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을 맞이하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망언, 그리고 아시아 패권국가로 다시 부상하기 위한 아베 총리의 우경화 내지는 신(新)제국주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끝없는 착잡함과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과거 조국에 행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악행에 대한 사죄는커녕 철면피한 얼굴로 “독도는 일본 땅이다.”, “위안부는 강제 납치가 아니고 돈 벌려고 온 직업여성이다.”, “한국은 어리석은 국가이다.” 등등의 망언을 연신 쏟아내는 아베는 악의 화신(化身)처럼 우리에게 각인되고 있습니다. 아베가 누구입니까? 군국주의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아베의 외조부입니다. 이렇듯 아베의 피 속에는 극우와 전범의 DNA가 흐르고 있습니다. 과거 일제에 의해 한민족 역사에 가해진 비열한 파괴와 잔인한 폭력과 그러한 악행을 자행한 자신의 선조들의 과거사에 대해 사죄 한마디 없는 일본 정부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언행과 함께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세대가 우리 민족의 미래 역사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지나 않을까 하여 심히 우려됩니다.
제 과거 기억 속의 ‘일제(日帝)’는 추상적인 ‘악’의 개념을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가시화해 준 실체였습니다.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개인적으로 접했던 일제의 잔혹한 만행과 관련된 자료는 인간 속에 똬리를 틀고 기생하고 있는 끈덕진 악에 대해 깊이 각인시켜 준 생생한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도 집단화 한 악이 개인과 한 나라에 가한 비인간적인 상처와 폭력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치유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깊게 남아 있는지 역사는 증언해 줍니다. 그 상처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제가 침략한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에까지 각인되어 있습니다.
일제의 잔혹함에 치를 떨면서 끝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첫 번 경험은 일제의 관동군 예하 부대인 731 부대가 대략 3,000여 명을 대상으로 온갖 생체실험을 자행한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화한 《마루타》를 읽을 때였습니다. ‘마루타’는 ‘통나무’나 ‘재료’를 뜻합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제 없이 인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온갖 실험을 ‘마루타’를 대하듯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자행했습니다. 아베가 지난 2013년 5월 12일 어느 항공자위대 기지를 방문해 편명이 ‘731’인 곡예비행단 훈련기의 조종석에 앉아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올린 채 촬영한 사진을 보고서 따뜻한 피가 흐르지 않는 말 그대로의 ‘마루타’와 같은 인간이 한 시대를 책임진 지도자인 것이 처량하고 역겹기까지 했습니다.
일제의 만행과 관련하여 중국 민족의 아픔을 추체험(追體驗)케 한 작품은 미국 국적의 중국인 2세 여류작가였던 아이리스 장(Iris Chang)이 쓴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The Rape Of Nanking》입니다. 아이리스 장은 이 책을 출간하고서 취재과정에서 얻은 우울증과 일본 극우세력의 협박에 시달리다가 2004년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역사적 진실에 대해 중국이나 대만 정부와 학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동안 진실을 향한 순수하고 지적인 열정으로 그녀가 남긴 기념비적인 책은 자신의 침략 야욕을 한반도에 그치지 않고 중국을 넘보면서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이 벌어지던 1937년 12월 13일, 중국의 수도 난징의 점령에서 시작합니다. 이 책에서 그녀는 가장 참혹했지만 역사에 묻혀버린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어두운 사건이자 근현대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인간적인 만행을 낱낱이 고발합니다. 일제가 6주 동안 난징을 무대로 자행한 거대한 범죄 행위를 통해 최대 35만 여명의 중국인들이 살해되었고, 8만 여명 이상의 노소를 불문한 여성들이 무자비하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일제의 잔혹한 만행과 학살로 6주 동안 한 도시의 인구가 사라진 것입니다. 당시의 치가 떨리고 소름끼치는 악행을 읽는 내내 인간 속에 내재된 몸서리처질만큼 잔혹한 악의 실체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던 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경험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적이거나 집단적으로, 일제의 기만에 의해 징용된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적 실체와 대면했을 때였습니다. 이 역사적 실체를 다루기 전에 ‘정신대(挺身隊)’나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임을 먼저 지적해야겠습니다. 소위 ‘정신대’는 전쟁체제 하에서 일본군의 전투력 강화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조직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종종 ‘종군 위안부’라고 쓰는 표현은 일본의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으로 ‘종군(從軍)’이란 말 자체가 ‘군을 따르다’는 의미로 강제성보다는 자발성을 강조한 명칭이기 때문에 이런 만행으로 고통당하고 희생당한 분들에게 또 다른 상처와 모욕을 주게 됩니다. 따라서 강제성을 담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 가운데는 조선인과 중국인뿐만 아니라 필리핀과 태국,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일제가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도 포함됩니다. 