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한인장로교회(담임 서신일 목사)에서는 지난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요세미티 광야 기도원에서 전교인 수련회를 개최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히11장)'라는 주제로 진행된 수련회에서 서신일 목사는 "표면적인 개인의 욕망 성취를 위한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인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본질적인 믿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고 전했다. 이에 본지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기고를 7회에 걸쳐 연재한다.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단지 사람만 의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성경의 메시지를 수평주의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제일 중요한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빠져있는가? 예수님은 무한하게 인간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을 무시하는 것 때문에 눈물 흘리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드리는 자녀가 되자. 예수님은 의례히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시는 분이라고만 생각해선 안 된다. 이것은 교리 , 조직신학, 실천신학, 역사신학보다 앞서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얼마나 주님을 더 갈망하고 소원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믿음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만 가능한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관해 가장 잘 설명돼 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3절은 핍박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다. 예수 믿는 자는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즉 믿음에서는 주고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아들을 주신 것처럼, 이런 이해관계를 떠나서 택자들은 상대방의 인격 앞에 자신의 인격을 동원해 짊어져야 할 몫이 있다.
왜 책임이 있는가? 이제는 이 큰 영광의 은혜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 드릴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아벨로부터 사무엘까지, 신 구약의 영웅들은 분명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고난의 십자가 길이다. 믿음을 보편적이거나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인격 앞에서 어떻게 부응해야 하는가를 기독교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부응해야 할 것인가? 나 때문에 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성경은 유물론이 아니다. 무유창조이다. 인간을 단지 자동문처럼 만드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뜨겁게 믿는 사람도 있고, 차지도 덥지도 않은 사람이 있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의 힘, 계명이나 질서로 생각한다. 성경을 볼 때는 특히 그렇다. 성령 하나님께서 가장 홀대를 당하신다. 성령을 사물로 보거나 어떤 힘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래서 확신이 없다. 나 혼자 하는 짝사랑 같이 공허한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자기가 바라는 것에 대한 성취로 알고 있다.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한 신앙은 단지 자기암시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인격자이심에도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이다. 내가 부족하니까, 요즘 하나님 많이 아프게 해드렸으니까 하나님은 나를 비켜가겠지 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감정, 이성을 가지신 인격자이시지만 우리의 정의보다 관대하시고 긍휼과 자비가 한이 없으신 분이다. 놓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를 말씀으로 만드셨다. 여기서 출발이다.
믿음은 현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으셨으니까 내가 믿겠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믿기에 이러한 현상들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가항력적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내 목적이 달성이 되고 기도가 들어지면 하나님께서 계시고 믿는다고 한다. 하나님을 우주의 하나님이 아니라 목적성취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욥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선한 일해도 재앙을 주시니 난감했던것이다 .
신앙은 자기암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인격적으로 관계를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 놀라움에 모든 불안과 걱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단지 사람만 의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성경의 메시지를 수평주의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제일 중요한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빠져있는가? 예수님은 무한하게 인간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을 무시하는 것 때문에 눈물 흘리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드리는 자녀가 되자. 예수님은 의례히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시는 분이라고만 생각해선 안 된다. 이것은 교리 , 조직신학, 실천신학, 역사신학보다 앞서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얼마나 주님을 더 갈망하고 소원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믿음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만 가능한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관해 가장 잘 설명돼 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3절은 핍박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다. 예수 믿는 자는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즉 믿음에서는 주고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친아들을 주신 것처럼, 이런 이해관계를 떠나서 택자들은 상대방의 인격 앞에 자신의 인격을 동원해 짊어져야 할 몫이 있다.
왜 책임이 있는가? 이제는 이 큰 영광의 은혜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 드릴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아벨로부터 사무엘까지, 신 구약의 영웅들은 분명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고난의 십자가 길이다. 믿음을 보편적이거나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인격 앞에서 어떻게 부응해야 하는가를 기독교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부응해야 할 것인가? 나 때문에 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성경은 유물론이 아니다. 무유창조이다. 인간을 단지 자동문처럼 만드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뜨겁게 믿는 사람도 있고, 차지도 덥지도 않은 사람이 있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의 힘, 계명이나 질서로 생각한다. 성경을 볼 때는 특히 그렇다. 성령 하나님께서 가장 홀대를 당하신다. 성령을 사물로 보거나 어떤 힘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래서 확신이 없다. 나 혼자 하는 짝사랑 같이 공허한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자기가 바라는 것에 대한 성취로 알고 있다.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한 신앙은 단지 자기암시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인격자이심에도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이다. 내가 부족하니까, 요즘 하나님 많이 아프게 해드렸으니까 하나님은 나를 비켜가겠지 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감정, 이성을 가지신 인격자이시지만 우리의 정의보다 관대하시고 긍휼과 자비가 한이 없으신 분이다. 놓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를 말씀으로 만드셨다. 여기서 출발이다.
믿음은 현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으셨으니까 내가 믿겠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믿기에 이러한 현상들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가항력적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내 목적이 달성이 되고 기도가 들어지면 하나님께서 계시고 믿는다고 한다. 하나님을 우주의 하나님이 아니라 목적성취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욥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선한 일해도 재앙을 주시니 난감했던것이다 .
신앙은 자기암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인격적으로 관계를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 놀라움에 모든 불안과 걱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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