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열정: 칼 바르트의 신학 해설
에버하르트 부쉬 | 박성규 역 | 새물결플러스| 535쪽
바울과 어거스틴,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와 헤르만 바빙크, 그리고 칼 바르트를 연결할 수 있을까? 칼 바르트는 기독교 역사에서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흐름을 계승할 수 없는 것일까?
'현대신학의 교부'로 칭송받는 자이기에, 주류라 불리는 계보에 포함되는 것은 개혁신학을 벗어나는 것인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에 찬성하는 스승들에게 실망하고 반대하며,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새로운 신학의 길을 걸어간 그에게 우리는 어떤 평가를 해야 하는가?
필자는 말로만 듣던 바르트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그동안 보수 교단에서 자란 내가 풍문으로 들었던 바르트는 우리와 다른 신학을 가진 신학자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훼손하고 말씀의 보편성을 약화시키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늘 나에게 언젠가는 그의 신학을 직접 읽고 평가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때마침 그의 제자 에버하르트 부쉬가 스승의 서거 30주년(1998)을 기념하며 출간한 이 책이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책을 읽으며,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병든 시대와 하나님의 존재가 폐허가 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실존과 역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의 뜨거운 열정이 보였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말씀을 건져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말씀하신다는 진실을 세상에 선포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현실이고 화해이고 회복이고 치유였다. 그는 죽은 하나님을 살려내기 위해 불속에 뛰어든 구원자였다.
또한 그는 대부분의 교회가 국가와 히틀러를 위해 충성할 때, 나치 정권에 반대하며 국가종교와 히틀러를 대항하며 싸우는 외로운 전사였다. 그는 분명히 아군이지만, 적군처럼 버림받으며 홀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간다. 전쟁이라는 유사 진리 때문에 죽어가는 하나님을 살려내기 위해 홀로 몸부림치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권력에 아부하는 교회를 깨우기 위해 홀로 소리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교회는 불편한 외침을 하는 곳이라고 호소한다.
<위대한 열정>은 그의 교회교의학 13권 핵심과 그의 신학을 잘 드러낸 훌륭한 책이다. 칼 바르트는 1934년 바르멘 선언을 작성하여 나치 정권에 반대한다는 죄목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독일에서 추방당하여 스위스로 가 바젤 대학에서 20년간 가르치는데, 그곳에서 교회교의학을 완성한다. 이 책은 그의 신학해설로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의 신학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본 글에서 책을 통해 느낀 그의 신학의 특징을 4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현실성
전쟁과 학살로 피냄새가 진동하던 독일에는 하나님이 없어 보인다.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은 것 같고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은, 구름 속에 계시지 않고 하늘 위에서 팔짱 끼고 가만히 지켜만 보는 분이 아니다. 전쟁의 공포 속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학살의 현장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죄의식 소멸이 하나님의 소멸로 연결돼 모두 신은 없다고 하던 시대에, 그는 하나님은 존재하셔서 죄를 뚫고 들어오시며 그분은 권능이라고 한다.
또 하나님이 영원하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과 관계없는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그분이 지속적으로 현존하실 수 있는 만큼 자유로우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시간이 그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현존하는 분으로 시간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의 주인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앞에 마주 서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현존하시고 현실에 함께하시므로, 그분은 우리의 과거를 치유하시고 현재를 고치시며 미래를 소망하게 하신다. 그분의 현존은 권능이고 회복이다.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죄를 해결하셔서 화해를 이루시고, 막혔던 것을 허무셔서 평화를 이루신다. 하나님은 현실에 오시어 하나님이 없는 시간을 하나님 있는 시간으로 바꾸셔서, 왜곡되고 타락하고 낡은 현실을 정상으로 회복한다.
실제 전쟁과 학살로 모두가 죽어가고 신의 존재 또한 죽어갈 때, 바르트의 선언은 위대한 반전이 되었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살리는 생명의 젖줄기가 되었고,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흑암의 땅에서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죄만 가득한 곳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친히 더러운 것을 묻히며 함께한다는 것은 가장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고, 눈물만 쏟아지는 곳에 눈물이 꽃을 피우기 위한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실로 위대한 구원이고 역사라 아니할 수 없다!