지옥 같은 일제의 군대 위안소에서 생존한 여성들은 피와 성욕에 굶주린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루 20-50번 이상 성행위를 강요당했다는 증언을 하였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였다가 생존하여 당시의 참혹한 일상을 증언한 이옥선 할머니의 이야기는 왜 우리가 과거 일제가 자행한 만행을 잊어서는 안 되는지 깨우쳐 줍니다. “우리는 하루에 40~50명을 상대하도록 강요당했다. 많은 군인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거부하면 매질이었다. 그들은 우리 몸에 칼로 상처를 냈고, 우리 동료 몇몇은 칼에 찔려 죽었다. 자살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위안부의 총인원은 정확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조선인 위안부 14만 여명을 포함한 36만 내지 41만 여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참혹한 일상에 관한 증언과 역사적 자료를 읽으면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제의 잔혹함에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 민족의 여성들이 왜 그러한 처참한 아픔과 고통을 당해야만 했는지를 생각하면서 마음 한 쪽이 무너지는 통절함과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일제하에서 땅과 하늘이 무너질 만큼 그렇게 처절하고 억울하게 고통당하면서 죽어간 이 땅의 숱한 생명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지 않고 과거사로만 돌린다면 현 세대는 역사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끔찍한 역사적 실상을 기억하지 못한 죄이고, 그러한 망각이 가져올 되풀이 될 수도 있는 미래 역사를 미리 막지 못한 죄입니다. 비극의 과거사는 현 세대가 기억하지 못하면 다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혹한 과거사를 망각한 역사의 현장은 인간성을 상실한 또 다른 비극의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음을 분명 인식해야 합니다.
일제로부터 ‘광복’이나 ‘해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 동일한 역사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일제가 행한 악행에 감정적으로 분노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그러한 기억들이 후세대에게도 집단적으로 온축(蘊蓄)되어 다시는 고통스런 비극이 이 땅에 일어나지 않도록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아시아 해방’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한반도와 아시아를 침탈한 일제가 다시는 그러한 악행을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는 과거사를 기억하고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와 연대하여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광복’이나 ‘해방’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아는 것은 주권의 회복을 넘어 인간과 민족과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도 직결됩니다. 인간 역사 속에 언제나 준동할 수 있는 악을 두 눈 부릅뜨고 막는 힘은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우리의 의식 투쟁에 있습니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로 아로 새겨진 과거를 망각 속에 묻어버린 세대에게 목소리를 내어 그것을 일깨워주고 ‘기억하라’고 외쳐야 합니다. 국제무대에서도 끊임없이 외쳐서 모든 민족이 인간다운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환기해 주어야 합니다. 기억은 칼을 쥐지 못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무기입니다. 기억은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폭력으로 맞서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평화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무기입니다. 우리가 지난날들의 일제의 만행과 우리 민족의 뼈저린 고통을 기억할 때, 비극의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게 됩니다. 유대교 랍비 아브라함 헤셀(Abraham J. Heschel)은 말합니다. “기억은 신앙의 근원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헤셀의 말과 공명되는 명언이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독립운동가 단재(丹齋) 신채호의 말입니다. 그가 남긴 또 다른 말도 이곳에 옮겨 봅니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실제로 기억 없는 신앙이란 거의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에 살아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기억하며 그 기억을 현재화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역사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학습하는 것은 과거보다는 더욱 밝은 미래를 만들기 위함이고, 인간들이 저지른 온갖 악행에 함께 마음 아파하시며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과거를 망각한 세대는 역사와 함께 활동하시는 하나님도 쉬이 잊고 맙니다. 한 개인이나 민족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을 세울 때, 역사는 처참한 비극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일으킨 죽음의 역사와 함께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생명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며 과거의 역사적 진실과 더불어 생명의 복음을 전할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혼돈과 저주와 죽음의 역사를 온전한 생명의 역사로 전환시키시는 하나님의 오메가 포인트, 즉 하나님의 날(히 10:25)까지 이 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기(生氣)를 인간 역사 현장에 불어 넣어 이 땅을 창조와 생명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우리의 과제이자 사명이기에 멈출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