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전체를 통해 본 결혼은사와 독신은사의 원리
오늘날 결혼문화는 점점 오염되고 병들어 결혼 자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편에선 결혼이 선망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편에선 결혼을 기피한 채 비혼 상태의 동거로 머물거나, 특별한 이유 없이 결혼을 미루고 거부하거나, 사회경제적 환경을 이유로 결혼을 포기한 채 독신으로 머물거나, 결혼 후에도 외도와 불륜을 정당화시켜 부부 정조의무를 훼손하거나, 남녀 간 결혼이 아닌 동성 간 '비정상적 결합'을 이성 간 '결혼제도권' 속으로 편입시켜 '정상결혼'이라며 강변하기까지 한다. 날로 말세지말(末世之末)의 현상이 증가하는 와중에 결혼제도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있고, 많은 이들이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목도한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크리스천들마저 확고한 성경적 결혼관을 정립하거나 결혼철학을 구비치 못한 채 도리어 이 세상풍속을 좇는 모습, 쾌락적이고 음란하며 물욕적인 탁류(濁流)를 거스르지 못하고 휩쓸려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이로 인해 점점 말씀과 은혜의 간증이 넘치는 결혼이 사라지고,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하는 자녀들이 늘고, 그 자녀들이 결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경계감·두려움을 극복 못해 비혼(非婚)상태에 머물고, 심리적치유와 회복 없이 결혼해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어 우려를 자아낸다.
창세기 2장을 통해 본 10가지 성경적 결혼원리에 이어 살펴볼 내용은 우리가 잘 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현실에서 제대로 적용치 못하고 있는 결혼과 독신의 성경적 원리이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독처하는 게 좋지 않기에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세우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러한 기본원리를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실천하기보다 예외로 인정받길 바라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자신만이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픈 욕구일 수도 있고, 자신은 그러한 자격이 없다고 비하하는 생각일 수도, 자신은 매우 특별한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무관하다고 속단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음의 네 가지 원리를 성경적으로 비추어본 후 스스로 고칠 건 고쳐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첫째, 독신은사와 결혼은사의 원리이다. 지금껏 많은 미혼자들을 교육하고 상담해본 결과 독신은 은사(恩賜)라고 생각하는 반면, 결혼은 은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그래서 지금껏 교회 내에선 독신은사가 과대평가돼온 경향이 있었다. 그로 인해 마치 결혼하는 걸 믿음이 부족한 행위인 양 판단·정죄하고, 결혼의 때가 돼 결혼을 생각하고 소망하는 걸 마치 헌신된 믿음의 결여처럼 매도하는 분위기마저 은연중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독신은사자처럼 불철주야 물불 안 가리고 교회 일에 헌신, 진력하는 걸 아주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칭찬까지 해버린다. 그런 헌신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결혼은사자를 독신은사자처럼 오인시키고, 결혼준비를 전혀 안 시켜 훗날 결혼 못해 큰 낭패를 겪고 하나님을 원망까지 하도록 만드는 불상사가 빚어지기에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7장을 보면 결혼과 독신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며 심오하게 얽혀있는 걸 본다. 그래서 많은 미혼자들이 고린도전서 7장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혼란을 느끼거나 오판(誤判)하곤 했던 것이다. 필자가 지금껏 수많은 미혼자들을 상담해본 결과, 스스로 독신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결혼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함부로 독신은사를 칭송하는 영적 지도자들은 대부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훗날 슬프고 애통스런 눈물을 흘리게 만든 잘못은 반드시 회개해야 할 것이다.
