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나타난 반(反) 동성애 코드는 일종의 페이크(가짜) 뉴스라는 취지의 강연(한백신학교실/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이 기사로 연재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내용 중 그릇된 이해가 여과 없이 기독교인들에게 유포되어 심히 우려스러워 바로잡고자 한다.
그것은 주로 성서를 읽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문제로서, 현재 파악된 것으로는 ["상관하겠다"는 구절은 동성애를 뜻하는가]라는 기사와 ["'남자와 동침하면 죽이라' 구절, '반동성애' 뜻 아냐"]라는 기사에서 각각 발견되었다. 이 두 편의 기사를 예시로, 해당 강연에서 꾀하는 성서해석 접근 방식의 위험성을 정리하겠다.
1. "상관하겠다"는 명백히 동성애를 뜻한다
우선 ["상관하겠다"는 구절은 동성애를 뜻하는가?]라는 기사에는, 창세기 19장에서 한 레위인이 가출한 첩을 친정에서 데려오는 여정 중 기브아 땅 베냐민 지파의 한 노인의 집에 머물 때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베냐민 지파 청년들이 이 노인의 집에 몰려와서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相關)하리라(삿 19:21)"고 말한 것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남성 중심의 요구로 이루어져 있다,
(2) 12지파 동맹 중 수임권을 둘러싼 에브라임 지파와 베냐민 지파간의 분쟁이 큰 틀이다.
(3) 당시 에브라임 지파가 절대 우위였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도전이 있었다.
(4) '동성애 반대' 코드는 에브라임 지파가 베냐민 지파의 도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입힌 정당성에 지나지 않는다.
(5) 이 이야기는 노먼 갓월드(Norman K. Gottwald)의 '사회·정치적 혁명 모델'을 통해 읽어라.
(6) 희생자는 '레위의 첩', 즉 여성이다.
위와 같은 이해의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5)항 노먼 갓월드의 성경읽기 방법이 가장 우월한 방법인 것처럼 소개한 대목일 것이다. 성서는 누구의 눈으로, 어떤 눈으로 읽느냐가 중요하다. 부자의 눈으로 읽으면 부자의 입장에서만 읽히고, 가난한 자의 눈으로 읽으면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만 읽히고, 왕의 입장에서 읽으면 왕의 입장으로만 읽히고, 노예의 입장에서만 읽으면 노예의 입장으로만 읽히기 때문이다.
노먼 갓월드라는 사람은 1980년대 한창 유행하던 인류학, 사회과학 방법 따위로 무장된 신학자다.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당시 구약신학 관점의 주류였던 '가나안 정복 전쟁설'을 비틀어, 이를 가나안 내부에서 발생한 일종의 '농민 혁명'으로 제시한 인물이다. 이른바 왕정/도시국가에서의 노예제도와 착취 등의 문제가 농민들로 하여금 체제 전복을 하게 했으며, 그것이 이스라엘의 기원이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편향된 관점은 당연히 유물론적 사관에 기저한다.
따라서 상기와 같은 이해는 민중 중심의 신학이라는 지극히 제한적 관점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것이지, 동성애에 관한 진정한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영진 교수 제공 |
"상관하겠다"로 번역된 야다(ידע)는 구약성서에서 '알다(know)'라는 표현 645회를 포함, 총 947회나 사용되고 있는 단어다. 947회가 모두 성관계를 은유하지는 않지만, 창세기에서만 무려 120여 회가 사용된 중에서는 거의 성관계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소돔 사람들이 롯에게 찾아온 손님들을 '상관하겠다'고 했을 때, 그리고 롯이 자기 두 딸을 손님 대신 내어주면서 남자를 '안' 적이 없다고 했을 때의 표현들 곧, '상관하겠다', '안 적이 없다'는 의미들은 다 성적 표현이다(창 19:8).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신명기 역사가'라 불리는(모세오경으로부터 사사기, 열왕기서에 이르는 문체가 신명기적 필치라 하여 붙여진 이름) 이 사사기의 저자가 바로 저 창세기 텍스트를 그대로 사사기 19장의 문맥에도 옮겨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약간 다르게 번역했지만,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삿 19:22, 개역개정)"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 개역개정)"
원전에서는 다음과 같다.
