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의 편'이라면, 1980년 5월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당연히 신군부 세력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런 견해에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1986년 6월 항쟁으로, 그리고 문민정부의 심판으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단락된 사건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현실을 바라보면 실질적 승자는 여전히 살인을 주도 혹은 방치했던 자들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광주의 일을 기점으로 권력을 공고히 한 신군부 세력은 이후 정∙재계 내부에 막강한 인맥을 구축하고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물론 과거와 달리, 역사는 이제 광주민주화운동을 4∙19와 함께 한국 민주주의의 숭고한 업적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렇다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있을까? 참혹하고도 숭고했던 그 날의 일에 대한 기념과 애도가 전혀 의미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단지 역사가 광주의 일을 전달하는 어조가 여전히 권력의 향방에 좌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영화 <택시운전사>도 같은 맥락으로 바라볼 수 있다. 영화는 수구세력의 부패한 본성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진보정권이 극적으로 집권에 성공한 시기를 틈타 개봉되었다. 제작사가 흥행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잡았고, 또 이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야심차게 준비한 대작 <군함도>의 손익분기점 미달을 감수하면서까지 홍보에 열을 올릴 지경이니 그 속내가 뻔한 셈이다.
그러나 <택시운전사>의 서사를 주시해 보면, 이 작품을 단지 승자에게 아부하는 구태의연한 역사 진술로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작품에 관여된 상업적 손익계산과 무관하게, 이 영화는 역사가 전달할 수 없는 증인의 목소리를 들려주려 힘쓰고 있다.
<택시운전사>는 광주의 비극을 배경삼아 이익과 계산을 초월한 의와 불의의 판단 문제, 그리고 목격자와 증인의 간극이 유발하는 고뇌를 진지한 자세로 다루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택시운전사>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읽어낼 가치가 충분한 영화라고 생각된다.
◈사실과 역사: 객관적-거시적 역사와 실존적-미시적 내러티브
한때 역사란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역사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곧 역사 기술이 객관적일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는 멀리 보면 고대적인 역사관이고, 가깝게 보면 근대적(계몽주의적)인 역사관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에는 신적 권위가 역사기술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보장했다. 신화와 역사는 서로 구분되지 않았다. 신화는 신의 영감을 받은 각양각색의 인물들(시인, 제사장, 무희, 예언자 등)이 기록하였다는 이유로 신의 관점을 반영한 역사로 여겨졌다. 신은 사람이 볼 수 없는 사상(事象)의 본질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초월적 존재로 숭배되었다. 그러므로 신의 관점으로 기술된 역사는 곧 사람의 불완전한 인식을 뛰어넘는 완전한 사실 기록으로 인정받았다.
서구에서는 계몽의 시대를 기점으로 역사의 객관성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된다. 기존의 객관성 개념이 신의 관점, 신적 권위에 의해 지지되는 것이었다면, 계몽의 시대에는 이것이 사람의 관점, 사람의 인식능력에 의해 지지되는 것으로 새롭게 해명되었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이 새로운 역사적 객관성 개념에 기본 지침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사람의 인식능력에 초월 불가능한 한계를 부여하는 대신, 그 보상으로 인식의 객관성과 윤리적 완성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쉽게 말해, 칸트는 사람의 인식이 감각적으로 확증되지 않는 한 결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처럼 사람의 인식 능력을 감각의 한계 안으로 가둬놓는 대신, 사람마다 감각이 실현되는 형식(시간, 공간)은 근원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칸트는 감각에 의존하는 인식이 객관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의 인식능력의 한계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초월의 영역을 논의한다. 칸트에게 있어 초월이란, 감각으로 성립되는 인식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삶의 경험들, 즉 윤리적 실천을 의미한다. 감각적 인식은 모든 것을 인과적으로 종합한다.
그러나 참된 윤리적 실천은 인과법칙에 지배되지 않는다. 윤리적 실천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갖고 있고, 그래서 당연한 인과율의 하나로 여겨지는 자기보존(conatus essendi) 본능을 극복한다. 사람은 윤리적 실천을 통해 자기의 행복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의 자유와 생명을 보호하려 한다.
