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현재 스페셜 미니스트리에서 장애인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저희 선교회 장애회원이 저를 식당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주문하면서 ‘이것도 드시고, 저것도 드세요’ 하면서 제게 선심을 썼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형제님이 요새 철이 들고 정신적인 장애가 많이 나아졌구나’하고 감사해 했습니다. 그런데, 계산서가 나오자 ‘ 그럼, 제가 먼저 차에 가서 있을께요, 천천히 나오세요.’하면서 나갔습니다. 선심은 그 형제가 쓰고 돈은 제가 냈습니다.
이 사역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하나님께서는 가장 재정이 많이 필요한 사역을 가장 재정적으로 미약한 저 같은 사람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물질이 궁하고, 그 분들을 인도해야 하는 저도 생활비조차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저는 제가 가진 것을 콩이라도 반을 쪼개서 그 분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사역 한다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돈 많은 그 누구보다도 저에게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그 분들에게는 결과적으로 제가 가장 큰 부자인 것입니다. 가장 많이 필요한 것을 나누어 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 쓰여지지 않은 물질은 하나님 나라 은행 어카운트에서는 계산되지 않는 밸런스인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불평하기를 “하나님, 벼룩의 간을 빼서 드시지요, 저는 재정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도, 심지어는 다른 장애인분들 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이 사역을 제가 감당해야 하나요? 돈 많은 분들은 다 어디갔습니까?”하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은, 하나님은 가장 큰 부자에게만 이 사역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사역에 돈이 필요할 때, 가장 많이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하나님 은행어카운트에는 그래도 제가 가장 많이 디파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 사용 할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나라에서는 가장 큰 부자인 것입니다. 비록 저는 장애인분들에게 단지 몇 불짜리 밥을 사드리고 나눌 수 밖에 없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급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Available한 Current Balance는 바로 그 단돈 몇 불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아무 쓸모도 없으며, 하나님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급한 일에, 그래도 제가 가장 돈을 많이 쓰는 통이 큰 부자이기에 이 사역에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나(하나님)를 저버렸는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아와 과부와 어려운자를 돌보고 있는가’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교회인가'가 아니고, ‘얼마나 열정적으로 기도하는가’가 아니고 ‘지금,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고 있는가?’가 ‘이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가’의 판단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 14:31)’고 말하십니다. 또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고 하시며 가난한자를 돕는 일을 하나님과 직접 거래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단 몇 불을 소외되고 외면당한 장애인에게 주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직접 돈을 꾸어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으면 돌려받기가 어려운 장애인분들에게 도움을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빚을 갚으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남의 돈을 떼어 먹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갚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꾼 것을 직접 갚으실 때는, 그 보상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풀고 돌려받을 가능성이 더욱 적을 때, 하나님의 부담감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장애란 무엇입니까? 장애란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할 때,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야 하는데, 눈이 안보이니까 책을 못 읽고, 책을 못 읽으니까 입학시험에 불리하고 떨어집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지 못하니까 사회적으로 뒤쳐집니다. 그래서 성공하는데 장애를 주는 것, 그것이 장애입니다. 그런데 강영우박사 같은 분은 장애가 있지만, 어떻게 눈으로 보는 사람보다 더 책을 많이 읽고, 시험도 더 잘보고 더 우수한 학교를 나오고 사회적으로 더 성공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장애는 장애입니까? 장애는 그것을 더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애로 더 많은 일을 성취한다면 누가 장애인입니까?
