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제자훈련 미래 전망 보고서
송인규 外 | IVP | 300쪽
기다렸지만 무언가 충족감은 덜할 것 같았다. 이 책이 그랬다. 말하자면 주제는 좋지만, 솔직히 그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일부 저자들이나 토론자들이 제자훈련에 적합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들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제자훈련 전체를 조망하거나 그것을 보는 시각에 있어 조금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서평을 쓰는 필자의 교만이나 또 다른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우려와 불안은 적잖이 가셨다. 모든 저자나 토론자에게 만족할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은 제자훈련의 위기론을 이야기하거나 제자훈련의 존재 의미에 대해 의구심이 대두되는 현실 속에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을 내놓았다. 사실 어떤 측면에서 '지금 제자훈련을 왜?'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제자훈련보다 셀 교회가 강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포럼은 '죽은 사람 살리기' 같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까지 있었던 제자훈련의 역사와 명암, 그리고 현재 상황을 돌아봄으로써 지금도 제자훈련이 용이함을 보여준다. 정재영의 설문조사인 '제자훈련에 대한 경험과 의식'은, 한계는 있지만 우리가 추상적으로 갖고 있는 제자훈련에 대한 실패와 함께 여러 제자훈련 방법이 한국교회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다.
정재영의 다른 글인 '한국교회의 제자훈련에 대한 사회학적 검토'는 전체적 그림과 흐름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는 도움을 주지만, 제자훈련에 대한 전형적인 시각과 관점 속에서 이루어진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분량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송인규의 '하나님나라의 제자도-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나'이다. 제목처럼 무엇을 잃어버렸나에 대한 답을 달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저자는 그의 모든 저서에서 나타나는 집중성과 치밀성처럼, 이번 그의 글을 통해서도 깊은 만족감을 준다.
저자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정의와 그 정의에서 바라본 제자훈련, 제자에 대한 정의를 성경을 통해 세밀하고 체계적으로 잘 다룬다. 또한 여러 제자훈련 중심 저자들의 주장과 글을 통해 제자훈련에 대해 정리해 주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있어 제자훈련에 대한 역사와 문제, 해결 방안들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커리큘럼에 대한 개요까지 우리에게 보여주기까지 한다-커리큘럼의 내용은 상당히 인상적이고 구체적이다.
하지만 그런 커리큘럼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그 다양한 주제를 한두 주 동안 소화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의문이다. 저자가 지적하듯 단순한 프로그램으로만 풀어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함에도, 오히려 너무 많은 주제들은 제자훈련을 프로그램으로 전락시키거나 겉핥기식으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아마 제자훈련을 시행하는 교회들에서 제자훈련이 어떤 것인지를 교육하는 데 있어, 이 내용을 읽도록 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정리됐다.
이 외에 노종문의 '거인들에게 배우는 제자훈련'은 도슨 트로트맨, 옥한흠, 달라스 윌라드의 제자훈련에 대한 철학을 잘 정리하여 그들의 장점과 한계를 보여준다. 다른 필자들의 글도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역사와 명암, 한계 등을 나름 잘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한국교회의 제자훈련의 현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보기 드문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몇 가지 한계성과 편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먼저 거의 모든 저자가 동일하게 언급하는, '한국교회에 끼친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에 대한 영향'이다. 그것을 중심으로 한 장·단점과 옥 목사 사후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
필자도 옥한흠 목사가 한국교회의 제자훈련에 끼친 커다란 영향에 동의하면서도, 정재영의 설문조사에서 나타나듯 한국교회의 제자훈련은 옥한흠 목사 외에도 다른 흐름이 있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필자들이 한국교회가 제자훈련을 교회의 양적 성장과 대교회에 대한 선망의 한 방편으로 사용한 경향들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도, 저자들은 대교회인 사랑의교회(담임 오정현 목사)에서 있었던 제자훈련에만 집중할 뿐, 또 다른 큰 축을 이루었던 제자훈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거나 별로 비중을 두지 않는 이중적 잣대를 은연중에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은 분명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각 캠퍼스 선교단체에서 제자훈련을 받았던 이들을 통해 교회에서 일어난 제자훈련이 한국교회에서 커다란 축을 이루었다.
