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너', '겨울아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로 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했던 인기가수에서 목사로 변신한 이종용 목사는 82년 텍사스 샌안톤오 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샌안토니오 한인남부침례교회에서 8년 반동안 목회생활을 했다. 이후 엘에이에서 코너스톤교회를 개척해 13년째 섬기고 있다.
"지금까지는 나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나의 젊음, 나의 시간, 나의 물질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깊은 회심의 읊조림은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울렸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부와 명예를 마음껏 누리다 1.75평 감방으로 역전된 자리, 가수 이종용은 여기서 서원기도를 드리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제가 바로 탕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강팍한 저를 강권적으로 구치소 밑바닥으로 내리꽂으신거죠. 인간적으로는 분명 저주의 자리였지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었기에 사실은 축복의 자리였습니다."
지난날의 가수 이종용도 여기까지였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그는 이곳에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전적인 헌신을 다짐했다. 출감해서는 하용조 목사가 전도사 시절 개척한 연예인교회를 섬기면서 신앙의 기본을 다졌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 스타'에서 예수역으로 2년간 249회 공연해 주님을 깊게 만난 것도 하나님이 예비한 큰 훈련의 장이었다.
그리고 도미해서 25년, 현재 이종용 목사가 섬기는 코너스톤교회는 남가주 중형교회를 대표하는 모퉁이돌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찬양 등의 문화사역에서 탁월한 빛을 발한다. 2005년 연초에 이 교회가 주최한 'Celebration 2005' 공연은 폭우가 퍼붓는 가운데서도 당시 1,700개 객석이 꽉 차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찬양의 꽃, 사실은 큐티가 뿌리
이처럼 코너스톤교회라고 하면 먼저 탁월한 실력과 무대매너를 갖춘 찬양팀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종용 목사는 "모든 사역의 뿌리는 큐티"라고 강조했다. "말씀이 깊게 내려앉은 그리스도인이 되는게 먼저입니다. 그래야 영성있는 찬양으로 영향력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과 큐티로 매일의 삶을 깊게 나눌려고 노력합니다."
실제 이종용 목사는 그 주의 큐티에서 뽑아서 주일설교를 전하는 식이다. 또한 수요예배 때는 교인들이 돌아가며 각자가 묵상한 말씀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다. 이렇듯 강도높은 큐티의 삶이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을 곁에 두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가정교회와 목장 나아가 교회가 원활한 유기체를 이룬 원동력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말씀을 중심으로 친교를 나누는 교회야말로 민족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 묵상의 능력이죠."
매일 매일 이 능력을 끌어들이는 치열한 영적전쟁이 바로 큐티였다.
시대의 옷, 문화를 입고
이처럼 코너스톤교회는 매일 매일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큐티와 더불어 시대의 옷 곧, 문화를 입길 주저하지 않는 교회다. "세속 문화에 대처하는 마지막 보루가 '교회'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전도사역에 있어서만큼은 21세기에 맞는 옷을 입는게 바람직합니다."
그래서일 것이다. 교회 내부가 최첨단의 시청각 시설을 갖추고 최상의 예배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매 주 예배를 앞두고 찬양팀은 며칠 밤을 지샌다. 교회 안을 넘어, 저만치 앞서가버린 세상문화를 상대하기 위한 줄기찬 복음의 날개짓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10년을 기도하며 준비한 공연이 바로 'Celebration 2005'였다. 모든 시스템은 에이미상을 주최하고 주관하는 회사에 의뢰했다. 투입된 금액만도 10만 달러. 당연히 조명, 음향, 영상 모두 최상의 것이었다. 무엇보다 10대부터 60대까지, 1세와 2세가, 나아가 히스패닉과 흑인 커뮤니티가 한데 어우르지는 최고의 무대를 선사했다.
