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에 있었던 아시안 컵 축구에서 한국팀이 3위를 하였습니다. 베어벡 감독 체제로 대표팀이 구성된 후에 있었던 처음 평가전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경기였고, 아시아 축구의 종주국 자리를 놓고 벌인 경합이었기에 모든 아시아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바 있습니다.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한국이 패했을 대, 한국의 인터넷은 베어벡 감독을 사퇴시켜야 한다는 리플로 도배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어벡이 이끄는 한국팀이 일본을 이기고 3위를 차지한 후, 베어벡감독이 사퇴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나눌 때, 언제 그의 사퇴를 주장했었냐는 듯이 인터넷은 베어벡이 사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리플로 다시 한번 도배되었습니다. "냄비근성"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우리는 일어난 일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말합니다. 세상은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할 때, 늘 그 당시의 느낌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일어난 일, 즉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기록할 때는 전혀 그 느낌을 담지않고 사건 기록으로 처리합니다. 성경이 그 느낌과 감동을 더하는 곳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묘사하고 전달할 때입니다.
한 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더위와 함께 해결되지 않은 아프카니스탄 사태가 우리의 가슴을 답답하고 무겁게하고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일어난 일을 바라보며 아직도 인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리플이 한국의 인터넷을 뒤덮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에 열심인 한국의 교회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세상소리가 넘쳐났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일어난 일에 대해서 쉽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어난 일들은 그 누구도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미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왜 교통사고가 날 것을 알면서 차를 끌고 나니느냐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 위험한 그 아프카니스탄에 갔느냐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다 위험한 곳 아닙니까?
미네소타의 다리가 붕궤되는 것, 맨하탄 한 복판에서 가스폭파가 일어나는 것, 브룩크린의 시내 길가에 세워둔 차가 토네이도로 뽑힌 나무에 의해 파괴되는 것,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고, 누구도 그런 장소들을 위험한 곳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곳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할 때는 감싸고 포용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주님 앞에 나왔을 때, 그들은 일어난 일에 대해서 주님께 말하고 그녀를 고소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고소는 계산된 행동이었고 주님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시고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치라"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에 대한 주님의 자세는 관용입니다. 그분의 관심은 일어난 일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인에게 선언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일어난 일을 덮으시면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어난 일을 관용으로 감싸야합니다. 더 이상 돌을 던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느낌을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이 품어야 할 자세입니다.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
당신은 지금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까?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한국이 패했을 대, 한국의 인터넷은 베어벡 감독을 사퇴시켜야 한다는 리플로 도배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어벡이 이끄는 한국팀이 일본을 이기고 3위를 차지한 후, 베어벡감독이 사퇴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나눌 때, 언제 그의 사퇴를 주장했었냐는 듯이 인터넷은 베어벡이 사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리플로 다시 한번 도배되었습니다. "냄비근성"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우리는 일어난 일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말합니다. 세상은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할 때, 늘 그 당시의 느낌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일어난 일, 즉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기록할 때는 전혀 그 느낌을 담지않고 사건 기록으로 처리합니다. 성경이 그 느낌과 감동을 더하는 곳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묘사하고 전달할 때입니다.
한 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더위와 함께 해결되지 않은 아프카니스탄 사태가 우리의 가슴을 답답하고 무겁게하고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일어난 일을 바라보며 아직도 인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리플이 한국의 인터넷을 뒤덮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에 열심인 한국의 교회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세상소리가 넘쳐났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일어난 일에 대해서 쉽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어난 일들은 그 누구도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미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왜 교통사고가 날 것을 알면서 차를 끌고 나니느냐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 위험한 그 아프카니스탄에 갔느냐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다 위험한 곳 아닙니까?
미네소타의 다리가 붕궤되는 것, 맨하탄 한 복판에서 가스폭파가 일어나는 것, 브룩크린의 시내 길가에 세워둔 차가 토네이도로 뽑힌 나무에 의해 파괴되는 것,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고, 누구도 그런 장소들을 위험한 곳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곳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할 때는 감싸고 포용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주님 앞에 나왔을 때, 그들은 일어난 일에 대해서 주님께 말하고 그녀를 고소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고소는 계산된 행동이었고 주님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시고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치라"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에 대한 주님의 자세는 관용입니다. 그분의 관심은 일어난 일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인에게 선언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일어난 일을 덮으시면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어난 일을 관용으로 감싸야합니다. 더 이상 돌을 던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느낌을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이 품어야 할 자세입니다.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
당신은 지금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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