CCC나 네비게이토 등에서 철저하게 훈련받았던 이들이-이들이 선교단체에서 신학교로 이동하게 된 과정과 그 절차는 주목할 만하다. CCC나 네비게이토 출신은 대체로 서로 다른 과정을 통해 목회의 길을 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논하는 것은 여기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각 부교역자나 교회개척 또는 담임하면서, 그들이 예전에 받았던 제자훈련을 교회에 들여와 정착시키고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 점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사항이라는 것이다.
또 선교단체 출신이나 그들의 자료들이 당시 젊은 목회자들을 통해 교회 내로 스며들었고, 이는 실제로 1980-90년대 많은 제자훈련 교재와 지침서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히려 사랑의교회 제자훈련만큼 커다란 비중이, 이 이름 없는 목회자들을 통해 형성됐다는 점을 제자훈련 역사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국제제자훈련원 교재가 초·중반까지 세미나를 거치지 않거나 사랑의교회 서점에 가서 직접 구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두란노의 일대일 제자훈련 교재가 많은 교회들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일대일 제자훈련 교재는 초창기 EBS 교재(복음전도용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교재 둘로 나누어졌다가 합쳐져 정착하게 되는데, 이 책 또한 CCC와 네비게이토의 성경공부 교재에서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거기서 드는 적지 않은 부분들과 주요 부분을 두 선교단체의 교재에서 인용하고 있거나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고, 두 선교단체에서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맨투맨 교육에서 사용하는 미출간 예화나 내용들도 일부 포함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저작권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당시부터 개인적으로 관심 대상이긴 했다. 사실 당시 제자훈련 교재들 중 일부는 이 두 단체의 교재와 제자훈련 내용에 빚을 지고 있다. 필자 또한 평신도 때 후배들을 개인적으로 제자훈련시킬 때, 이 두 단체의 이런 자료들을 참고했던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두 단체를 통한 제자훈련에 대한 영향과 결과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두란노의 교재는 이 두 단체 교재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약간 산만한 모습은 있었지만, 캠퍼스 선교단체들의 교재가 교회로 흡수되기 어려웠던 약점을 보완한다.
예컨대 교회와 예배에 대한 내용을 따로 한 장에 할애하고,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포함하면서 미약하지만 선교단체가 당시 사회와 유리됐던 교회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이 교재는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를 보여줌에도 주목할 만 하고 평가받을 만 하다.
이 외에 설문조사에서도 나타났듯 각 교회에서 제작된 여러 교재들도 이런 범주에 폭넓게 포함시킬 수 있다. 포럼의 시간과 여건의 한계상 이것을 다 다룰 수는 없었겠지만,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만 다룬 것 자체가 이미 고정된 시각에 갇힌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저자들이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던 대교회 중심적 분석을 스스로 행하고 있는 이중적 사고를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이러한 이중성은 물론 필자를 포함해 대다수 목회자와 성도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또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실패나 침체는 예견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실패를 교회성장의 한 방편으로 사용하거나 개교회 중심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상당수 분석이 있다. 그 점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다른 요인으로 제자훈련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조직화하거나 프로그램화시켰음을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제자훈련은 기간에 묶일 수 없다. 연간 두 학기씩 시행하고 신청을 받아 제자훈련을 행할 때, 아직 제자훈련을 받을 준비도 안 된 이들이 신청함으로써 단지 제자라는 이름표를 붙여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제자는 비록 그 과정을 거쳤어도 힘을 발휘할 수 없고, 그들을 통해 재생산된 제자들-엄밀하게 말해 이들을 통해 탄생된 제자는 재생산이 아니라 입양이다. 물론 어떤 때는 그렇게 수평이동한 이들을 맡아야 할 책임도 필요하다-역시 한계성을 가진 미숙한 제자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 제자훈련의 역동성은 옥한흠 목사 등 모든 제자훈련이 평신도를 강조하고 그들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주도권은 목회자의 통제 하에 두었다는 문제가 있다. 제자훈련의 역동성은 진정 제자의 자격을 누가 갖추었느냐에 달린 것이지, 직분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목회자가 제자훈련의 지도자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이 제자훈련을 감당할 수준과 결단이 먼저 되어 있지 않으면 지도자로서 그들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의교회 제자훈련 시스템의 문제에 있어선 옥한흠 목사와 오정현 목사를 구분해서 분석해야 한다. 이것은 또 다른 방대한 주제가 될 수 있기에, 이 서평에서 다루기에는 지면이 너무 적다. 오히려 평신도가 진정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 제자를 키워내고 돌볼 때, 제자훈련은 생명력과 역동성을 가진다. 그러나 제자로서의 자질과 훈련이 덜된 목회자의 리더 됨은 제자훈련의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치명적 위험성을 가질 수 있다.
