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출산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이야기를 돌려 다시 하위렴과 에드먼즈의 결혼 당시로 돌아가 보자. 캐나다에서 결혼식을 치른 두 사람은 그 이듬해 하위렴의 고향 켄터키로 내려왔다. 그들은 해외 선교부와 노회에서 교섭해둔 교회들을 순회하며 조선 선교 현황을 보고하는 일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신혼여행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어느덧 안식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선으로 돌아가야 할 채비를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신혼여행은 조선으로 향하는 귀임歸任 여행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한 증기선이 긴 항해 끝에 태평양을 건너 요코하마에 닻을 내렸다. 두 사람이 다시 고베에서 조선으로 가는 배를 바꿔 타고 제물포에 당도할 즈음 이미 에드먼즈는 만삭의 몸이었다.

항해 내내 뱃멀미와 구토로 시달렸던 탓에 제물포에서 다시 목포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거의 탈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목포에 지부支部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스테이션이라 해봐야 아직 선교사 숙소조차 변변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비록 에드먼즈가 내한 선교사로 6년을 사역했다 해도 처음 보는 목포의 풍광은 눈에 익었던 서울의 그것과도 사뭇 판이했다.

스테이션에 짐을 풀자마자 두 사람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주변의 모든 상황에 하루속히 적응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하위렴 선교사는 에드먼즈의 출산일이 임박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산모와 아기를 위한 준비가 시급했으나 스테이션을 총괄해야 했던 그는 전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이때의 난감했던 상황을 하위렴은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이삿짐이 옮겨지고 부분적으로 정리가 된 후에 교회와 남학교와 여학교는 물론 지역교회를 돌아보아야 하는 순회 일정과 선교사 숙소와 진료소를 짓는 일로 정신을 못 차릴 정도여서 나는 어느 쪽으로 몸을 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목포에 부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에드먼즈는 1909년 10월 31일 딸 셀리나Margaret Selina Harrison를 출산했다. 셀리나가 태어나던 그해 봄에 오웬 박사가 과로로 순직하는 바람에 진료소에는 의사가 없었으나 다행히도 간호선교사로 사역하던 에밀리 Emily C. Mccallie가 출산을 도울 수가 있었다. 그녀는 2년 전 내한해 전주에서 사역하다가 맥컬리 선교사와 결혼하면서 목포 진료소에 내려와 있었다.

U.S., Consular Registration Certificates, 1907-1918 Volumes 134, 65645 주한미국영사관에 신고한 두 자녀의 출생신고서
(Photo : ) U.S., Consular Registration Certificates, 1907-1918 Volumes 134, 65645 주한미국영사관에 신고한 두 자녀의 출생신고서

혼신을 다한 목포에서의 사역(1911)

하위렴 선교사가 목포에 부임하면서 양동교회 재건축 공사는 물론 선교사 숙소와 진료소를 포함한 스테이션 조성공사를 전체적으로 떠맡았다. 공사의 크고 작은 인허가 사항은 물론 자재구매와 재정관리, 인부고용 그리고 안전사고 예방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교인들과 인부들을 데리고 불철주야 공사 현장에 매달려야만 했다.

에드먼즈는 그녀대로 아기를 양육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그녀는 여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여교사들을 따로 모아 주중에 성경공부를 지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간호선교사였기 때문에 목포 진료소의 간호사들을 관리하며 간호 인력을 양성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1911년 7월 27일에 아들 찰스Charles William Harrison까지 태어났다. 셀리나와는 두 살 터울이었다. 그때까지도 목포 진료소에는 아직 의사가 부임하지 않은 상태여서 이번에도 에밀리가 출산을 도왔다. 첫 딸을 낳았을 때도 겨를이 없어 적절한 산후조리를 하지 못했던 에드먼즈는 둘째를 출산하고 나서도 쉴 틈이 없이 사역에 매달려 무리하다 얻은 산후 후유증으로 그 후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위렴 역시 양동교회 재건축과 스테이션 조성공사를 마무리하는 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를 하는 바람에 그 후로 거의 일 년을 병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과로로 건강에 이상이 오고 있었지만, 하위렴은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불모지와 같은 이 지역에다 선교 인프라를 마무리했다는 점에 스스로 긍지를 느꼈다.