이는 무지의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인이 독신으로 지냈기에 독신을 권유했지만, 결혼에 대해 절대 터부시한 한 적이 없다. 본인과 같은 영적 수준에 다다랐고,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강하게 느끼고 있을 경우엔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명령이 아니요 권도(勸導, 허락, 6절)라고 했던 것이다. 7절 말씀,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를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아울러, 육체의 정욕이 불타 절제할 수 없어 죄 지을 가능성이 큰 것보다 결혼하는 게 훨씬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다고 분명하게 정리했다(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혼(旣婚) 목회자와 영적 리더들이 미혼자들을 향하여 함부로 결혼하지 말고 주님의 일에 헌신하라고 부추긴다면 이는 자칫 잘못된 길로 이끄는 '소경인도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둘째, 싱글사역과 커플사역의 원리이다. 독신은사와 결혼은사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께서는 홀로 주님의 일을 잘 감당토록 이끄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부부를 함께 불러 사용하시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고전 9:5에 보면 사도 바울 일행은 독신으로 다녔지만, 주의 형제들과 베드로 등은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녔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도 이렇게 갈라지기에 우리는 신중하게 자신의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 진정 바울 사도와 같은 길이 가능하다면 자원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바울 사도처럼 겸손한 자세를 갖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교·비판·강권해선 안 될 것이다. 만일 독신이 그토록 좋고 누구에게나 권장할만한 사항이라면 바울은 다른 사례를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약함과 정욕의 유혹·시험을 잘 아는 바울 본인은 그렇게 살았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강권하지 않았다. 하물며 독신으로 살지 않으면서 너무나 쉽게 독신은사 운운한다면 이는 매우 교만한 태도이며, 하나님의 뜻을 곡해할 위험성이 큰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독신으로 산 사람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음에도, 결혼해 자식까지 낳고 잘 살면서 미혼청년들에게 혼자 주님을 위해 살라고 권면하거나 강요한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행여나 내 교회 유익을 위해 미혼청년들을 교회에 묶어둘 요량으로 그렇게 말했다면 훗날 하나님께 책망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셋째, 결혼과 고자(鼓子, eunuch)의 원리이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몸이 된 부부는 하나님께서 짝지어줬기에 절대 갈라설 수 없다고 하셨다(6절). 그러자 시험하던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이혼증서를 예시하며 반론하자(7절), 이는 인간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며(8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9절)이라고 재차 못을 박으셨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남성(男性)제자들이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10절)고 하자,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11절)고 하셨다. 그리곤 덧붙여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12절)고 명확하게 선을 그으셨다.
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독신은 결혼하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을 가리키나 교회에선 한 번도 결혼한 일이 없는 사람을 독신자라 하며, 가톨릭교회법은 사제와 부제는 서품되기 전에는 아내를 가질 수 있지만, 서품된 후에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철칙으로 하였다고 설명한다. 주교는 독신이 아니면 절대로 될 수 없고, 이것은 306년 엘르빌라 교회회의 때부터 로마교회 불변의 원칙이고, 386년 성 시리치오 교황은 '사제와 레위인'에게 독신제를 지시하였는데, 이 법규가 성 인노첸시오 1세 교황(제위 : 402~417)에 의하여 인정되었음에도 이 법규가 엄밀히는 지켜지지 않았고, 어떤 곳에서는 반대의 소리도 높았으나 가톨릭교회는 사제의 독신제에 대하여 변함없는 입장을 취하였고, 1918년의 교회법전에 규정된 성직자의 독신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변경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가톨릭에서는 성직자의 독신을 많은 반대와 부작용이 있었음에도 가톨릭교회의 교리라는 이유로 전통적으로 지켜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제1·2차 라테란공의회(Lateran Council/ 1123, 1139)를 통해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명문화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음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독신은사자가 아님에도 스스로 또는 강제적으로 독신은사자로 구별 짓거나, 타고난 고자나 사람이 만든 고자가 아닌 스스로 된 고자라 생각해 결혼하지 않고 독신상태로 머물도록 하는 게 과연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질서의 원리에 부합하는가가 관건이다. 종교개혁이후의 기독교에선 목회자의 결혼을 당연시하고 있기에, 그 뜻을 잘 새기고 지혜롭게 적용해야 하리라 본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고자일 경우엔 결혼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반면 억지로 그렇게 됐거나, 잘못 서원했을 경우엔 문제가 발생한다. 