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4:16절 초반부는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증거한다. "의인"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신약의 용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일 것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달한다.
1. 의인도 넘어질 수 있다: "넘어진다"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죄로 인해 넘어지는 모습을 말한다. 의인도 죄로 인해 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럴 수가! 이게 진정 사실이란 말인가? 그렇다. 당대에 완전했던 의인 노아도 넘어졌다. 모세도 넘어졌다. 다윗도 넘어졌다. 베드로도 넘어졌다. 바울도 넘어졌다. 그 밖의 많은 의인들도 넘어졌다. 의인도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의인의 넘어짐을 장려하거나 정당화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의인도 넘어짐을 면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이 뭔 줄 아나? 그것은...
2. 한 두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이나 넘어질 수 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일곱"이라는 숫자를 '자주'와 '많이'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수로 사용했다. 오늘 본문 속의 일곱도 이런 의미이다. 의인은 그냥 넘어지기만 하는 게 아니다. 자주 넘어질 수 있고, 많이 넘어질 수도 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씩이나 넘어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의인이 이처럼 자주 넘어진다면 도대체 죄인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한 가지가 있다. 의인은 죄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데, 그것은...
3. 다시 일어난다: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칭의(稱義)의 개념을 접할 수 있게 된다. 칭의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의인으로 불릴 수 없는 죄인이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께서 이러실 수 있나? 그 이유는 하나다. 일곱 번 넘어질 때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다. 그렇다. 의인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그대신 넘어질 때 마다 피 묻은 예수님의 손을 부여잡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다.
일곱 번 넘어질 때 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시는 예수님...
일곱 번 자빠질 때 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
일곱 번 쓰러질 때 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
타락한 육신을 벗어 의인이 되는 그 날 까지 넘어지고 또 넘어지겠지만 예수님의 손 붙잡고 끝까지 일어나는 자들이 칭의에 빚진 자들이라는 말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다. 굳게 먹은 마음이 사흘을 못 간다는 뜻이다. 다시는 죄를 짖지 아니하리라' 작심하지만 삼 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넘어지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삼 일이 뭔가? 작심삼시(作心三時)나 작심삼분(作心三分)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의인도 넘어질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일곱 번이나 넘어질 수 있다는 것.
죄와 죽기까지 싸우다가
육신이 연약하여 또 넘어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일곱 번씩 일흔 번씩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 때문에 또 일어난다는 것.
이것이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우리들이다.
[출처: 이상환 목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