"거의 일 년을 앓고 지내다가 다시 건강을 되찾아 지난 한 해 동안은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며 기쁨 중에 지냈다. 순회 사역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선교부 건축공사와 일반 행정 등에서 활동적인 봉사의 기쁨을 누렸으며 일들이 마무리되어가는 것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본령本領이 복음 전도에 있음을 되새기고,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순회지역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윤식명에게 맡겼던 순회지역을 다시 넘겨받았다.

"한편 노회와 선교사 공의회 그리고 총회 후에 열리는 연례모임 등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일들이었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랫동안 돌보지 못했던 지역을 순회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시찰 구역인 영암, 해남, 강진, 장흥에 이르는 서남해안의 지리적 상황은 군산의 그것과도 크게 달랐다. 왜냐하면, 굴곡진 만과 크고 작은 반도의 긴 해안선을 따라 발달한 촌락들을 순회하기 위해서는, 육로와 수로를 수시로 바꿔가며 여행해야 할 때가 많아 번거롭고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맡은 순회 구역은 2개의 군을 포함해 또 다른 2개의 군의 일부 지역으로 면적이 40x65 평방마일이나 되는 반도의 서남해안 지역이었다. 이곳은 각각 14x25 평방마일 정도가 되는 두 개의 만이 서북 방향으로 뻗어 세 개의 긴 반도를 서로 갈라놓고 있었다. 다른 하나의 만은 남쪽으로 향한 입구로부터 굴곡진 해안선을 따라 육지로 깊이 들어와 있었다. 이 지역을 순회하려면 목포로부터 만을 가로질러야 했기 때문에 모든 순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로 이용이 필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곳도 다시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가 없었다. 역풍이 불고, 썰물일 때를 만난다거나 혹은 배에다 말을 태울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복음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마을을 만난다든지 게다가 자전거로 접근할 수 없는 도로 사정이나 변화가 잦은 날씨를 만나면 순회가 더욱 어려워지기도 했다."

열악한 지리적 여건에도 하위렴은 1911년 한 해 동안 봄과 가을 두 차례로 나누어 순회 구역의 모든 교회를 2회 이상 방문했다. 춘계순회는 자전거와 말을 타고, 추계순회는 걸어서 했는데 총 93일이 소요되었다. 20여 개의 교회를 방문해 문답과 성례 그리고 회계감사는 물론 치리까지 했으며, 때로는 임시 제직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교회가 있으면 선출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놀랍게도 순회 구역의 교회 가운데 15개 교회가 이미 주일학교를 개설하고 있었다.

조사들과 함께 순회 일정을 진행하면서 대략 15~20일 정도를 문답에 소요했다. 순회지역의 총 953명의 문답 지원자 중 아예 261명은 보류시켰고, 그중에서 392명만 학습 교인으로 허락했으며 115명은 학습 교인 대기자 명단에 두었고, 나머지 185명만 세례를 베풀었다.

문답에 참여한 교인들 대다수가 이구동성으로 문답이 너무 까다롭다고 불평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엄격한 문답 절차가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게 하고 나아가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교회 생활에 더욱 애착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한편 그는 강진읍에서 멀지 않은 병영교회 를 순회하는 중에 들었던 한 과부의 간증을 전하면서 그녀가 예수를 영접하고 어떻게 그녀의 삶이 변화되었는지를 소개하기도 했다.

"교인 가운데 김 씨로 불리는 한 젊은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가 20살 되던 해에 하나밖에 없던 어린 아들마저 잃고 말았다. 그녀는 비탄에 잠겨 어떤 위로도 마다하고 미칠 듯이 슬퍼했다. 딱한 상황으로 그렇게 오륙 년을 지내다 우연히 그녀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했는데 교회에 출석하면서 크게 위로받고 심령에 평안을 되찾았다.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은 외로운 과부가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이 굶어 죽지 않는 한, 믿지 않는 이웃을 위해 전도하는 삶을 살 것이라 다짐하기도 했다. 그녀는 어렵게 살면서도 교인들을 위한 헌신에 앞장서고 있다."

