Memento, 2000)>를 따른다. 의료적 전문성을 갖췄고, 자신이 판단하기에 악인으로 규정된 자들만 살해하며, 자기 가족 등 주변인을 위협하는 다른 연쇄살인마와 대결하는 모습은 드라마 <덱스터>의 주인공 덱스터 모건(마이클 C. 홀 분)의 설정과 거의 동일하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혹은 위협하는) 살인범을 찾아야 한다면서 중요한 순간마다 기억을 잃고, 또 자신이 만들어 낸 망상과 현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모습은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 셸비(가이 피어스 분)의 설정과 별 차이가 없다.
장년의 연쇄살인범 김병수와 젊은 연쇄살인범 민태주(김남길 분) 사이에 형성되는 갈등의 외형은 박찬욱 감독의 스릴러 영화 <올드보이(2003)>를 닮았다.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정신적으로 심각한, 하자 있는 아버지가 살인마의 마수로부터 딸을 구하려 하는 모습, 그리고 그런 노력을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 파렴치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갖춘 젊은 살인마의 대결 양상은 <올드보이>의 두 주인공 오대수(최민식 분)와 이우진(유지태 분)의 처절한 수싸움을 연상시킨다.
플롯의 구성 방식에서도 현란한 모방 능력이 발휘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1960-1970년대 중남미 문학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 방식의 플롯 구성이다.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의 대하소설 <백년(동안)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 1967)>,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El jardín de senderos que se bifurcan, 1941)> 등은 마술적 사실주의가 적용된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두 개의 현상계를 이어 놓고 어느 편이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문학 기법의 기저에는 실존철학(existential philosophy), 현상학적 해석학(phenomenological hermeneutics),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절묘하게 혼재되어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를 대중적인 방식으로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살인자의 기억법> 역시 이 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사람의 삶을 이해함에 있어 내적 본질보다는 현상을, 객관적 실체보다는 해석을 진리에 더 가까운 것으로 여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조는 기독교적 영혼 및 인간 이해와 여러 모로 상충된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비록 대작이 없는 심각한 비수기이긴 해도, 최근 2주 동안 연속으로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해 결국 손익분기점인 관객수 220만을 넘어섰다. 이는 이 작품이 대중에게 별 거부감 없이 다가서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현재의 대중이 마술적 사실주의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이해 방식에 익숙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현실은 한국의 기독교 복음화라는 관점으로 볼 때 다소 고달프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살인자의 기억법> 같은 플롯 구성을 가진 영화가 무난하게 흥행에 성공한다는 것은 영혼의 실체적 초월성과 불멸성, 물질적 피조계의 객관적 실재성 같은 기독교의 기본적 인간 및 세계 이해가 우리 사회로부터 점차 소외되고 있다는 하나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해체: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
상기한 바대로,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1960-1970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문학 기법이다. 이 용어는 원래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미술사조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1955년에 푸에르토 리코 출신의 문학 비평가 앙헬 플로레스(Ángel Flores)가 문학 용어로 전용하면서 문학사조를 지칭하는 말로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겨 준 소설 <백년의 고독>은 마술적 사실주의를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국내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얻은 바 있다.
<백년의 고독>이 선보이는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우선 유사한 이름을 가진 인물을 여럿 등장시킨다. 이들은 혈연 관계가 있고, 성격도 비슷하다. 다만 각기 살아가는 시대와 주변 인물이 다를 뿐이다. 이들의 삶은 때로는 평행선을 달리고, 때로는 교차하면서 연결되는데, 어떤 때는 서로 간에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깊은 유사성을 보인다. 그리고 이들의 삶을 연결해 주기 위해 주변 인물들의 단편적 이야기들이 액자식으로 편입된다.
이렇게 여러 겹으로 겹쳐진 이야기들 속에는 사실 상당한 수준의 허구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유사하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삶의 모습들이 제법 조밀한 관계 속에서 중첩되고, 그 묘사 또한 거의 '마술적인 수준으로 사실적'이라서, 독자는 갈수록 어느 것이 허구이고 현실인지 구별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다.
