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질은 탁월한 유모어 감각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한번은 그가 하원의원에 처음 출마 했을때 였습니다. 상대 후보가 그를 “늦잠자는 게으른 사람” 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 비난을 듣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이 없다고 해명을 하거나, 아니면 비난하는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 내어 맞대응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처칠은 그 말을 들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생각하고, 이렇게 응수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나처럼 예쁜 아내를 데리고 산다면 당신들도 일찍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흔히 유모어 하면 한번 들어서 웃음을 자아내는 싱거운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즐겨하는 유모어는 남을 난처하게 함으로써 웃기는 저속한 유모어에 대한 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남을 비하하면서 까지 웃겨야 한다면, 그 유모어는 분명 좋은 유모어는 아닙니다. 좋은 유모어라면 힘든 때,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게 만들어 줍니다. 처칠의 유모어처럼…

1980년대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인기 그룹 Newton family의 “Smile Again”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슬픔과 아픔을 표현한 노래입니다. 그러나 그 슬픔과 아픔을 “Smile”이란 반대 감정으로 노래를 합니다. 현실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거기에 얽매여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그 슬픔을 웃어주면서, 앞으로 다가올 웃음을 기대합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유모어라고 봅니다. 그것이 승화된 웃음입니다. 슬픔과 아픔을 웃어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그 슬픔과 아픔은 다시 기쁨이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공부하다가 바울의 유모어를 엿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항상 긍정적이고, 소망적인 태도를 가지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3장 에서는 다소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아직 얻지 못했고, 아직 다다르지도 못했고, 아직 붙들지도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오랜 세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려고 애써왔지만, 지금의 자기 모습을 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바울의 고백이겠지요. 아직 변화되지 못하는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보면서 답답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고, 힘들어 하지 않고 다 잊어버린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약점과 상처에 매여있지 않겠다는 말이겠지요. 반면 붙잡아야 할 그 목표를 바라보면서 힘차게 전진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런 바울의 모습이 결코 자신의 단점과 약점을 인정치 않는 무책임한 사람의 태도라고 보고 싶지 않습니다. 부족함을 인정하지만, 그 부족함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과 약점을 보고 웃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야 할 목표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건강한 웃음이라고 봅니다.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 참사로 인해 슬픔과 아픔이 내내 쌓였던 한달간이었습니다. 이 슬픔과 아픔을 이겨나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변화될 그날을 바라보면서, 이 형편없는 우리를 보며 웃어줄 수 있는 진정한 여유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젠 희망을 꿈꾸며, 앞을 향해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웃어봅시다. Smile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