이외에도 믿음을 지키려다 가정에서 모진 핍박을 당했다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아픔처럼 안타까워하면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는 말씀으로 그녀를 위로하고, 오갈 데가 없이 버려진 그녀를 윤식명 목사에게 보내기도 했다.

"아내의 신앙생활을 극심하게 반대하는 남편으로부터 거의 매일같이 매질을 당하고 사는 젊은 여자 하나가 있었는데 한번은 그녀가 너무 많이 맞아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가 되기도 했다. 그 후 그녀가 집에 혼자 있을 때 3대에 걸친 집안의 족보를 가져다가 아궁이에 던져 넣고 아예 집에서 도망쳐 나와 버렸다. 지금 그녀는 윤 목사의 집에 머물며 간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하위렴이 자신의 시찰을 순회하던 당시만 해도 여전히 '백만인구령운동'의 여파가 식지 않아 교회마다 특별 전도 집회가 줄지어 열리고 있었는데 9개 교회가 각각 5일간씩 집회를 연달아 개최하기도 했다. 집회에 참석하는 인원은 교회마다 어림잡아 100여 명 정도쯤 되었다.

하위렴은 1911년 한 해 동안 커다란 진전을 보인 순회 사역의 성과를 스스로 평가하면서 그는 먼저 자급自給/Self-support 의 실현을 꼽았다. 하위렴은 순회 지도를 할 때마다 교회가 목회자들은 물론 조사들에게도 마땅한 사례를 지급하도록 강조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교회의 재정을 고려해 볼 때 조사에게 사례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한 제안이라고 반대했다. 그러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6개 교회에서는 하위렴의 권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6개월 전부터 전도부인을 돕는 헌금을 시작하는 등 조사들의 사례를 위해 발을 벗고 나서기도 했다.

하위렴은 시찰 구역내 장로 하계모임에서 자급(自給:Self-support)의 취지를 다시 한번 설명하면서 다음에 동계 모임으로 모일 때는 교회별로 사례할 수 있는 확실한 금액을 약속하자고 제안해, 참석자 전원 일치의 동의를 받아내기도 했다.

또 하나는 주일학교가 크게 부흥한 일인데 1911년 연초에만 해도 조직된 주일학교가 하나도 없었으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연말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자그마치 15개 교회에 주일학교가 생겨나면서 시찰 구역 전체에 775명의 어린이가 참석하는 주일학교로 성장을 하고 있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교사와 교인들의 뜨거운 헌신에 힘입어, 주일학교에 더 큰 부흥이 기대되고 있는 점이었다.

하위렴은 지금까지 성공적인 순회 사역이 가능했던 이유로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묵묵히 맡은 바 책임을 다해온 조사와 권서인 그리고 전도부인의 수고와 헌신의 덕분이었다고 회고하며 그들은 추위나 더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일정에 밀려 끼니를 거르면서도 기쁨으로 복음을 전했었다고 그들에게 공을 돌렸다.

하위렴은 이미 동사목사였던 윤식명에게 리더십을 이양했지만, 목회적 돌봄이라는 차원에서 개선점이 보이면 지적하기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당회원들과 교인들은 그의 의도와 노력을 이해해 주었다. 하위렴의 제안에 따라 어떤 것들은 은혜롭게 개선이 되기도 했으나 어떤 때는 그러한 제안이 오히려 문제를 더 크게 만들어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그런 일을 만날 때면 그는 어김없이 엎드려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기도 했다.

하위렴은 그해(1911) 목포지부의 선교통계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 교회 수 : 22개 처소 • 주일학교 수 : 15개
• 세례교인 수 : 512명 • 주일학교 학생 수 : 793명
• 한해 세례자 수 : 185명 • 주중학교 학생 수 : 173명
• 학습교인 수 : 473명 • 유아세례자 수 : 35명
• 총 교인 수 : 2000명 • 헌금액수 : 1101.25엔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