2. 교회의 신학자
이렇듯 바르트는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하는 신학자다. 그리고 바르트는 교회의 신학자라고도 하는데, 그는 말하길 교회는 반드시 교회로서 존재해야 하고 교회로서 머물러야 한다고 한다. 교회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 질서에 의해 참되고 살아있어야 하며, 세상이 인정하고 지정해주는 자리가 아니라 복음이 인정하고 허용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세상에 물들어서도, 세상에서 벗어나도 안 된다.
교회는 자기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용하여 교회의 요구를 내세우고 관철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곳이고, 심리적이고 사회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회복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언제나 국가의 소리와 히틀러와 권력의 음성을 따라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이 들려져야 하는 곳이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권세에 아부해서도 안 되고 허공을 쳐서도 안 되며, 우리의 죄를 제거하며 아파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자유롭게 되기 위해 독립해야 하는데, 자기 유지에 몰두할 때 온전해지는 게 아니라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독립한다. 교회가 그런 분명한 정체성이 있을 때, 세상에 침투하여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곳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시대에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곳이고, 희망 없이 아파하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치료하는 곳이다. 현존하는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고 탁월한 질서를 보여주는 곳이다.
바르트는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증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볼 때 당시의 교회는 전혀 증인이지 못했고, 오히려 교회가 그리스도를 못 박았다. 교회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사유화하여 권력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그분의 몸인 교회는 세상과 담을 쌓고 있고 교회만을 위해 존재하는 곳으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성숙돼야 하고, 화해자요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필자는 바르트가 받는 비판 중 하나인 만인구원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그의 신학을 보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를 수정하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있는 무리를 향해 열려 있는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그것은 만인구원론을 펼친 것이라기보다, 교회의 목적과 역할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세속화되거나 자기과욕이 넘쳐 그리스도를 못 박는 교회가 된 현실에서, 교회가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지 '제3의 길'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만인구원을 제시하지만, 결코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변질시키고 성경의 구원을 왜곡했다기보다, 교회의 지평이 더 넓어져야 하고 교회의 중심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신이 부재하는 듯한 현실에서, 신의 실재를 반영하는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확장된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고 그분의 손길이 누구를 만지고 있는지, 교회는 정확히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이고 말씀이 선포되고 아픔이 치유되는 곳이다.
3. 하나님께 속한 인간
이러한 바르트의 교회에 대한 생각을 좁혀 보면, 그가 생각하는 인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실제 바르트는 신학이라는 용어가 개신교 신학의 과제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여기면서, 신-인간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신학이 누구와 무엇에 관계되는지를 보다 더 잘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신-인간학의 의미는 신학이 인간을 희생시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인간도 즉시 염두에 두게 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 없는 인간은 있을 수 있으나, 인간 없는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없이 홀로 계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 백성의 하나님으로 그 백성의 희망으로 존재하고 활동하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저 높은 곳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인간은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참 인간이 되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경꾼으로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형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성숙한 인간으로 여기시고 대우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자기 소외는 제거된다. 하나님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오신 것처럼 그 또한 이웃에게 들어가려고 한다. 종교는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과 소원을 도와주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주셔서 그러한 오류를 고쳐주시고 인간의 자리를 바르게 해주신다.
친히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되셨는데, 이런 놀라운 사랑 앞에 인간은 자기를 위해 살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원수 같은 마음을 회개한다. 이것은 변개할 수 없는 표지이며, 이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인간이며 그분에게만 속하고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분의 소유이다.
즉 바르트는 '하나님 파트너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과 함께하셨고 인간은 그분에게 소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에 대한 그의 신학은, 인간의 죄성이 극도로 드러나는 시대에 인간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은혜였다.