칸트에게 있어 역사란 이 윤리적 실천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인류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다. 칸트로부터 영감을 얻은 헤겔(Georg W. F. Hegel, 1770-1831)은 칸트의 역사관을 정신의 고양이라는 변증법적 체계 안에서 재구성했다.
칸트와 헤겔 덕에 역사 기술은 단순히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기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들을 바탕으로 사람의 윤리적 실천(혹은 정신)이 어느 수준까지 고양되었는지를 표시해주는 잣대로 여겨졌다.
이런 역사관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실존철학에 의해, 그리고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비판적으로 해체된다. 인류의 객관성과 윤리적 고양을 향한 칸트와 헤겔의 기대는 사실 사람의 동일화와 초월에 대한 욕구를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임이 드러났고, 이에 역사란 객관적이고 거시적인 인류의 기록보다는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내러티브라는 견해가 지배적인 역사 이해로 등극했다.
이제 역사는 더 이상 공적이고 집단적인 기록이자, 정치적 정당성을 평가하는 사초(史草)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각각 자신이 속한 세분화된 사회집단의 관점으로 진술하는 개인적 내러티브, 이것이 오히려 진정한 역사라는 시각이 점차 더 우세해지고 있다. 과거의 역사가 나라, 왕조, 집권층의 연대기 기술에 주력했다면, 오늘날의 역사는 특정한 직업과 학문 분야, 문화현상 혹은 특정 개인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구술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미술사 한 분야만 보더라도 과거에는 <서양미술사> 같은 거시적 관점의 역사 기술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오늘날에는 <반 고흐 vs 폴 고갱>과 같이 개인사에 초점을 두는 역사 기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영화 <택시운전사> 역시 이런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실상 지금까지 개봉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영화들은 거의 모두 이런 방식으로 1980년의 광주를 조명하고 있다.
단, <택시운전사>가 <꽃잎>(1996), <박하사탕>(1999), <화려한 휴가>(2007) 등 기존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영화들과 다른 점은, 그 날의 사건을 기술하는 주인공이 희생자 본인이 아닌, 말 그대로 지나가던 목격자에 불과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영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 1984). 1976년 발발한 캄보디아 내전과 대학살을 취재한 기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
◈사실과 목격자: 불의의 현장을 바라보는 외지인
<택시운전사>의 서사는 상당히 오래된 작품 두 편을 연상시킨다. 하나는 캄보디아 내전과 크메르 루즈(Khmer Rouge)가 자행한 대학살 사건을 다룬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 1984)이고, 다른 하나는 엘살바도르 내전을 다룬 <살바도르>(Salvador, 1986)다.
두 영화 모두 이념분쟁에 의한 학살과 인권유린 문제를 주제로 삼는다는 점, 종군기자가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실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택시운전사>와 상당히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서 특히 <살바도르>가 묘사하고 있는 엘살바도르 내전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진행되고 있던 1980년, 동일한 시각에 벌어진 비극을 다루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 세 영화에 등장하는 기자나 운전사 모두 서사 초반에는 방관자의 입장이었다가, 비극의 현장에 뛰어든다는 점도 유사하다. <살바도르>의 기자 리차드 보일(Richard Boyle)과 <킬링필드>의 기자 시드니 섄버그(Sydney Schanberg)는 <택시운전사>의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위험지역을 취재하는 기자다.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는 기자로서의 직업의식, 그리고 특종 취재를 욕심내는 공명심으로 압축해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위기에 처한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외지인이자 목격자에 불과하다.
▲영화 <살바도르>(Salvador, 1986). 1980년 발발한 엘살바도르 내전과 민간인 학살을 취재하는 종군기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킬링필드>의 보조기자이자 운전사를 맡은 캄보디아 현지인 디스 프란(Dith Pran)과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김만섭(실존인물 김사복, 송강호 분)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이들은 현지인이라는 이유로 기자들에게 고용되었고, 자기 뜻과 무관하게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비극의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광주 진입 초반까지도 힌츠페터와 김만섭의 미시적 개인사는 독재타도 민주화운동이라는, 비교적 거시적 역사의 소용돌이로부터 소외돼 있다. 힌츠페터나 김만섭 모두 정의감이 결여된 인물은 아니지만, 이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의 본격적인 부분으로 포섭되기에는 아직 계기가 부족하다.