이런 묘사 방식은 삶의 현상적 다원성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한 사람의 삶 속에는 여러 층위의 현상들이 겹쳐져 있으므로, 하나의 특정한 측면만을 삶의 본질로 여기는 것은 실상 우리의 실존 이해를 심각하게 왜곡한다는 것이 마술적 사실주의가 전달하는 메시지다. 이런 메시지는 영혼, 신앙, 이성 등 삶의 한 부분적 특성만을 놓고 한 사람의 인격적 연속성을 판별하는 것이 부당한 처사라고 가르친다.
이런 특징 때문에 마술적 사실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추구하는 대표적인 문학적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람의 삶의 근원적 특성을 다원성으로 본다. 따라서 단편적이고 유일한 삶의 토대라는 구시대적 허상을 포기하라고 가르친다. 이런 맥락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을 충실하게 뒷받침하는 문학적 기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어떤 방식으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도입하고 있는가? 우선 이 영화는 주인공인 연쇄살인마 김병수를 알츠하이머병, 즉 치매 환자로 소개한다. 이 치매 증상으로 인해 김병수의 현상계는 두 개로 구분된다. 하나는 딸인 은희(설현 분)와 함께하는 평범한 현실의 삶이고, 하나는 과거에 자행했던 살인의 습성을 간직한 야수와 같은 고독한 삶이다.
김병수는 15년 전 마지막 살인을 자행한 뒤, 살인자의 삶을 봉인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가 치매 증상의 심화로 인해, 그리고 자신과 딸 은희를 위협하는 또 다른 연쇄살인마 민태주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에게 내재돼 있던 두 개의 삶을 번갈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민태주가 김병수를 압박하며 걸어오는 심리전은 같은 연쇄살인마 김병수가 보기에도 치밀하다. 다시 말해 사실적이다.
이로 인해 김병수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두 가지 삶의 방식 모두에서 절박함을 느낀다. 딸 은희와의 평온한 일상을 지키려는 절박함, 그리고 라이벌 살인마를 처치해 살인으로부터 오는 만족감을 얻으려는 절박함, 이 두 가지 절박함이 김병수의 두 자아를 모두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 느끼게 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 김병수. 어떤 삶이 현실의 자아인지 구분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한다. |
평론상 편의를 위해 <살인자의 기억법>에 등장하는 주요 현상계를 단지 두 개로 나누긴 했지만, 사실 영화에서는 이 두 가지 삶으로부터 여러 개의 삶이 더 분화되어 나온다. 마치 <백년의 고독>에서 아우렐리아노(Aureliano)라는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수도 없이 등장하듯,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김병수의 자아는 거의 정신분열 상태에 가깝다 할 정도로 분화되어 있고 중첩되어 있다.
결국 영화는 러닝타임의 한계 때문인지, 어느 김병수가 객관적 현실인지 알려주지 않은 채 열린 결말을 도모한다. 치매에도 딸 은희를 살인마 민태주에게서 지켜낸 것이 현실인지, 은희를 살인마로부터 지켜내는 데 실패해 복수를 위해 추적을 계속하는 것이 현실인지, 은희를 죽인 것은 김병수 자신이고 민태주라는 인물은 애초에 환각이었던 것인지, 어린 시절부터 만나 온 주변인물 대부분이 환각에 불과했던 것인지, 이 외에도 여러 결말이 있을 수 있지만, <살인자의 기억법>은 어떤 것이 현실인지 명쾌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이제는 열린 결말도 영화계에서 하나의 클리셰처럼 굳어지는 추세라 별로 신선한 감은 없지만, 어쨌든 <살인자의 기억법>은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는 결말을 채택함으로써, 삶의 근원적 다원성을 제법 충실하게 강조하고 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동명의 원작 소설(오른쪽)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
◈현실과 공허(空虛): 삶의 다원적 근원성에 대한 동양적 이해
영화도 그렇지만 원작 소설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2013년 출간된 소설가 김영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원작의 결말 역시 열린 결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 직전까지 결말은 다음과 같다.
