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일을 접고, 잠시 다음 과정을 위해 머리도 식힐 겸, 1주일에 2-3번 정도 산행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 하루 6-8시간을 걸어다녔기에, 별 무리 없이 산행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9시경 집을 나와 뒷산을 오르며, 1시간 거리인 부산 어린이대공원 입구 '만남의 광장'을 지나, 가 보지 않은 곳인 삼계봉과 파리봉을 거쳐 산성마을을 통해, 화명동 방향으로 내려오는 산행의 코스를 선택하여 산을 올랐습니다. 평소 자주 가던 '만남의 광장'을 가기 전 약수터와 운동시설이 있는 곳을 지나려는데, 마침 약수터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신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산행하는 분들에게 잠시 읽을거리를 제공한 것이겠지요. 누가 이걸 만들어 놓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글 내용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글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수행이란 안으로는 가난을 배우고, 밖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공경하는 것이다. ②어려운 가운데 가정 어려운 것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다. ③용맹 가운데 가장 큰 용맹은 옳고도 지는 것이다. ④공부 가운데 가장 큰 공부는 남의 허물을 뒤집어 쓰는 것이다.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한다며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세요!"를 크게 외치고, 길거리에서 화장지를 주면서 자기 교회에 나오라고 유난을 떠는 모습 말입니다. 전도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의무요 철칙입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발 빠르게 따라가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다른 종교로 내몰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깊은 산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공감하고 존경하는 이웃 종교 지도자들의 글을 읽어 보니, 산행 중인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면서 맑은 산새들의 지저귐과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이 전해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런 곳에 비치해 놓을 수 없을까요? 얼마나 좋은 말씀이 많습니까?
이제 본론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현재 우리 교계에서 순교의 정신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분들은 자신이 살 궁리만 합니다. 은퇴를 앞둔 목사님들은 원로목사가 되어 각종 혜택을 누리기 위해 장로들에게 잘 보이려 하질 않나, 산더미 같은 교회 빚을 속히 갚고 자라나는 영혼들을 위해 많이 투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실정입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설교에서는 성도들의 개인 신상 문제들을 이야기하면서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기름값은 다 받아가면서도, 자신의 승용차 연료는 아껴가며 교회 차량으로 볼 일을 봅니다. 개인 볼일로 가는 승용차에 부목사를 대동합니다.
교회 장로라는 분들은 서열 속에서 권력을 행사합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해야 옳은데, 그 권력에 오히려 아부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누가 희생양이 되겠습니까? 그건 바로 주의 어린양들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신바람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에 집중하며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맡은 직분과 그 부서의 미래를 위해 많은 제안과 더불어 열중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정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거듭날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자신을 낮추고 겸손으로 주님께 대하듯 성도들을 대해야 합니다. 자신의 권력을 누리기 위해 고향 사람, 친인척, 말 잘 듣고 아부할 사람들을 주축으로 교회를 이끌어 나가니 교회에 무슨 미래와 발전이 있겠습니까?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모두 성도들의 피땀으로 드리는 것으로 귀하게 성물로서 사용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볼 때 심히 마음이 무겁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언로가 열려 누구나 소통하고 대화로 풀어야 하는데, 무조건 만장일치로 해 버립니다. 누구 한 사람 이야기를 꺼내면 믿음이 없다고 몰아세우고, 불평불만이 많으면 안 된다고 딴죽을 겁니다. 그러니 장로가 되고픈 집사들은 아예 입을 닫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수백, 수천 명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만장일치가 나올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극소수 인원이 회의를 하면 몰라도, 이건 아닙니다.
장로님이나 안수집사, 권사쯤 되면 교회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시시때때로 교인들의 동태도 살피면서 신앙에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신천지나 이단에 넘어가는지, 아니면 몸이 불편한지 등을 살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정말 난감한 시대가 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 권사님들이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십자가 상에서 부르짖으시던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예전 고신측은 율법을 많이 강조했지만 요즘은 많이 탈피하여 부흥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통합측 교회들은 19세기로 돌아가는 듯합니다. 저는 성서를 잘 모르지만, 제가 아는 바로 주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줄 압니다. 모두들 교회에서는 하나같이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율법주의와 외형에 많이 치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는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함으로써, 늘 혼자 막중한 업무를 담당했던 모세에게 행복한 사역의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모세의 비효율적인 사역의 광경을 보고, 일의 경중에 따라 분담케 하라고 조언하여 장로 70인,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제도를 제안한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행정 및 군사체제를 갖추고, 비록 초보 단계였지만 명실상부한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믿음 안에서 연구하고 개척하며, 열심을 다해 사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그리고 장로님! 이제 그 틀에서 빠져 나오시길 바랍니다. 많은 양떼들이 길을 잃고 있습니다. 우왕좌왕 헤매고 있습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교회 성도들을 더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양떼들의 저 울부짖음을 들어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이드로의 아이디어를 본받아,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성도들을 위해 아이디어를 내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아름다운 개혁이 없는 한 점점 멸망으로 가는 길이 더욱 넓어집니다.
지금 시작하세요! 그리고 먼저 나를 먼저 내려 놓으세요! 그 후 주님은 미소를 지으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