그 계기는 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한 광주 시민들, 특히 자신과 같은 택시기사들의 정감어린 심성을 체험하고서, 그리고 힌츠페터와 김만섭을 돕던 광주의 대학생 재식이 총탄에 목숨을 잃은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서 비로소 마련된다.
무고한 이들의 죽음, 그리고 부당하게 행해지는 가차없는 폭력은 소시민 김만섭으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갈망을 불러 일으킨다.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일부 목격하고 서울로 도망치듯 복귀하던 김만섭이 다시 운전대를 광주로 돌리는 장면은, 한 개인의 미시적 역사가 다수의 정의를 위한 거시적 역사에 합류하는 순간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
의(義)의 속성은, 그것이 기독교적이든 아니든 간에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 죄 없는 이의 이유 없는 고난과 죽음, 이를 목격한 자의 극심한 내적 갈등,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단지 목격자로서만 한정지으려는 데서 오는 죄책감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정의를 방관하던 자가 정의에 동참하게 만드는 필수 조건이다.
결국 김만섭은 광주의 목격자가 되고자 한 힌츠페터를 돌아보기 위해, 그리고 불의 앞에 선 광주 시민들을 돌아보기 위해 총격과 폭력으로 가득 찬 광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극한 불의의 현장 속에서 의로운 이들의 희생을 목격하고, 김만섭은 방관자적 목격자로부터 진정한 증인으로 거듭난다.
◈사실과 증인: 증인의 법적 의미와 성서적 의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법적 용어인 증인(witness)과 성서적 용어인 증인(μάρτυς, martus)은 그 의미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법적인 의미에서 증인은 목격한 바를 위증없이 전달하면 그 의무를 다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의미에서 증인은 자신이 증언한 내용을 목숨을 걸고 보증하는 자다.
물론 성서에서 증인을 뜻하는 용어 'μάρτυς'(martus)가 처음부터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증언에 책임지는 자라는 뜻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 용어가 영어로 순교자를 뜻하는 'martyr'의 어원인 것은 분명하지만,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체로 전파되기 시작하던 주후 1세기 경에는 아직 순교자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용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언에 목숨을 내놓은 수많은 순교자들 때문에 그 의미가 변경되어 전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택시운전사>의 힌츠페터와 김만섭은 원래 법적 의미에서 증인의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직접 경험한 바로는 선량하기 그지없던 시민들을 좌익 폭도로 몰아붙이고 총격으로 학살하는 장면에서 이 둘은, 특히 김만섭은 다른 의미의 증인으로 변신한다.
힌츠페터는 외신기자로서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반면 김만섭은 힌츠페터를 광주로 데려다 주고 택시비 10만원을 받는 것 외에 별 이해관계가 없던 인물이다. 실제 광주에 들어오고 나서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을 안 뒤로, 그는 받기로 했던 택시비조차 다 받지 못한 채 어린 딸 혼자 기다리고 있는 서울로 돌아오려 했다.
▲군인들이 통제하는 광주. 그 위험한 곳으로 돌아가는 김만섭. |
그런 그가 광주로 돌아와 총격이 빗발치는 금남로 한복판까지 달려간 것은, 그도 힌터페츠나 광주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를 판단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역사의 증인이 되기를 선택한 까닭이다.
광주의 일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좌익 폭도들의 내란음모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알려져 왔다. 1986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7년 간의 집권을 마치고 물러난 시점에서야 청문회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실태가 알려졌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이후에 비로소 일반에 실태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실 문민정부 당시에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주도권은 온전히 집권층에 있었다. 민간인 신분으로 당시의 참상에 대한 진상조사 및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거의 불법적인 일 취급을 받았다. 그날의 실상을 개인의 미시적 역사 차원에서, 증인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창구는 거의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단지 매년 5월 18일이 되면 대학가에서, 혹은 재야 인사들이 시내 곳곳에서 희생자들의 사진을 걸어 놓고 그 날을 잊지 말자고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다행히 현재는 대중매체에 의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있다. 거시적 역사 기술의 규모에 짓눌려 있던 미시적 증인들의 목소리가 이제는 더 생동감 있고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인정받는 문화적 여건이 조성되어 있다. 그래서 영화 <택시운전사>가 심각한 역사 날조라고 주장하는 당시 신군부 측 지도자의 언사가 아무런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외신기자 힌츠페터를 비롯한 증인들이 아니었더라면, 광주민주화운동은 역사적 신빙성을 상실한 한맺힌 전설로만 남았을지 모른다. |
상업적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택시운전사>는 한 사람이 목격자에서 증인으로, 법적 개념의 증인에서 성서적 개념의 참된 증인으로 변화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작품이라 평할 수 있다. 이제는 승자의 취향에 맞는 획일적인 역사 기술이 아니라, 당시의 사건에 몸소 뛰어든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생동감 있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대가 왔음을 이 영화는 증명하고 있다.