목회자라는 이름으로 신대원이나 세미나에서 훈련받고 제자훈련의 리더가 되었을 때, 그 제자훈련은 기본적으로 체력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제자훈련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그것을 감당할 기본적 훈련과 체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때, 오히려 제자훈련은 교회에서 또 다른 짐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가 제자훈련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 교회의 제자훈련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제자훈련을 기본 토대로 교회 내 교육 체계와 양육 시스템을 재구성하고, 교회 내 조직 등이 그것을 뒷받침하도록 재조직되고 운영될 때, 교회는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것이다.
특히 이 책에 거론되진 않았지만, 셀 교회의 등장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일으킴과 동시에 커다란 문제를 가져다 준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은 서평이기에 그 부분을 다 다룰 수는 없지만, 폴 스티븐스이나 로버트 뱅크스가 주장한 평신도 신학이나 가정교회와 달리 셀 교회는 철저하게 배가적 성격을 지녔다.
게다가 셀 교회는 모임 특성상 교회를 집중시키고 슬림화하기는 했지만, 교리나 교파의 강조점 약화로 영적 체력을 약화시키는 실수를 범한다. 제자훈련을 교회의 양적 성장의 원동력으로 보았던 목회자들의 판단은 셀 교회로 변화돼, 그저 제자훈련 자리에 셀 교회를 앉히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셀 교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부 족은 셀 교회를 도입한 모 단체로부터이다. 셀 교회와 근본적으로 취지가 전혀 다른 크리스티안 슈바르츠의 '자연적 교회성장'을 혼합하는 치명적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 악영향의 폐해는 한국교회에서 상당했다.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침체는, 방법론보다 그 목적을 제대로 행하지 못한 것이 더 크다고 본다.
그리고 제자훈련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커리큘럼을 통해 제자로서 혼자 설 수 있는 기본체력을 만들도록 도와준 다음, 더욱 그 이상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특히 기도와 말씀훈련은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지금 한국 교계는 말씀공부에 대한 중요성이 상당히 약해져있는 위기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 제자훈련들에서 단계는 만들지만, 정작 지식 전달로만 그치면서 위험성을 낳고 있다. 송인규의 커리큘럼은-저자의 의도와 달리-탁월하면서도 필요하지만, 너무 많은 주제로 인해 오히려 지식전달과 습득의 제자훈련으로 오용될 위험성이 있다.
특히 제자훈련은 기본적으로 재생산이 이뤄질 때 의미가 있다. 지금 대형교회를 포함해 상당수 교회들이 수평 이동한 신자나 교회 내 기존 신자들을 대상으로 단계를 설정해 제자훈련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자체 내에서 탄생한 제자가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 이동한 이들을 재훈련하거나 여러 제자훈련을 반복해 받는 이들을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진정한 제자훈련은 초신자나 교회 내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영접 및 기초를 다지고 훈련해 성장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리더로 자라나 또 다른 이들을 도와줄 때 진정한 힘이 있을 수 있다.
필자가 이 책에 대해 꽤 부정적으로 지적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제자훈련을 고민하는 목회자나 교회의 영적 리더들이 필히 읽어볼 만한 책임은 분명하다. 이 책은 '미래전망 보고서'라고 말하기에 많이 미흡한 듯싶지만-최근 동향들을 담아내지 못한 점은 많이 아쉽다-그럼에도 지금 우리를 돌아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자신의 현재 모습, 특히 점차 몰락해 가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문양호 목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