"연령과 성별, 인종을 초월해 1,700여명이 하나된 무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악도 이렇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또한 이 시대 문화를 적극 활용해서 전도사역을 감당해야겠다는 거룩한 부담감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문화'라는 옷으로 잘 포장하길 원한다는 이종용 목사는 찬양팀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준비되는 그때 다시금 이런 무대를 준비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이종용 목사는
최고의 인기를 달리던 연예인 생활을 뒤로하고 1982년 1월, 33세가 되던 해 훌쩍 미련없이 신학공부를 위해 미국을 찾았다. 잔디 깍기, 청소하기, 간판 걸기 등으로 학비를 해결하며 텍사스 샌안톤오 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쳤다. 졸업과 동시에 샌안토니오 한인남부침례교회에서 8년 반동안 목회하면서 65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예배갱신과 문화사역을 위해 엘에이를 찾았다가 몇 몇의 청년들과 지금의 코너스톤교회를 개척, 출석성도 750여명의 건강한 중형교회를 일궜다.
이종용 목사는 소형교회를 섬기는 'Connection' 사역도 열심이다. 작은 도시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 부부를 초청해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 사역은 매년 한 차례씩 일 주일간 교회에서 열린다. 특히 교인들 달란트에 맞게 훈련시켜 다양한 사역의 장을 열어주는 코너스톤교회의 장점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취재를 마치며
라면을 앞에 두고 이종용 목사와 얘기를 이어갔다. 수요예배 말씀을 준비하기 전 시장을 달래야 하는 시간이었기에 그랬다. 이렇게 기자를 격이 없이 대해주는 목사님이 흔할까 싶었고,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나누길 원하는 따뜻한 목사님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제는 연예인이라는 흔적을 찾아보기에는 너무 변해버린(?) 이종용 목사는 온화했지만 신앙적인 고집에서만큼은 날카로웠다. 사무실에 카메라를 자진해서 설치하며 자기 관리하는 목회자가 흔한 일은 분명 아니다. 금요일날은 자정이 늦도록 찬양팀을 훈련시키고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육을 불편하게 하는 모습도 인상깊었다. 무엇보다 세상의 명예와 인기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경험한 그는 "목회자는 연예인이 아닌데 목회현장에서 종종 이러한 착각을 할 수 있다"며 늘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고 싶다고 한 말은 긴 여운을 남겼다.
'너', '겨울아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로 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했던 인기가수에서 목사로 변신한 이종용 목사는 82년 텍사스 샌안톤오 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샌안토니오 한인남부침례교회에서 8년 반동안 목회생활을 했다. 이후 엘에이에서 코너스톤교회를 개척해 13년째 섬기고 있다.
"지금까지는 나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나의 젊음, 나의 시간, 나의 물질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깊은 회심의 읊조림은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울렸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부와 명예를 마음껏 누리다 1.75평 감방으로 역전된 자리, 가수 이종용은 여기서 서원기도를 드리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제가 바로 탕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강팍한 저를 강권적으로 구치소 밑바닥으로 내리꽂으신거죠. 인간적으로는 분명 저주의 자리였지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었기에 사실은 축복의 자리였습니다."
지난날의 가수 이종용도 여기까지였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그는 이곳에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전적인 헌신을 다짐했다. 출감해서는 하용조 목사가 전도사 시절 개척한 연예인교회를 섬기면서 신앙의 기본을 다졌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 스타'에서 예수역으로 2년간 249회 공연해 주님을 깊게 만난 것도 하나님이 예비한 큰 훈련의 장이었다.
그리고 도미해서 25년, 현재 이종용 목사가 섬기는 코너스톤교회는 남가주 중형교회를 대표하는 모퉁이돌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찬양 등의 문화사역에서 탁월한 빛을 발한다. 2005년 연초에 이 교회가 주최한 'Celebration 2005' 공연은 폭우가 퍼붓는 가운데서도 당시 1,700개 객석이 꽉 차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찬양의 꽃, 사실은 큐티가 뿌리
이처럼 코너스톤교회라고 하면 먼저 탁월한 실력과 무대매너를 갖춘 찬양팀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종용 목사는 "모든 사역의 뿌리는 큐티"라고 강조했다. "말씀이 깊게 내려앉은 그리스도인이 되는게 먼저입니다. 그래야 영성있는 찬양으로 영향력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과 큐티로 매일의 삶을 깊게 나눌려고 노력합니다."