끓어오르는 정욕을 지혜롭게 절제하며 금욕생활을 유지하며 주님의 일에 헌신한다면 아주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치거나 아무리 정욕을 절제하려 해도 절제가 쉽지 않고 오히려 곧잘 시험에 빠지는 경우엔 근본적으로 독신생활을 되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는 분인데, 굳이 안 맞는 옷처럼 불편하고 괴롭게 만들 의도로 억지로 강요하여 혼자 살라거나 강제적으로 아무하고나 결혼하라고 명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 점을 간과하고 너무나 쉽게,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판단에만 의지해 결정짓고 타인에게도 강요한다면, 이는 월권(越權)이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적지도자는 신중해야 하며, 각별히 언행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넷째, 나실인의 원리를 통한 교훈이다. 라이프성경사전에 따르면, 나실인(Nazirite)은 '구분(구별)된 자'란 뜻으로 일평생 혹은 특별한 헌신을 위해 한시적으로 세상과 단절하고 스스로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한 자'를 말한다. 그리고 평생 나실인으로는 사사 삼손(삿 13:5), 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삼상 1:28), 레갑 자손(렘 35:6), 세례 요한(눅 1:15) 등을 예시하고 있으며, 한시적 나실인의 경우는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에게 적용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민수기 6장을 통해서 살펴본 나실인의 특별 금기사항 세 가지(독주 및 포도나무 소산물 식용, 시체 접촉, 두발 삭도)에 결혼은 포함돼 있지 않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구별하여 '헌신·봉헌'하고 '스스로 자원하여 금욕(禁慾)'하는 사람에게 결혼이 쉽게 결행할 사항은 아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 서원(서약)한 기간 동안 결혼을 포기했다가 훗날 서원 기간이 끝나면 결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도 주님을 위해 평생 헌신하겠노라 작정한 탓에 결혼을 포기했다는 사람들을 곧잘 만난다. 그런데 이는 그들의 말을 무조건 믿어주기 전에 먼저 성경적으로 옳은지 틀리는지를 점검해보아야 한다. 만일 미혼자매나 유부녀가 서원했다 할지라도, 어린여자의 서원(민 30:5)은 아버지의 허락, 결혼한 여자의 서원(민 30:8, 12)은 남편의 허락이 없으면 서원의 효력이 상실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꾸중도 듣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어릴 적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았을 때 결혼하지 않고 일평생 주님을 위해 헌신 충성하겠노라고 순간적으로 서원했을 경우 다시금 서원을 점검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대로 해석하면, 만일 아버지의 허락이 없이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독신선언'을 했다면 이는 잘못이고,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평생 독신서원이 전혀 무가치하고 무효하다는 결론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하늘아버지의 뜻일 경우가 분명 있다. 그러나 '일시적 독신은사자'나 결혼은사자임에도 본인이 어릴 적 순간적 감정에 이끌려 평생 독신선언을 했을 경우엔 분명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껏 결혼사역을 해오면서 그런 문제로 결혼에 심각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경우를 여러 번 봐왔다. 그럴 경우 결혼소망이 있으면서도 선뜻 결행하지 못하거나, 결혼하고 싶어 이성과 교제하면서도 행여나 잘못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감을 느끼거나, 죄책감을 갖거나, 선택딜레마로 혼란을 겪는 경우를 봐왔다. 이성교제 기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갈등상황을 엉뚱하게도 독신서원을 지키지 않은 탓으로 돌리며 일방적으로 결별선언을 반복하는 어이없는 경우까지 있었다.
더 나아가 결혼해 잘 살다가 부부갈등이 심해질 경우나 사별 또는 이혼했을 경우, 본인이 과거 독신서원을 지키지 못하고 결혼한 잘못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거라고 비성경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럴 경우엔 심적 압박감이 크고, 스스로 겪는 죄책감도 크기에 마음이 무겁고 얼굴표정이 어둡고 굳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확대해석이며 지나친 기우일 뿐이다. 만일 독신서원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다면 애초에 결혼 안 하도록 인도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또 다른 피해자인 배우자를 발생시키지도 않았을 게 분명하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이미 결혼까지 했음에도 그러한 심적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얼른 주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으면 한다. 어리석게 생각한 잘못을 회개하며 믿음 부족함을 고백하니 용서해주시고, 지금 함께 사는 배우자를 주님께 하듯 잘 섬기게 해달라고 말이다. 이럴 경우엔 마귀가 배우자의 불만스런 모습과 계속 부딪치는 힘겨루기상황을 핑계로 부부갈등을 부추기는 것이기에 단호히 '대적기도'로 물리쳐야 한다(벧전 5:8-9). 이미 결혼한 사람은 과거 독신서원이 무효해졌다 생각하고, 독신은사자가 아님이 입증 되었다 생각하고, 결혼은사자이기에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고 편안히 해석하는 게 보다 성경적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겐 결혼은사 또 어떤 사람에겐 독신은사를 주셨는데, 결혼은사자가 압도적으로 많음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 속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 인물들 중 독신은사자가 많아 보이지만, 이는 착시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독신은사자는 매우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억지로 독신을 강요하거나 독신은사자라고 부추기거나, 일시적 독신은사자를 평생 독신은사자로 잘못 진단할 경우, 그 후유증은 상상 이상으로 크기에 각별히 조심하고 신중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게 달란트를 주셨기에 본인의 달란트 아닌 걸 굳이 욕심 부릴 필요가 없다. 하물며 그보다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분별이 필요한 독신과 결혼의 문제를 부화뇌동하듯 결행하거나, 제삼자로서 경솔히 조언해선 안 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