사실 민태주라는 새로운 연쇄살인마는 김병수의 환각이었고, 현실의 민태주는 평범한 경찰이었으며, 은희는 자기의 딸이 아니라 치매에 걸린 자신을 돌봐주던 가정 요양사였고, 이 여성을 김병수가 치매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살인자의 습관에 따라 죽인 것이었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 결말은 완전하게 전복된다. 뿐만 아니라 소설의 내러티브 전체가 근본으로부터 전복되고 해체된다. 소설 최후의 장면에서 김병수는 치매 증상이 최고조에 이르러 주변 사물도 인식하지 못하고 의식조차 완전히 무화되는 상태에 이른다. 그리고 그의 기억도 모두 함께 소멸된다. 이 장면에서 소설은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결국 원작 소설의 대미(大尾)는 김병수의 1인칭 시점으로 진술된 소설의 내용 전체 가운데 어떤 것이 현실이고 환각인지 구분할 수 없고, 또 이를 구분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모든 것이 현실인 동시에, 모든 것이 공(空)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김병수는 현실, 기억, 환각의 구별이 어려워지자 자신의 기억들을 녹음하는 데 힘쓴다. 그러나 이런 노력조차도 결말에 가서는 헛된 것이 된다. |
다원성과 공허(空虛)에 대한 사유로만 보면, 서양은 동양을 따라잡기 어렵다. 서양의 철학과 신학이 절대적 존재(esse absolutum)와 사실 자체(res ipsa)에 대한 사유로만 2,000년 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동양에서는 절대 무(絶對 無)와 공허에 대한 사유로 그 시간을 보냈다. 도가(道家) 사상과 불교(佛敎) 사상이 절묘하게 융합된 선불교(禪佛敎)의 가르침들은 서구에서는 새롭고 고차원적이나 동양에서는 생활처럼 익숙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원작 소설이든 영화든 간에, 현실(혹은 존재), 기억, 환각, 그리고 무(無)의 경계를 허물어 버림으로써 극단의 다원성을 삶의 본질로 제시한다. 결론 이전까지는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는 방식으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차용했지만, 마지막에는 서구의 다원성 사유를 월등히 뛰어넘는 선불교적 사유로 대미를 장식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다원성을 형성하는 다양한 경계 그 자체조차 허물어 버리는 절대 무의 심연을 엿보임으로써, 딸 은희도, 살인마 민태주도, 그 외 김병수가 겪어 온 모든 인물들에 대한 기억도 실은 공(空)을 기원으로 삼는 무(無)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고 진술한다.
이런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선불교는 상성(相性)이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양측 모두 다원성을 변호하는 데 강점을 갖고 있다. 오늘날 세계문화를 지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한국 사회에서 도가적-불교적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제시하는 공(空)과 무(無)에 대한 가르침은 한국문화의 근원과도 같은, 우리에게 심히 익숙한 사상이다. 동시에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딜레마를 겪게 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문화적으로나 심정적으로는 친숙한데, 성경의 가르침, 특히 자아와 영혼에 대한 가르침과는 상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공(空) 사상과 관련된 한국 고유의 종교적-문화적 요소는 머리와 마음이 따로 노는 불완전한 신앙을 양산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선불교의 공(空)을 표현한 그림.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그림이다. |
◈현실과 영혼: 기억보다 상위에 위치한 초월적 본질, 영혼
서양 철학이나 기독교 신학에도 무(無)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대표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 204-270)는 진(眞)∙선(善)∙미(美)의 이데아(ἰδέα, idea)이자 최고 존재인 일자(一者, the One)를 존재의 심연(ἄβυσσος, abussos)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심연이란 모든 존재자의 형상들을 구별 없이 포용하는 절대적 통일이라는 뜻이다. 이 심연 속에서는 개별 존재자의 존재가 무화(無化)되어 버린다고 플로티노스는 주장했다. 이 심연 사상은 훗날 서양 철학 및 기독교 신비사상의 한 주축을 이룬다.