הוציאם אלינו ונדעה אתם
(그 남자들을)데려오라... 그 남자들을... 우리가 상관하리라(삿 19:22)
הוצא את־האיש אשר־בא אל־ביתך ונדענו
데려오라... 그 남자를... 우리가 상관하리라(창 19:5)
KJV 참조:
that we may know them. (삿 19:22)
that we may know him. (창 19:5)
즉 사사기의 저자인 신명기 역사가는 사사기 19장을 기술할 때,
목적어인 '그들을(남성천사들)'에서 '그 남자를(레위)'에 맞춰 수/태만 반영했을 뿐,
'데려오라'는 뜻인 야차(יָצָא)와
'알다'라는 뜻인 야다(ידע)를 그대로 복기함으로써
매우 의도적으로 창세기의 동성애 악을 재현해 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앞서 강연자가 갓월드에게 빌려 제시한 '사회·정치적 혁명'으로서의 문맥이 아니라, 레위라는 직제와 더불어 붕괴되어 버리고 만 '단일 성소 예배'에 대한 아쉬움을 개탄하는 신명기 역사가의 입장을 반영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닌, 하나님의 입장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사사기의 주제와 맞물린다. '사사기'라는 문헌이 12사사 중 마지막 사사 삼손의 이야기를 담은 16장에서 사실상 끝을 맺고 있음에도, 17-18장에서 미가 제사장과 단 성소의 타락 이야기를, 그리고 지파 간 살육의 원인이 된 동성애 사건(소돔의 멸망 원인과 같은)을 결론부로 덧붙인 다음 19장으로 늘여 마무리 하고 있는 것은, '설 자리를 잃어버린 레위'의 일탈과 함께 무너진 예배의 고발인 셈이다.
그 '궁극적 악을' 멸절한 도성의 대명사 소돔의 '궁극적 악이었던' 동성애와 일치시켜 놓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이것이 바로 동성애 악의 본질인 것이다. 친 동성애 신학이 창궐하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2. "남자와 동침하면 죽이라"는 구절은 '반동성애' 뜻이 맞다
다음은 ["'남자와 동침하면 죽이라'는 구절, '반동성애' 뜻 아냐"] 라는 기사에 나타난 오해와 오독이다. 이 주제로 된 동성애 옹호 강연회는 동성애를 징계하는 명시적 조문인 레위기 20장 19절(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을 동일한 비평 방법에 입각하여 동성애를 옹호한다.
히에로스 가모스(ἱερὸς γάμος)라는 고대 근동의 종교 의식과 연결지어 성서 텍스트를 읽어 보이는 시도이다. 히에로가미(ἱερογαμία)라고도 불리는 이 의식은 남신과 여신의 성교를 흉내내는 종교 의식을 말한다.
저 레위기 계율은 당시 이교도의 풍요제, 즉 성전 창기들이 성행위를 함으로써 농경에 적합한 계절을 조절하려 했던 풍산신/우상숭배를 축출해 내려는 문화 비판 양식의 일환이었지, 그것은 동성애를 죄로 특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성애 옹호 신학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율법 조문이면 조문, 스토리면 스토리, 그 텍스트가 지닌 본질로의 직결된 명제를 부정하고 다른 읽기의 관점을 제시해 흔들어 놓는 방식.
신앙생활을 그런 식으로 하는가? 성경은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그런 비틀어진 석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해당 강연을 옮긴 기사에 따르면,
[... (1) 히에로스 가모스를 하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남자와 남자가 동침하지 말라'는 식으로 서술했을까? 즉 남색은 금하면서 왜 여자끼리의 관계는 금하지 않았을까? (2) 그것은 '사독 제사장파'로 대변되는 남성 엘리트 사제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여성 역할이 많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 고대 근동에서 동성 간 성관계는 흔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4) 고대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남성들이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동성과 관계를 맺고 정액을 자기 몸에 바르기도 했다는 인류학자들의 분석도 있다. 여성과 관계를 맺으면 아이가 생길 수 있고, 생산력이 취약한 시대에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공동체에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
이것이 과연 레위기 20장 19절,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에 대한 올바른 주석일까?
우리 기독교인은 저런 상상력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레위기의 기본 명제는 '깨끗하라'는 것이다. 이 분명한 사실은 달라지지는 않는다. 과연 "고대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남성들이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동성과의 관계를 맺고 정액을 자기 몸에 바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잘 이해하면 '깨끗하다'는 것이 이 신학 강연의 본령인가?
이 강연과 기사에 따르면 성서가 마치 당대의 배경 역사를 이해하고 들여다보는 관문인 것처럼 소개되지만, 성서라는 텍스트는 당대의 그러한 역사들 가운데서 어떠한 역사들이 제거되고 분쇄되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역사만이 남겨졌는지 그 경계를 직시하게 하는 정선된 눈금자(canon)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 두 강연에 대한 논평은 이 정도로 해두자(*동성애 관련 성서본문 비평을 처음 접하시는 독자께서는 친-반 동성애 신학 간의 논쟁과 개괄을 정리한 다음 글의 일독을 권한다(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0766).
이영진 교수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이다. 그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자본적 교회(대장간)>,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