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무엘상 16장 19절~23절
다윗은 이미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 기름부음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징표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에는 아직 거쳐야 할 과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는 시험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람됨을 시험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왕이 될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조바심이었을까? 아니면 혁명을 통해 사울 왕을 죽이고 왕이 되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런 마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재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주신 그 부르심에 성실했습니다. 그 부르심은 여전히 들에서 양을 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왕궁에 들어갈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물론 왕으로서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왕궁을 맛보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왕궁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악신에 시달리는 사울 왕을 위해 수금을 타는 일로 왕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사울이 이에 사자를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사울 왕이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아들 다윗을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아버지 이새는 왕의 명대로 아들 다윗을 왕궁으로 보냅니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명에 복종하여 왕궁으로 갑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성품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는 권위에 복종할 줄 아는 젊은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복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권위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세상은 복종보다는 비판을 더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오늘의 세상이 거역과 반항으로 가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도록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권위에 대해 복종하지 않고 자라난 자녀들은 결국 사회에서도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려 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정당한 권위에는 복종하고 순종할 줄 아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랬기에 위대한 하나님께 그는 복종하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다윗에게는 이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드디어 다윗은 왕궁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왕으로서가 아니라 수금을 연주하는 일로 사울 왕을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다른 왕을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궁으로 보내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또 다른 왕을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왕궁에 들어간 다윗이 어떤 마음으로 사울 왕을 대했을까요? “이제 당신은 끝이다. 이제부터 이 왕궁의 주인은 나야...”이런 마음으로 사울 왕을 대한 것 같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사울 왕을 극진히 모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먼저 섬김의 도를 배우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 주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에게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지니신 구원의 힘은 섬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군림하고 다스리고 지배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다윗도 이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먼저 섬기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왕을 섬길 줄 알아야 했습니다.
다윗은 악신에 시달리는 사울 왕을 위해 수금을 연주합니다. 그가 연주할 때마다 사울이 상쾌하게 낫고 악신이 그에게서 떠났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뛰어난 수금 연주자였습니다. 수금을 연주할 때 악신이 떠났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악신은 노래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악신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우울해 있을 때 악신은 힘을 떨칩니다. 하지만 우리가 즐거워 노래하고, 기뻐 찬양하면 악신은 우리를 떠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가득할 때, 우리 가정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가득할 때, 우리 교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가득할 때 악신을 도망갑니다.
찬양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찬양하면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찬양을 들으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악신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그의 능력으로 사울 왕을 위로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질고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우리를 치료하시는 분으로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다윗은 위로자로 사울 왕에게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던지 그 집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사명을 그들이 발길이 닿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를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란 위로자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늘 곁에 있으면서 언제든지 우리의 평화를 회복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위로자이십니다. 그렇기에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위로자입니다. 긍휼의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늘 위로합니다. 다윗은 위로자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에게 몇 가지 소중한 성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는 다윗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꼭 있어야 할 성품일 것입니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군림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기 전에 먼저 섬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위로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주님도 아버지께 순복하셨습니다.
주님도 세상을 구원하시기 전에 먼저 세상을 섬기셨습니다. 주님은 위로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성품으로 살기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정당한 권위에 순복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군림하고 다스리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섬기는 법을 배우게 해 주옵소서. 모든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그리하면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 기름부음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징표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에는 아직 거쳐야 할 과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으로서 자격을 갖추는 시험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람됨을 시험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왕이 될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조바심이었을까? 아니면 혁명을 통해 사울 왕을 죽이고 왕이 되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런 마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재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주신 그 부르심에 성실했습니다. 그 부르심은 여전히 들에서 양을 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왕궁에 들어갈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물론 왕으로서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왕궁을 맛보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왕궁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악신에 시달리는 사울 왕을 위해 수금을 타는 일로 왕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사울이 이에 사자를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사울 왕이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아들 다윗을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아버지 이새는 왕의 명대로 아들 다윗을 왕궁으로 보냅니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명에 복종하여 왕궁으로 갑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성품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는 권위에 복종할 줄 아는 젊은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복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권위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세상은 복종보다는 비판을 더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오늘의 세상이 거역과 반항으로 가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도록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권위에 대해 복종하지 않고 자라난 자녀들은 결국 사회에서도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려 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정당한 권위에는 복종하고 순종할 줄 아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랬기에 위대한 하나님께 그는 복종하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다윗에게는 이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드디어 다윗은 왕궁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왕으로서가 아니라 수금을 연주하는 일로 사울 왕을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다른 왕을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궁으로 보내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또 다른 왕을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왕궁에 들어간 다윗이 어떤 마음으로 사울 왕을 대했을까요? “이제 당신은 끝이다. 이제부터 이 왕궁의 주인은 나야...”이런 마음으로 사울 왕을 대한 것 같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사울 왕을 극진히 모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먼저 섬김의 도를 배우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 주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에게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지니신 구원의 힘은 섬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이 세상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군림하고 다스리고 지배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다윗도 이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먼저 섬기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왕을 섬길 줄 알아야 했습니다.
다윗은 악신에 시달리는 사울 왕을 위해 수금을 연주합니다. 그가 연주할 때마다 사울이 상쾌하게 낫고 악신이 그에게서 떠났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뛰어난 수금 연주자였습니다. 수금을 연주할 때 악신이 떠났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악신은 노래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악신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우울해 있을 때 악신은 힘을 떨칩니다. 하지만 우리가 즐거워 노래하고, 기뻐 찬양하면 악신은 우리를 떠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가득할 때, 우리 가정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가득할 때, 우리 교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가득할 때 악신을 도망갑니다.
찬양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찬양하면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찬양을 들으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악신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그의 능력으로 사울 왕을 위로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질고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우리를 치료하시는 분으로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다윗은 위로자로 사울 왕에게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던지 그 집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사명을 그들이 발길이 닿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를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란 위로자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늘 곁에 있으면서 언제든지 우리의 평화를 회복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위로자이십니다. 그렇기에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위로자입니다. 긍휼의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늘 위로합니다. 다윗은 위로자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에게 몇 가지 소중한 성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는 다윗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꼭 있어야 할 성품일 것입니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군림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기 전에 먼저 섬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위로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주님도 아버지께 순복하셨습니다.
주님도 세상을 구원하시기 전에 먼저 세상을 섬기셨습니다. 주님은 위로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성품으로 살기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정당한 권위에 순복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군림하고 다스리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섬기는 법을 배우게 해 주옵소서. 모든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그리하면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