◈사실과 교회: 한국교회 증인들의 미시적 내러티브를 기대하며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이 든다. 정치적 정의를 둘러싼 한국민의 역사의식은 점차 강화되고 있는데, 왜 유독 한국교회는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시도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왜 한국교회는 아직까지 승자의 역사에 기대어 개개인의 숨은 헌신과 믿음을 도외시하는가?
한국교회의 역사는 신사참배로부터 시작해서 교단 분열과 이전투구, 번영신학과 기복신앙의 문제, 교회 기업화, 내부비리와 무자격자에 대한 세습 등 다채로운 흠결들을 끌어안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른바 거시적 역사에 내재된 문제들이 한국교회사 전체를 압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한국교회가 희망을 둘 만한 곳은 많은 증인들의 숨은 헌신과 믿음의 내러티브다. 여러모로 질타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신앙의 미시적 역사를 부각시키는 일이다.
▲1980년 5월 20일의 광주. 사진은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
<택시운전사>가 그려내고 있는 광주민주화 운동은 말 그대로 한국사의 치부 중 하나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후한 1970-19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독재정권들이 이념을 명분삼아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고 인권을 유린하며 살인을 자행하던 시기였다.
앞서 예를 든 캄보디아 대학살(1976-1979)을 비롯해 엘살바도르 내전(1979-1981),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1976-1983), 칠레 피노체트의 조직적 고문과 살인(1973-1989), 필리핀 마르코스 독재정권의 고문, 암살, 사법살인(1972-1986)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근본 원인은 냉전을 틈타 각 진영 수장인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독재자들의 범죄를 무마해준 데 있었다. 그러다가 1986-1990년 사이 냉전이 종식되면서,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한 민주화 운동 덕으로 각국 독재자들이 권좌에서 물러난다. 이런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1986년 6월 항쟁이 성공하고,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가 거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재자들을 제대로 처벌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1989년 루마니아가 독재자 차우셰스쿠(Nicolae Ceauşescu, 1918-1989)를 공개처형한 것이 거의 유일한 처벌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범죄와 허물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세속의 정치사나 교회사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일까. 개신교 측에 속하지는 않지만, 나름 개혁적 성향을 가졌다 하는 현 가톨릭 교황 프란치스코(Pope Francis)조차 본국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다. 아직도 역사의 승자들이 갖고 있는 힘과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일 것이다.
▲1980년 8월 기독교계 원로들 주관으로 서울 롯데호텔에서 개최된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 사진 중간에 당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보이고, 왼쪽에는 한경직 목사가 보인다. 만일 당시 광주지역 목회자와 기독교인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
그렇지만 거시적 역사가 조명해주지 못한 희생자와 증인들의 사정을, 이제는 동시대를 살았던 개개인들이 목격해 전달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역사의식은 이런 일반적 조류에 한참 뒤떨어진 상태로 보인다. 목회자부터 교인들까지 각각 교회의 문제를 양심적으로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현상유지(status quo)에 급급한 모습이다.
혹 내부적 반성의 목소리를 내는 측을 돌아보면, 거의 대부분 진보성향 신학에 경도된 분들이 보인다.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주장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독 복음주의 계열에서 교회 내 신앙의 자정을 위한 역사의식 고양 요구를 애써 묵살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권력지향 성향이 개개인의 순전한 신앙의 정신을 왜곡된 거시적 교회사 속으로 함몰시키고 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