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흑인차별폐지운동을 이끌었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목사에게 어느 미국 백인여자가 찾아와 “나는 나의 노예들을 사랑하고 우리의 관계는 평화로운데, 왜 당신은 잠잠하던 미국에 불화를 일으키냐”라고 비난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흑인들이 현재 처한 자신들의 위치에 머무르고 인종차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 위기와 불화같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흑인들의 존엄성의 새로운 인식을 위해 소극적 평화를 포기합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변화가 요구 되어질 때, 새로운 갈등과 위기가 요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백인 여자 분은 진정한 평화와 억눌림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어떤 면에서, 미국에 문제와 갈등을 일으킴으로 오히려 더 큰 문제 속에서 미국을 건져냈습니다.
장애인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를 입은 분들의 삶이 큰 어려움과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처해 있는데, 그들이 마치 강도당한 사람처럼 죽어 길거리에 쓰러져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담담하며 아무런 갈등과 어떤 마음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오히려 평안한 마음으로 지켜본다면, 그것은 마음에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가요?
장애인이 사회적인 제약과 낙후된 복지(특히 한인사회)와 편견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그들에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거절과 외면에서 온 것인가요? 이 은혜는 소외된 이들을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나의 강팍한 모습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인가요? 진정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자에게 직접 허락하시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침해하며 우리가 함부로 남용할 수 있는 권한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이웃이 죽어가며 고통스러워하는데, ‘그 고통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다’라며 돕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장애인 선교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안타까운 것은, 은혜라는 미명하에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가 너무도 외면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은혜가 넘치면 오히려 소외된 자들이 더욱 살기 좋아지고 편안한 생활을 해야 되는데, 사실 장애인 시설이 가장 낙후되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은혜라는 미명하에서 왜곡되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은혜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뜻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죄를 짓는데 이용하는 큰 죄악된 행위인 것입니다.
사회에는 장애인에 대한 고용기준이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내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고 서로를 위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런 기준이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월등히 사회보다 더 소외자들을 배려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은혜가 넘쳐야 할 교회는 오히려 기준이 없기 때문에 아예 대책없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있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비즈니스적인 생존경쟁이 더 심하기에 장애인들이 경쟁력을 갖춘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변화시켜야 될 세상보다도 더 편협하며 악화된 상황입니다.
편견도 마찬가지인데, 아직도 병신, 절뚝발이, 앉은뱅이 등 사회에서는 결코 공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의 인격에 치명적 손상을 주는 용어들이 은혜가운데(?) 대중 설교중에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사실 현재 사용되는 성경마저 장애인을 놀리고 욕하는데 사용했던 과격한 용어들을 은혜(?)가운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에서는 더욱 자연스럽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결코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억누르는 표현을 막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의 값진 은혜를 우리의 이익을 위해 잘못 이용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구해봐야 할 것입니다.
시설은 어떻습니까? 사실 미국에는 비즈니스나 공공건물에 관해서 너무도 엄격할 정도로 장애인의 권리를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미달 될 경우에는 그 피해에 대한 책임과 배상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앙단체이기에 당연히 사랑으로 대해 주길 원하기에 미국정부의 규제와 규정이 조금 완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더 사랑을 베풀라는 의미지 안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명목 하에 ‘미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은 더 역사하신다’는 이상한 태도로 장애인과 소외계층에 대한 규정이 아주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엄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장애인 단체에 얼마를 기부하면서 ‘우리가 계속 기부금을 보낼 테니, 우리 마을에서 함께 살 수는 없다’는 값싼 동정식의 은혜는 결코 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나누어야 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더 큰 고통을 안겨 줄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해서도 역사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권한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귀한 존재는 그 최대한의 가치가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인정되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인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 말씀처럼, 우리는‘하지 말아야 할 것'을 범할 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로서 ‘해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큰 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그 크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바로 그 크신 은혜가 고통 속에 있는 장애인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나누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변화가 요구 되어질 때, 새로운 갈등과 위기가 요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백인 여자 분은 진정한 평화와 억눌림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어떤 면에서, 미국에 문제와 갈등을 일으킴으로 오히려 더 큰 문제 속에서 미국을 건져냈습니다.
장애인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를 입은 분들의 삶이 큰 어려움과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처해 있는데, 그들이 마치 강도당한 사람처럼 죽어 길거리에 쓰러져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담담하며 아무런 갈등과 어떤 마음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오히려 평안한 마음으로 지켜본다면, 그것은 마음에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가요?
장애인이 사회적인 제약과 낙후된 복지(특히 한인사회)와 편견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그들에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거절과 외면에서 온 것인가요? 이 은혜는 소외된 이들을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나의 강팍한 모습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인가요? 진정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자에게 직접 허락하시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침해하며 우리가 함부로 남용할 수 있는 권한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이웃이 죽어가며 고통스러워하는데, ‘그 고통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다’라며 돕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장애인 선교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안타까운 것은, 은혜라는 미명하에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가 너무도 외면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은혜가 넘치면 오히려 소외된 자들이 더욱 살기 좋아지고 편안한 생활을 해야 되는데, 사실 장애인 시설이 가장 낙후되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은혜라는 미명하에서 왜곡되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은혜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뜻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죄를 짓는데 이용하는 큰 죄악된 행위인 것입니다.
사회에는 장애인에 대한 고용기준이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내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고 서로를 위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런 기준이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월등히 사회보다 더 소외자들을 배려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은혜가 넘쳐야 할 교회는 오히려 기준이 없기 때문에 아예 대책없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있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비즈니스적인 생존경쟁이 더 심하기에 장애인들이 경쟁력을 갖춘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변화시켜야 될 세상보다도 더 편협하며 악화된 상황입니다.
편견도 마찬가지인데, 아직도 병신, 절뚝발이, 앉은뱅이 등 사회에서는 결코 공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의 인격에 치명적 손상을 주는 용어들이 은혜가운데(?) 대중 설교중에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사실 현재 사용되는 성경마저 장애인을 놀리고 욕하는데 사용했던 과격한 용어들을 은혜(?)가운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에서는 더욱 자연스럽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결코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억누르는 표현을 막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의 값진 은혜를 우리의 이익을 위해 잘못 이용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구해봐야 할 것입니다.
시설은 어떻습니까? 사실 미국에는 비즈니스나 공공건물에 관해서 너무도 엄격할 정도로 장애인의 권리를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미달 될 경우에는 그 피해에 대한 책임과 배상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앙단체이기에 당연히 사랑으로 대해 주길 원하기에 미국정부의 규제와 규정이 조금 완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더 사랑을 베풀라는 의미지 안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명목 하에 ‘미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은 더 역사하신다’는 이상한 태도로 장애인과 소외계층에 대한 규정이 아주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엄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장애인 단체에 얼마를 기부하면서 ‘우리가 계속 기부금을 보낼 테니, 우리 마을에서 함께 살 수는 없다’는 값싼 동정식의 은혜는 결코 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나누어야 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더 큰 고통을 안겨 줄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해서도 역사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권한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귀한 존재는 그 최대한의 가치가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인정되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인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 말씀처럼, 우리는‘하지 말아야 할 것'을 범할 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로서 ‘해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큰 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그 크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바로 그 크신 은혜가 고통 속에 있는 장애인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나누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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