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A.D. 570년에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쿠라이쉬(Quraish) 부족의 하심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쿠라이쉬 부족은 메카의 카바신전을 관리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무함마드는 쿠라이쉬 부족의 전통에 따라서, 태어난 지 7일 만에 사막에서 생활하는 베두인 여인 할리마(Halima)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이슬람 학자들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2세 때에 할리마의 아이들이 뛰어와서는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무함마드를 눕혀 배를 가르고 엎드리게 했다"는 말을 할리마에게 전했다. 할리마와 그의 남편은 무함마드가 신들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무함마드는 6세에 집으로 돌아왔다. 무함마드의 어머니 아미나(Aminah)는 그를 데리고 친정인 메디나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병이 들어 아브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무함마드는 조부(Abu al-Mutalik)와 함께 살았으나, 80세가 된 조부마저 그가 8세 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가난한 삼촌 아부 탈립(Abu Talib)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무함마드가 12세가 되었을 때 삼촌 아부 탈립은 그를 데리고 시리아로 무역을 떠났다. 그들 일행이 시리아 남부 부스라(Bosra)에 이르렀을 때 부하리(Buhaira)라는 네스토리안(경교) 수도사를 만나게 되는데, 부하리는 무함마드를 보고 무척 놀라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카라반을 타고 가는 무함마드를 위하여 구름이 그늘을 만들었고, 그와 그 일행이 쉬려고 했을 때 나무에서 가지가 내려와 그늘을 만드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그러면서 무함마드에 대하여 물어보았고, 무함마드에게 '예언자의 징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로버트 페인(Robert Payne)은 무함마드 언행록인 하디스를 근거로 "무함마드의 양 어깨 중간에는 비둘기 알 크기의 사마귀가 있었으며, 아랍인들이 이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아랍인들을 이를 자신들을 대신하여 건강과 번영, 안정과 다산 등을 신에게 간구하는 '영적 매개자'(샤먼)에게 나타나는 표징으로 믿었다.
무함마드는 가난한 삼촌의 집안일을 돌보면서 목동으로서 살았다. 그러다가 25세가 되었을 때 삼촌에게 제안을 받게 된다. 과부가 된 카디자(Kadija)라는 여인이 쿠라이쉬 부족 가운데 집안의 사업을 위한 총무를 찾는다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카디자의 총무가 되었다. 이후에 그가 첫 대상을 끌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를 다녀왔다. 그는 그곳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오는 길에 12세 때 만났던 부하리를 만나기 위하여 부스라로 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대상을 이끌고 사업을 성공시킨 무함마드에게 카디자가 청혼했다. 무함마드는 15세 연상인 카디자와 결혼한다.
카디자는 기독교의 이단인 에비온파(Ebionite) 교인이었다. 당시에 메카에는 200~300명 가량의 에비온파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무함마드에게 영향을 끼쳤던, 카디자의 사촌인 이븐 와라까 나우팔(Waraqua bin Naufal)은 에비온파의 사제였다. 에비온파는 쿰란 공동체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혼합된 종교였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위대한 선생이지만 구세주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천사장보다 높으나 신성을 가지지 않았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으나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채식주의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신앙은 이원론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그들만의 에비온파 경전을 가지고 있었다. 에비온파는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후에 비잔틴 제국을 벗어나서 흩어졌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부유한 카디자와 결혼한 무함마드는 경제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카디자와의 사이에 압둘(Abdul)과 까심(Kashim) 두 아들을 낳았고, 자이납(Zainab), 루카이야(Rukaiyya), 움무칼숨(Um Kulthum), 파티마(Fatima)라는 네 딸을 낳았다. 그런데 두 명의 아들은 어렸을 때 죽었다. 무함마드는 인생에 회의가 들었다. 자신도 고아인 데다 두 아들이 죽자, 인생의 해답을 찾기 위하여 메카에서 2마일 떨어진 히라산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곤 했다.