고대 기독교 대표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도 무(無)에 대해 가르쳤다. 그는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를 해석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creatio ex nihilo)고 가르쳤다. 다만 어거스틴의 무는 도가나 불교에서 말하는 절대 무가 아니라 상대 무(相對 無), 즉 한시적으로 무(無)에 속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사역으로 인해 존재로 화(化)하는 그런 무(無)로 소개된다.
중세에는 신비주의 신학의 거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 등이 무(無) 또는 무지(無知)의 신학을 정립했다. 에크하르트도 플로티노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심연(abyssus)으로 표현했다. 에크하르트가 믿었던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존재를 한없이 내어주심으로 만물의 존재와 생명을 보존하시는 창조주였다. 쿠자누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오직 무지(無知)로, 신비로 남아 있을 때에만 비로소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사상은 훗날 종교개혁을 개시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자기비허(自己脾虛) 기독론, 즉 케노시스 기독론(kenotic Christology)으로 이어진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주신(빌 2:5-8)"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은 루터가 중점적으로 강조한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얻는 구원의 복음을 지지하는 데 적합한 것이었다.
▲무(無)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가르침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발전되어 왔다. |
이처럼 서양의 사유와 기독교 신학 내부에도 전통적으로 무(無)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져 내려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들도 절대 무, 혹은 공(空)에 대한 사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절대 무에 대한 믿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의 존재까지 무(無)에 속한 것으로 여기게 할 것이고, 이로써 영생과 영벌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영혼론 및 내세관을 근간으로부터 흔들 것이라는 우려가 기독교 지도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 정통 기독교 신학의 인간 이해는 본질적 실체이자 불멸의 실체인 영혼의 존재 없이 성립될 수 없다. 영감, 의식, 의지, 감정, 마음, 기억, 그리고 육체의 생명 모두가 영혼을 기반으로 성립되는 개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전달하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이해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당사자가 겪는 모든 현상들을 그의 존재로 인정한다. 그러면서 어차피 무화되어 공(空)으로 돌아갈 것들에 과연 구별이 필요한지 반문한다.
이처럼 사람의 삶이 갖는 다원성을 수긍함으로써 한 개인의 인격적 연속성을 긍정하기는 하지만, 여기에 영혼의 존재 여부는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더 나아가 영혼이 아예 존재하지 말아야 할 당위성을 제시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극한 혼란 속에 현실을 망각해 가는 김병수. 결국 실존의 본질은 무(無)라는 사상을 전달하고 있다. |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인격적 연속성이 영혼의 구원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교회는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의 구원 가능성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데, 이는 영혼이 사람의 존재적 본질을 구성하는 실체(substance)라는 믿음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일부 혹은 전부가 무화되더라도, 한 사람의 인격적 연속성은 영혼을 통해 지지된다는 것이 교회들의 통상적인 입장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가르침이 선불교의 공(空)사상뿐만 아니라, 근대 계몽주의와 현대 실존철학에 의해서도 부정되고 있지만, 보수 정통 개신교 신학은 여러 방면에서 치매 발병 이전의 신앙이 발병 이후에도 연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인정할 만한 근거들을 제시하려 힘쓴다.
이 일이 결코 순탄하게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라는 말씀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누구라도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구원 가능성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음'이라는 요소, 그리고 '고백'이라는 행위가 기억이라는 축 없이 성립될 수 있을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이 의심을 극복할 수 있는 길로 사람의 영혼에 부여되는 영성(spirituality)과 영감(inspiration)을 제시한다. 기억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이런 초월적 요소들이 한 사람의 인격적-신앙적-영적 연속성을 보존해 준다는 믿음을 지지하는 것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