실제 이종용 목사는 그 주의 큐티에서 뽑아서 주일설교를 전하는 식이다. 또한 수요예배 때는 교인들이 돌아가며 각자가 묵상한 말씀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다. 이렇듯 강도높은 큐티의 삶이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을 곁에 두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가정교회와 목장 나아가 교회가 원활한 유기체를 이룬 원동력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말씀을 중심으로 친교를 나누는 교회야말로 민족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 묵상의 능력이죠."
매일 매일 이 능력을 끌어들이는 치열한 영적전쟁이 바로 큐티였다.
시대의 옷, 문화를 입고
이처럼 코너스톤교회는 매일 매일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큐티와 더불어 시대의 옷 곧, 문화를 입길 주저하지 않는 교회다. "세속 문화에 대처하는 마지막 보루가 '교회'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전도사역에 있어서만큼은 21세기에 맞는 옷을 입는게 바람직합니다."
그래서일 것이다. 교회 내부가 최첨단의 시청각 시설을 갖추고 최상의 예배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매 주 예배를 앞두고 찬양팀은 며칠 밤을 지샌다. 교회 안을 넘어, 저만치 앞서가버린 세상문화를 상대하기 위한 줄기찬 복음의 날개짓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10년을 기도하며 준비한 공연이 바로 'Celebration 2005'였다. 모든 시스템은 에이미상을 주최하고 주관하는 회사에 의뢰했다. 투입된 금액만도 10만 달러. 당연히 조명, 음향, 영상 모두 최상의 것이었다. 무엇보다 10대부터 60대까지, 1세와 2세가, 나아가 히스패닉과 흑인 커뮤니티가 한데 어우르지는 최고의 무대를 선사했다.
"연령과 성별, 인종을 초월해 1,700여명이 하나된 무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악도 이렇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또한 이 시대 문화를 적극 활용해서 전도사역을 감당해야겠다는 거룩한 부담감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문화'라는 옷으로 잘 포장하길 원한다는 이종용 목사는 찬양팀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준비되는 그때 다시금 이런 무대를 준비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이종용 목사는
최고의 인기를 달리던 연예인 생활을 뒤로하고 1982년 1월, 33세가 되던 해 훌쩍 미련없이 신학공부를 위해 미국을 찾았다. 잔디 깍기, 청소하기, 간판 걸기 등으로 학비를 해결하며 텍사스 샌안톤오 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쳤다. 졸업과 동시에 샌안토니오 한인남부침례교회에서 8년 반동안 목회하면서 65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예배갱신과 문화사역을 위해 엘에이를 찾았다가 몇 몇의 청년들과 지금의 코너스톤교회를 개척, 출석성도 750여명의 건강한 중형교회를 일궜다.
이종용 목사는 소형교회를 섬기는 'Connection' 사역도 열심이다. 작은 도시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 부부를 초청해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 사역은 매년 한 차례씩 일 주일간 교회에서 열린다. 특히 교인들 달란트에 맞게 훈련시켜 다양한 사역의 장을 열어주는 코너스톤교회의 장점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취재를 마치며
라면을 앞에 두고 이종용 목사와 얘기를 이어갔다. 수요예배 말씀을 준비하기 전 시장을 달래야 하는 시간이었기에 그랬다. 이렇게 기자를 격이 없이 대해주는 목사님이 흔할까 싶었고,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나누길 원하는 따뜻한 목사님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제는 연예인이라는 흔적을 찾아보기에는 너무 변해버린(?) 이종용 목사는 온화했지만 신앙적인 고집에서만큼은 날카로웠다. 사무실에 카메라를 자진해서 설치하며 자기 관리하는 목회자가 흔한 일은 분명 아니다. 금요일날은 자정이 늦도록 찬양팀을 훈련시키고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육을 불편하게 하는 모습도 인상깊었다. 무엇보다 세상의 명예와 인기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경험한 그는 "목회자는 연예인이 아닌데 목회현장에서 종종 이러한 착각을 할 수 있다"며 늘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고 싶다고 한 말은 긴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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