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 “저도요.” “물어본 겁니다.” “저도 사랑해요.” 군인인 남자는 조국과 여자를 위해 목숨 건 사랑을 했다. 둘은 위기의 순간들을 함께 극복했고결국 여자는 남자를 마음 깊은 곳으로 받아들였다. 남녀 주인공은 가벼운 키스 후 아름다운 대화로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달콤한 대화만으로 이들이 서로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짐작이 된다. 시청자들은 이들의 순수한 애정을 사랑했다. 키스는 이들 사랑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서로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관심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일류였다.
우리가 바라는 남녀 사랑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적 쾌락도 아니고 돈으로 마음을 사는 삼류도 아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좋고 작은 기쁨을 나누며 함께 즐거워하는 예쁜 사랑을 원한다. 그런데 남녀의 순수한 사랑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다름 아닌 잘못된 성(性) 관념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C.S. 루이스는 사람의 성이 대단히 위대한 것도 아니고 대단히 유치한 것도 아니라 말한다. 성을 높은 자리에 추대하면 파괴적 괴물이 되어 삶을 망가뜨린다. 포르노그래피가 그렇다.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에는 관심 없다. 대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동물적 쾌감만 있을 뿐이다. 한편, 성을 더러운 괴물 정도로 치부하는 것도 문제다. 사람의 성욕을 무시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오만이다.
성(性)은 성기(性器)와 다르다. 성에 해당하는 한자는 마음(心)과 몸(生)의 합성어다. 성은 성적인 쾌락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몸의 한 부분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남녀가서로 인격과 이성(異性)으로서 다름을 이해하고 좋아해 주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성이다. 한 마음이 되는 것을 100% 완성하기는 어렵지만, 남녀가 마음으로 가까워지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이다. 이 과정에 육체적 결합이 포함될 뿐이다.
육체적 결합이 곧 성이라는 등식은 오류다. 인간의 존엄성(dignity)을 평가절하하는 심각한 오산이다. 생리적 욕구 해소를 위한 성관계는 말그대로 성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짐승도 한다. 사람이 아니어도 생식기를 가진 동물이면 할 수 있다. 건전한 성관념을 배우지 못한 성인 아이가 청소년기에 머무는 이유가 성과 성관계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허한 마음을 채우는 적절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성관계라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성기는 없어도 사랑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 없는 성관계는 공허와 좌절을 부를 뿐이다. 어둠의 늪으로 가는 비극의 통로이며 관계 파괴적이다. 사람들을 속여야 하는 지옥이라 괴롭지만, 미끄럼틀처럼 멈추기 어렵다. 쾌락에 소유를 바치고 배우자와 자녀들과 자기 자신까지 제물로 내어주는 순서다. 이게 간음이다. 성관계를 사랑이라 믿으려는 가증스러운 속임수다.
뇌는 사랑과 중독을 구별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부심을 헤아리기에 뇌는 너무 단순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뇌와 중독자의 뇌가 유사하다는 것을 아는가? 사랑과 중독의 경우 모두 도파민과 엔도르핀 계열의 호르몬을 분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래서 뇌는 육체적 쾌감이 곧 자부심인 것처럼 착각한다. 성적 쾌락이 행복한 사랑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뇌는 속일 수 있어도 양심은 속일 수 없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황홀한 기분, 그 중독성은 강렬하다. 다행히 이러한 유사 행복감의 트랩 앞에서 양심이 알람을 울려준다. 양심의 적색 신호등을 무시하고 질주한다면 결국 배우자와 자녀의 마음이 무너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이 위험한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는 최고의 방법은 배우자 사랑하기다.
우리는 인류에게 부여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혼인 서약이라는 제도를 사용해 왔다. 신과 사람들 앞에서 맺는 부부 언약은 ‘성’이 ‘성관계’짜리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장치다. 혼인 서약은 마치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굳건한 성벽과 같다. 칼을 막아주는 강철 방패이며 폭풍우를 막아주는 집이다.
성 문제 전문 상담가 패너 부부는 결혼을 자동차로 비유했다. 성은 윤활유로써 필요하지만, 친밀감은 부부의 평생 헌신이라는 엔진의 연료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제가 없을 수 없는 결혼이 끝까지 잘 굴러가기 위해 서로의 마음이 가까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 마음으로 사는 부부는 서로의 역할을 존중한다. 남편은 신이 인간을 사랑한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인간이 신을 섬기는 것처럼 남편을 사랑한다. 물론 쉽지 않다. 노력이 필요하며 그럴 가치가 있다. 자녀들은 최선을 다해 사랑한 부모를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비참한 저주의 그늘 밖에서 영광스럽게 자신의 존엄성을 누리며 사는 빛의 후예들을 보는 것이 자녀 양육을 하는 부모의 꿈이 되어야 한다.
간음은 천만금과 바꿀 수 없는 사랑을 일순간 파괴하는 살상무기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가?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가? 늦지 않았다. 회복할 수 있다. 회복해야 한다. 지금이다. 망가진 관계들을 고치는 작업을 시작할 순간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 여정의 방향을 수치에서 영광으로 방향 재설정해야 한다. 이 작업은 평생 해야할 위대한 자기 싸움이다. 신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한 그 완전한 사랑이 나를 위한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이 선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