4. 성령은 하나님의 영
보통 많은 사람들은 바르트의 성령론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물론 바르트가 성령에 관해 충분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성령의 신성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비판하고 회복한다. 슐라이어마허로 대표되는 당시의 성령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영으로서 인간을 위한 영이었고, 생명의 흐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기서 인간의 영은 자기를 신비롭게 여기고 하나님을 향해 열려 직통할 수 있으니 아들의 영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이러한 근대적인 영 이해를 무너뜨린다. 그래서 성령이 아들의 영으로서 계시의 인식을 도와주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삶과 지식을 가르쳐준다. 당시 인간이 하나님보다 높아지고 교회가 사사로운 집단이 되었던 시절, 하나님의 영은 죽은 것처럼 보인다. 거룩한 영은 인간의 넘치는 죄와 가득한 오만으로 질식당한 것 같다.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인간에게 종속되는 종처럼 보였다. 그런 가운데 성령의 신성에 대한 바르트의 성령 인식은 신론을 세우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본서에는 성령에 대해 '승리의 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처음에 이 제목을 보고 무엇으로부터의 승리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챕터를 보며, 아직까지 세속적으로 물들어 있는 승리에 대한 나의 개념을 발견하고 무너졌다. 바르트가 말하는 승리는 말씀에 봉사하고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다. 누군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 공동체와 지체들의 말과 행동에 진리가 담겨지는 것이다.
군사주의와 자본주의와 절대권력 시대에 승리의 영은 성도를 말씀으로 붙잡아주고 공동체를 진리로 충만하게 채워준다. 죽음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께 충성하게 도와준다. 거룩한 영은 성도를 믿음의 삶에서 타협하거나 도망가지 않게 하고 믿음을 더 강화시키며 공동체를 더 새롭게 특성화시키고 고양시켜서 세상에서 온전한 공동체를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성령은 우리가 진리의 인도를 받도록 도와주고 우리의 자리와 위치를 회복시킨다. 우리 마음을 밝혀주고 죄와 더러운 것을 책망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준다. 진리의 영은 늘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예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아들의 영은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흑암 가운데서도 영광의 빛을 보여준다. 그래서 바르트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을 받는 것이라 확언한다.
▲방영민 목사. |
결론
바르트는 목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 말해야만 하기 때문에 목사라고 한다. 이 영적 의무는 그의 생애를 지배하였고 그는 하나님으로 가득했으며,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가슴에 사무치는 진리가 있었다.
책의 제목처럼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열정이 그의 삶을 이끌어왔고, 그것은 그의 내면에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 같았다. 그랬기에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부재하고 공허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바르트는 자기 시대에 하나님이 무능해지는 것을 괴로워했고, 교회와 신학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분노하고 슬퍼했다. 그의 신학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화해인데, 교회와 신학이 세상에서 아무런 화해와 평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성을 취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와 인간이 되어 모든 죄를 제거하심으로 참 평화를 이루셨는데, 예수의 삶을 아무도 뒤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옛 계약이 아니라 그 계약의 성취이고 모든 죄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의 행동인데, 그 예수의 모습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바르트는 그런 시대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 말씀은 우리에게 육체가 되어 나타났다고 한다. 그의 신학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짓밟히다 못해 사라지는 시대에서 시작한다.
즉 바르트는 과거의 신학을 반복하고 익혀서 말하는 앵무새가 아니다. 지금 여기서, 우상과 자본과 절대권력으로 하나님의 존재가 폐허가 되고 교회가 무력해진 곳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초로 다시 시작한다. 그의 신학은 바람부는 대로 움직이는 풍향계가 아니라, 정확한 목표를 향해 걸을 수 있는 나침반이다. 그는 안락한 의자에 앉아 담배를 무는 노인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총과 깃발을 들고 달리는 군인이다.
칼 바르트는 교회와 신학이 하나님 앞에 현실적으로 서지 않고 그 앞에 머무르려고도 하지 않으며 단지 하나님을 다루려고만 한다고 비판하는데, 우리 시대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말이다. 칼 바르트, 화려한 옛 시대를 고수하고 그때를 재현하려는 보수주의자들에게 그는 역사적 개혁주의와 거리가 멀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그의 신학은 행동하는 신학이고, 어쩌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원리에 더 충실한 신학이 아닐까.
그의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열정'으로 독자들을 초청해 본다!
방영민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열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