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주기를 맞아, 지난해 본지 선정 '올해의 책' 중 한 권이었던 토마스 G. 롱의 <고통과 씨름하다>에 대한 이진용 목사님의 서평을 게재합니다.
고통과 씨름하다(What Shall We Say?: Evil, Suffering and the Crisis of Faith)
토마스 G. 롱(Thomas G. Long), 장혜영 역, 새물결플러스, 2014, 242쪽(243~255은 주).
예전에 '하나님의 딜레마'라는 표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을 '심판을 행하시는 공의의 하나님'과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사이에서, 인간을 향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가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물론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경로를 통해 듣게 된 '하나님의 딜레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악(고통)'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서 왜 이 세상의 '악'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계신지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질문이 바로 '신정론'과 관련된 것입니다. 어원적으로 신정론(theodicy)은 두 개의 그리스 단어인 'theos(하나님)'와 'dike(정당성)'를 합친 것으로, '하나님의 정당성'을 가리킵니다(16쪽). 그러나 저자 토마스 G. 롱은 신정론에 대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고통에 대해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바를 전제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하는 문제와 관련된 논의'라고 말합니다(17쪽).
저자는 이렇게 신정론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자신의 책을 신정론의 등장, 신정론의 대중화, 신정론에 대한 경고, 신정론의 대표적 사상과 해결책의 구성으로 만들어 갈 것임을 안내합니다.
저자는 신정론의 등장을 '리스본 지진'(1755년 11월 1일 오전 9시 40분에 리스본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어서 피해가 컸음, 출처: 위키백과)과 연관하여 말합니다. 과거 사람들은 거대한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계몽주의가 발달하고 인간의 이성을 앞세우는 시대가 되었을 때, 더이상 자연재해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리스본의 지진은 교회 안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었기에, 사람들의 질문은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내버려 두셨는가?"라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과거라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라고 질문했겠지만, 현대의 정신은 "이 고통이 내가 생각하는 것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가"라는 식의 질문인 것입니다. 즉,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러한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한가?'라는 논리적 이해의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자는 바트어만을 빌어 다음의 네 가지 가설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앞서 제가 말한 '하나님의 딜레마'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1)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3)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선하시다.
(4) 무고한 고통이 존재한다.
결국 이러한 질문과 이해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의 문제, 즉 하나님의 개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방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자는 위의 도식과 관련된 논의를 "불가능한 체스 경기"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이 문제의 철학적 근간이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라는 주장을 제거하는 방향, 즉 무신론을 향하도록 주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93쪽).
또 폴 틸리히(Paul Thillich)의 "하나님이 질문의 기초가 아니라 질문의 대상일 때 우리는 그분께 닿을 수 없다"는 말을 빌려 "제가 보건대 악한 자들이 번성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궁금합니다"가 아니라, "오 하나님,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번성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며,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신학적 질문은 일종의 기도라고 말합니다(94쪽).
그러기에 저자는 고통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문제를 숙고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은 기도라고 말하면서, 신정론의 임무는 철학 안에서 논리적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위험에 처해 있는 세계관(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받아들여도 될지 모르겠지만)을 보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64쪽).
이러한 견해들을 바탕으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며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과 보완을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악과 고통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으며 악과 고통에 대한 과업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몫이라는 쿠쉬너에 대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결핍된 이해라고 하는 것이지요. 즉 위의 네 가지 항목의 '불가능한 체스 경기'에서 쿠쉬너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양보했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바 동일한 문제임을 더불어 밝힙니다. 악은 선의 결여, 부패로 설명하는 자유의지론에 대해서도 소개하지만, 완전한 낙원으로 창조된 세상에서 반역의 충동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질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지적합니다.
다양한 견해들을 소개하며 그 견해들의 장점과 단점을 지적한 저자는, '불가능한 체스 경기'의 네 가지 항목에 대한 이해의 전환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 하나님은 자연의 질서 바깥에서 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창조세계가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
(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질문: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더글라스 존 홀의 말을 빌립니다) 만일 세상의 권력을 이해하고 강력한 통치자나 막강한 군대를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이사에게 속한 것을 하나님께 부여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문제: 우리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선하심은, 결국 사랑과 공의와 선함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이해가 하나님께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은 하나님의 인격에 의해 정의되는 덕목이지, 반대로 우리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된 저자의 말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악을 뿌리뽑지 못하시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세상과 교전을 벌이는 일이 다른 종류의 하나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 곧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야 된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신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에 신실하지도 않으며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는 하나님도 아니다(220쪽)."
(4) 무고한 고통의 경험 문제: 무고하다(innocent)는 말은 사실 도덕적 잘못이 없거나 전적으로 부족함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고하다는 용어보다, 비극적이라고 용어를 전환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저자는 더불어 성경 '욥기'를 소개하면서,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신학적 우주(신앙세계)를 붕괴시킬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신 그분을 신뢰하는 인간으로 기꺼이 나아가겠는가(175쪽)?"
"욥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어떤 방밥으로든 신정론적 질문에 대해 타당한 해결을 찾지 못하리라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하나님이 고통의 문제를 제 머릿속에서 이해하게 되면, 이 선을 넘어 당신에게로 가겠습니다' 라거나 '당신께서 저의 정의관을 존중해 주신다면 저도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선을 넘어 기도와 믿음으로 무릎 꿇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178쪽)."
저자는 신정론에 대한 진정한 기독교적 반응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신다는 요한계시록 21장 4절의 성취를 믿어야 함을 말합니다. 물론 현재, 지금,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 악을 다루시기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지에 대해서도 증거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죠. 저자는 이것과 관련하여 현재의 시기를 마태복음 13장 24-30절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즉 원수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지만,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으리지도 모르니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렇듯 마지막 때까지 '악(고통)'은 우리와 함께 존재하지만, 생명을 파괴하고 영혼을 꺾기 위해 일어난 이 악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점을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지 않으셔서 악을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악과 고통의 존재에 대해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의 관념으로 하나님을 정의하여 하나님을 무능하게 만든다거나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분명 생명과 영혼을 파괴하는 그 악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불사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말하면서 저자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만일 이 세상의 지면에서 한 점의 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쓸어버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로 오신다면, 과연 살아남을 사람이 있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우리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그 마지막 때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남게 될 것을 봐야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우리에게는 현재 끌어안고 있는 '고통스러움'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악과 고통 자체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모범적 답안은 재차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기도도할 수 없는 처지, 슬픔과 고통에 얽매여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이들이 과연 스스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위로해 주시고 함께해 주실 것을 믿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 세상에 악과 고난이 있고,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분명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모습을 신뢰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을 때,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런 우리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인 그들과 함께 있어줌(그 방식은 비록 다양할지라도)과 그들을 위한 기도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모범답안을 제시하며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함께 있어줌'으로 말이죠.
"고통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문제를 숙고하는 가장 신실한 방법은 기도다(64쪽)."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178쪽)." 이 책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정의를 내리며 비극적인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기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제시합니다. 신정론이라는 신학적 담론을 목회적 방향으로 전환했다고나 할까요.
시편을 읽다 보면 탄식, 부르짖음 절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찬양으로 귀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비록 그 힘듦에 지쳐 기도할 수 없을지라도,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과 그 분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진용(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 목사, christianjin.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