A.D. 610년 무함마드 나이 40세가 되던 해에 그가 라마단 금식월을 맞이하여 히라산 동굴에서 잠이 들었을 때, 한 천사가 종이 한 장을 들고 나타나서 "읽어라(Iqraa)"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깜짝 놀라서 "무엇을 읽으란 말입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천사는 그를 꼭 껴안았는데 그는 질식할 것 같았다. 잠시 후에 천사는 껴안았던 팔을 풀면서 "읽어라"라고 명령했다. 세 번 이 일이 반복된 후에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 그분은 한 방울의 정액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노라. 읽어라. 주님은 가장 은혜로운 분으로 연필을 쓰는 것을 가르쳐 주셨으며,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도 가르쳐 주셨노라"(꾸란 96:1~5)
이슬람의 어머니로 불리는, 무함마드의 어린 부인 아이샤(Aisha)는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을 때 증상에 대하여 이렇게 서술했다. "알라의 선지자는 습관처럼 발병을 해서, 추운 날에도 땀이 구슬처럼 얼굴에 흘러내렸다." 로버트 모레이(Robert Moray)는 이를 아랍의 문화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분명한 것은 무함마드 당시의 아랍 문화에서는 간질 발작을 종교적인 증상으로 봤으며, 귀신이 들리거나 신이 임한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무함마드 역시 초기에 이 두 가지 경우를 모두 생각했다. 먼저 그는 귀신에 사로잡힌 것으로 생각하며 두려워했다. 그리고 자살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헌신적인 아내는 '당신 같이 선한 사람이 귀신 들릴 가능성이 없다'고 설득하여 막았다."
무함마드가 집으로 돌아와서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의 부인이 그를 선지자로 받아들이고 개종하면서 이슬람은 시작되었다. 히라산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지 12년 만에 이슬람 신자들이 늘어났다.
쿠라이쉬 부족의 신앙을 떠나서 새로운 종교를 시작한 무함마드에게, 쿠라이쉬 부족은 적대적이었다. 그러던 중에 쿠라이쉬 부족에게서 자신을 지켜주었던 삼촌 아부 탈립이 죽었고, 같은 해에 부인 또한 죽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무함마드는 A.D. 622년에 100여명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메디나로 탈출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 온 이후에 계속되는 계시를 통하여 쿠라이쉬 부족의 상인들을 상대로 칼을 들고 약탈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무함마드가 받은, 전쟁에 관한 계시는 '칼의 계시'라고 불린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어디에서든지 이교도를 발견하면 그를 붙잡아라 포위하여 죽여라. 그리고 모든 매복 장소에서 기다려라"(꾸란 9:5) 이런 종류의 구절이 꾸란에 109구절이 된다. 무함마드는 70여 차례 전쟁을 치렀으며, 그 가운데 직접 군대를 지휘한 것도 27차례나 된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세를 확장한 무함마드는 이슬람을 전하기 위하여 각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시리아 남부의 알타흐로 보낸 15명의 이슬람 선교사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살해당하자, 무함마드는 3,000명의 이슬람 병사들을 보내어 보복했다. 무함마드는 칼을 들고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했다.
카디자가 죽은 후에 무함마드는 6세의 아이샤와 약혼을 하고 그녀가 9세가 되었을 때 결혼했다. 무함마드에게는 많은 부인들과 여종들이 있었다. 무함마드의 부인 가운데 두 명은 유대인이었고, 한 명은 기독교인이 되었다가 다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무함마드의 부인 가운데 여덟 번째인 마리암(Maryam)은 이집트의 콥트교회 대주교가 선물로 보낸 두 명의 노예 가운데 한 명이었다. 무함마드는 그녀를 통하여 아브라함이라는 아들을 얻었으나, 그는 병으로 죽었다. 아이샤의 증언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기도와 여자, 그리고 향수, 이 세 가지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결혼한 부인들을 통해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A.D.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결받은 에비온파와 A.D. 431년 에베소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결받은 네스토리안파, A.D.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결받은 콥트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위에 언급한 기독교 이단의 영향을 받은 내용들이 이슬람 안에서 교리화되었으며, 꾸란에도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함마드는 진리를 찾고자 갈망했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주변에는 많은 기독교 이단들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기록들을 아무리 살펴 보아도, 그는 일생 동안 성경적인 기독교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보인다. 결국 A.D. 632년 6월 8일, 무함마드는 62세로 메디나에서 고열과 폐렴으로 죽었다. 오늘도 이슬람권의 수많은 무함마드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무슬림의 80%는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