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는 어렵고 복잡한 신학적 주제가 아닙니다. 태초에 에덴에서 아담의 가죽옷(창 3:21)과 아벨의 제사를(창 4:4) 통해 알려졌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전도하셨던 복음이고(갈 3:8), 기독교가 늘상 말해왔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교회라면 지금도 여전히 강단에서 매일 같이 전하고 듣는 기독교의 근본 입니다. 오늘 길거리에서 전도자들이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라고 외치는 내용을 좀 고급지게 표현한 것이 이신칭의입니다.
이신칭의를 공격하는 것은 기독교가 원시적부터 가르쳐오던 기본 진리를 공격하는 것이고, 그것을 변호하는 일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 책무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가 공격받아 온 것은 이신칭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이며, 핍박자들의 면면도 다양합니다.
일제 치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던 순교자 최권능(1869-1944) 목사를 투옥시킨 일본 순사가 그들이고, 종교개혁자들을 핍박한 로마가톨릭이 그들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장자의 기업을 팔아먹은 에서(창 25:34), 이삭을 핍박한 이스마엘(창 4:29), 아벨을 죽인 가인(창 4:8)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외치는 자들을 '싸구려 구원상(easy-salvation salseman)'이라 비난하는 '칭의유보자'들이 그들입니다. 교회사에서 순교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전하고 지키다 당한 희생이었습니다. 화형에 처해진 영국의 휴 라티머(Hugh Latimer, 1485-1555),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 1500-1555)를 비롯해 중세의 많은 순교자들이 이신칭의 때문에 로마가톨릭으로부터 살육을 당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간과한 채, 이신칭의를 고수하려고 애쓰는 이들을 향해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충실하지 왜 쓰잘데기 없는 논쟁에 정력을 소모하는가'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신칭의 복음이 공격을 받을 때 당연히 의분을 느껴야 합니다. 특별히 상대방이 정통주의의 탈을 쓰고 있을 때,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이는 그들이 내는 부정적인 파급효과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개혁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신칭의를 고수하려 피 흘린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 경륜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은 이신칭의를 세우기 위한 도모였습니다. 믿음으로(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도록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롬 3:25-26)."
따라서 만일 이신칭의가 부정된다면 이신칭의를 세우려고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될 뿐더러, 그것을 중심으로 세워진 기독교의 모든 진리들도 다 부정됩니다. 인간 신체로 말하면 이신칭의는 몸 전체를 어거하는 척추와 같아서, 이신칭의가 어그러지면 신앙 전체가 다 무너집니다. '나는 다른 교리는 손대지 않고, 다만 이신칭의만 조금 손댔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 성경 전체를 훼손시키겠다는 의도 없이는 감히 이신칭의를 손대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 칭의유보자들은 참으로 무모한 자들입니다.
이신칭의를 부정할 때 따르는 파괴적인 결과들을 보면, 먼저 이신칭의의 소극적 측면인, '믿음으로 죄 사함' 받는 도리가(눅 5:20) 부정됩니다. 죄 사함에 참회, 고행 같은 보속을 조건으로 제시하는 로마가톨릭 교도들에게 이신칭의가 부정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신칭의가 부정되면 그것에 뿌리박은 하나님의 양자됨도(갈 4:22-31) 부정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율법에서 해방돼야만 아들이 되기 때문입니다(갈 4:4-5).
믿음으로만 부어지는 성령의 부어짐도(갈 3:2, 14) 불가능해집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 믿어 의롭게 된 자들에게만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신칭의가 부정되면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심을 받는 행복(롬 4:6)'을 누렸던 아브라함의 복 같은 것도 꿈꿀 수 없게 됩니다.
이 외에도 이신칭의가 부정되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과 인간의 전적 무능이 부정됩니다. 율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죄로 죽었을 뿐더러, 전적으로 무능해졌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자기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누가 자기 의(義)를 위해 무언가를 도모하려 하는 것은 자신이 율법으로부터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칭의유보자들이 자기 힘으로 의롭게 되려고 힘쓰는 것은 죽은 시체가 자기의 죽음을 자각하고 살아나기 위해 애쓰는 것과 같고,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아기가 생겨나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같으며, 한 번도 눈을 떠본 적이 없는 선천적 소경이 자신의 소경됨을 자각하고 눈 뜨려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이신칭의론자들이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오직 믿음의 의(義)에만 매달리는 이유는 자신의 전적 무능에 대한 자각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값없이 주어지는 이신칭의가 부정되면 하나님의 사랑도 부정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신칭의의 은혜로 우리를 살려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신칭의를 통해 완전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은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하나님 사랑과 칭의를 결부지으며, 칭의가 하나님사랑의 핵심임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의롭다 하심을 받음'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야기되는 견해 차이만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이신칭의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칭의가 분리되지 않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 5:9)까지를 포괄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컨대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 의롭다 함을 받는데까지 나아갑니다.
반면 칭의유보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칭의를 불연속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셨지만, 의롭다 함을 받고 못받고는 우리의 몫, 곧 우리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다만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것에서 그치고 칭의까지 담보해주지 못한다면, 그것을 완전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면서 여전히 그에게 칭의가 유보되어 있거나 미확정인 채로 남아있다면,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모호하거나 비일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표적인 칭의 구절인 로마서 3장 24절을 칭의유보자들의 견해대로 풀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희생시켜, 의롭다 함을 받도록 노력할 터전을 마련해 주었으니, 너희는 그 터전을 바탕으로 피 터지게 노력하여 의롭다함을 받으라."
이처럼-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구원의 터전만을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고, 각자 '율법의 무한도전'을 통해 구원을 쟁취케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잔인하고 가혹한 폭거입니다. 결코 이런 것을 하나님 사랑이라고 할 수 없으며,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님 사랑의 핵심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는 말씀에 한 번 더 천착해 봅시다. 이 하나님 사랑도 '독생자를 내어주심'과 '믿음' 그리고 그 열매인 '영생'까지 포괄합니다. 독생자의 구속이 믿음을 분출시키고, 그 믿음이 영생을 결실하여 완전한 하나님 사랑을 구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믿음의 토양이고, 믿음은 그 토양에 뿌리박은 나무이고, 영생은 믿음의 나무에서 맺혀진 열매로서, 셋이 어우러져 완전체인 하나님 사랑을 이룹니다.
반면 칭의유보자들은 독생자의 구속을 입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믿음과 그 믿음에서 영생의 실과를 맺는 것은 사람의 일로 구분지어, 신인협력주의(synergism)를 구축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유입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속성상 어떤 협력도 거부하고 오롯이 홀로 경륜되기 때문입니다. 칭의유보자들의 견해대로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각색한다면 아마 이런 의미가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내어 주었으니, 그 사랑을 바탕으로 열심히 믿어 영생을 쟁취하라."
그러나 독생자의 구속, 믿음, 영생은 각자도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경륜 속에서 단절 없이 하나의 완전한 결속체를 이룹니다. 독생자의 구속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믿음에서 반드시 영생이 결실됩니다.
"내 살을(그리스도의 구속) 먹고 내 피를 마시는(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6:54)"라는 말씀은 그 한 예시로서, 구속과 믿음과 영생이 분리 없이 하나로 결속되어 있음을 확증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한 사랑'이라 노래하는 이유도, 구원의 처음과 끝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계 7:10)'에게 있고, 구원이 결핍과 단절없는 완전체이기 때문입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알기쉬운 이신칭의(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