만일, 장애인이 많은 죽어가는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며, 누구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산다면, 더 중요한 일을 감당한다면 그는 장애인입니까? 우리의 삶의 목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더욱 잘 감당한다면, 도대체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장애인입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막 2:17)”고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이 건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은 자신이 병든 것조차 모르는 더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병은 예수님의 도움마저 거부하는 매우 심각한 상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는 병든 자인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고치시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지극히 작은자입니다. 한 순간도 혼자 살 수 없는, 죄와 사망의 심각한 영적 장애를 가진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작은 우리가 조금 더 지극히 작은 자인 장애인을 외면하고, 그들이 목마르고 병들었을 때 돕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눈에는 앞뒤 상황 판단을 전혀 못하는, ‘영적인 정신장애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것은, 이 세상의 마지막 계산 때에 하나님이 직접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풀지 않은 것도 하나님이 직접 갚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우리 삶에 더 중요한 것을 정확히 바라보는 온전한 시력을 갖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사역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하나님께서는 가장 재정이 많이 필요한 사역을 가장 재정적으로 미약한 저 같은 사람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물질이 궁하고, 그 분들을 인도해야 하는 저도 생활비조차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저는 제가 가진 것을 콩이라도 반을 쪼개서 그 분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사역 한다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돈 많은 그 누구보다도 저에게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그 분들에게는 결과적으로 제가 가장 큰 부자인 것입니다. 가장 많이 필요한 것을 나누어 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 쓰여지지 않은 물질은 하나님 나라 은행 어카운트에서는 계산되지 않는 밸런스인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불평하기를 “하나님, 벼룩의 간을 빼서 드시지요, 저는 재정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도, 심지어는 다른 장애인분들 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이 사역을 제가 감당해야 하나요? 돈 많은 분들은 다 어디갔습니까?”하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은, 하나님은 가장 큰 부자에게만 이 사역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사역에 돈이 필요할 때, 가장 많이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하나님 은행어카운트에는 그래도 제가 가장 많이 디파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 사용 할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나라에서는 가장 큰 부자인 것입니다. 비록 저는 장애인분들에게 단지 몇 불짜리 밥을 사드리고 나눌 수 밖에 없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급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Available한 Current Balance는 바로 그 단돈 몇 불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아무 쓸모도 없으며, 하나님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급한 일에, 그래도 제가 가장 돈을 많이 쓰는 통이 큰 부자이기에 이 사역에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나(하나님)를 저버렸는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아와 과부와 어려운자를 돌보고 있는가’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교회인가'가 아니고, ‘얼마나 열정적으로 기도하는가’가 아니고 ‘지금,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고 있는가?’가 ‘이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가’의 판단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 14:31)’고 말하십니다. 또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고 하시며 가난한자를 돕는 일을 하나님과 직접 거래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단 몇 불을 소외되고 외면당한 장애인에게 주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직접 돈을 꾸어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으면 돌려받기가 어려운 장애인분들에게 도움을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빚을 갚으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남의 돈을 떼어 먹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갚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꾼 것을 직접 갚으실 때는, 그 보상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풀고 돌려받을 가능성이 더욱 적을 때, 하나님의 부담감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장애란 무엇입니까? 장애란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할 때,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야 하는데, 눈이 안보이니까 책을 못 읽고, 책을 못 읽으니까 입학시험에 불리하고 떨어집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지 못하니까 사회적으로 뒤쳐집니다. 그래서 성공하는데 장애를 주는 것, 그것이 장애입니다. 그런데 강영우박사 같은 분은 장애가 있지만, 어떻게 눈으로 보는 사람보다 더 책을 많이 읽고, 시험도 더 잘보고 더 우수한 학교를 나오고 사회적으로 더 성공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장애는 장애입니까? 장애는 그것을 더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애로 더 많은 일을 성취한다면 누가 장애인입니까?
만일, 장애인이 많은 죽어가는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며, 누구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산다면, 더 중요한 일을 감당한다면 그는 장애인입니까? 우리의 삶의 목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더욱 잘 감당한다면, 도대체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장애인입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막 2:17)”고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이 건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은 자신이 병든 것조차 모르는 더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병은 예수님의 도움마저 거부하는 매우 심각한 상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는 병든 자인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고치시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지극히 작은자입니다. 한 순간도 혼자 살 수 없는, 죄와 사망의 심각한 영적 장애를 가진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작은 우리가 조금 더 지극히 작은 자인 장애인을 외면하고, 그들이 목마르고 병들었을 때 돕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눈에는 앞뒤 상황 판단을 전혀 못하는, ‘영적인 정신장애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것은, 이 세상의 마지막 계산 때에 하나님이 직접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풀지 않은 것도 하나님이 직접 갚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우리 삶에 더 중요한 것을 정확히 바라보는 온전한 시력을 갖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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