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9-21)
본문의 주인공은 부러움의 대상인 부자이다. 부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요즈음과 같이 경제를 우선시하는 시대에는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숨은 노력과 경영의 지혜가 있어야 하고, 운과 기회도 따라야 될 수 있다.
본문의 부자는 자연환경이 열악한 이스라엘에서 농사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만큼 주인공은 뛰어난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의 돋보이는 지혜가 있었다. “밭의 소출이 풍성하였다”는 것은 경영의 지혜를 의미한다. “더 큰 곡간을 지어 생산한 농작물을 잘 보관하였다”는 것은 관리의 지혜가 있음을 말한다. 그는 또한 쌓아 놓기만 하는 부자가 아니라 즐길 줄도 아는 소비의 지혜로움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셨다. 어느 민족보다 지혜를 귀중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어리석다는 것은 가장 큰 모욕이다. 형제에게 ‘라가’(바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던져진다고 하였다(마 5:22). 여기에서 ‘라가’는 아람어 ‘레카’를 음역한 것인데, ‘속이 텅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속이 빈 멍청한 바보라는 뜻이다. 바보같다는 비하 발언만으로도 큰 욕이 되며 지옥 불에 던져질 정도의 큰 죄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지혜를 중요시하였음을 보여준다.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인 부자가 하나님 앞에서 실패자로 전락하였다. 왜 하나님께서 이 부자를 어리석은 실패자로 규정하셨을까?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중심적 인물이었다. 누가복음 12:17-19 3절에는 ‘나’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부자는 오직 자신만을 앞세우는 이기적 인물이었다. 이기주의는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단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기적인 사람에게 나타는 두 가지 대표적인 현상이 있다.
(1) 첫째는, 감사의 대상인 하나님이 없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기에 누구에게도 감사할 수가 없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적절한 때에 비가 내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농사지을 다른 방도가 없음을 의미한다. 부자가 부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하나님이 안중에 없었고, 감사는 더더구나 있을 수 없었다.
(2) 둘째로, 함께 살아갈 이웃이 없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가난으로 고생하는 많은 이웃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부자의 눈에는 그런 이웃이 보이지 않았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함께 나눌 대상이 없었다. 당시 농사는 노동집약적이었기 때문에 이웃사람들의 직간접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노동에 대한 대가야 지불했겠지만, 그 외의 다른 배려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부자는 영혼의 주인이 누구이며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영혼과 생명에 관한 한 그는 백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였다. 물질은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며 요긴한 수단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이 없게 되면, 물질은 수단에서 목적으로 바뀐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부자의 쌓아 놓은 재산은 그의 삶을 지탱시키는 우상이었다. 그는 물질이 생명을 유지하거나 연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영혼의 평안과 즐거움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하였다.
그런 물질만능주의는 갖가지 위험성을 안고있다. 곧 물질을 모든 가치의 척도로 삼는 가치관의 도착, 이기주의, 지나친 경쟁, 관계성의 파괴, 하나님의 상실과 쾌락주의 등이다.
물질 의존적 삶의 마지막 도착지는 쾌락을 행복으로 혼동하는 향락주의이다. 행복과 쾌락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가치관이다. 행복이 영속성을 지닌 보람으로 삶의 창조적 원동력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면, 쾌락은 일시적이고 감각적이며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를 마비시켜 인간을 향락의 노예로 삼는 마력이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는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실존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자신을 절대화시킬 수 없다. 오히려 마음 중심의 왕좌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 이웃과 나누는 삶, 물질 우선적 가치관을 버리고 영혼을 귀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삶,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우면서도 행복하게 사는 삶이다.
*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 구약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바른 신앙과 건강한 삶의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를 제목으로 한 수필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본문의 주인공은 부러움의 대상인 부자이다. 부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요즈음과 같이 경제를 우선시하는 시대에는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숨은 노력과 경영의 지혜가 있어야 하고, 운과 기회도 따라야 될 수 있다.
본문의 부자는 자연환경이 열악한 이스라엘에서 농사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만큼 주인공은 뛰어난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의 돋보이는 지혜가 있었다. “밭의 소출이 풍성하였다”는 것은 경영의 지혜를 의미한다. “더 큰 곡간을 지어 생산한 농작물을 잘 보관하였다”는 것은 관리의 지혜가 있음을 말한다. 그는 또한 쌓아 놓기만 하는 부자가 아니라 즐길 줄도 아는 소비의 지혜로움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셨다. 어느 민족보다 지혜를 귀중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어리석다는 것은 가장 큰 모욕이다. 형제에게 ‘라가’(바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던져진다고 하였다(마 5:22). 여기에서 ‘라가’는 아람어 ‘레카’를 음역한 것인데, ‘속이 텅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속이 빈 멍청한 바보라는 뜻이다. 바보같다는 비하 발언만으로도 큰 욕이 되며 지옥 불에 던져질 정도의 큰 죄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지혜를 중요시하였음을 보여준다.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인 부자가 하나님 앞에서 실패자로 전락하였다. 왜 하나님께서 이 부자를 어리석은 실패자로 규정하셨을까?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중심적 인물이었다. 누가복음 12:17-19 3절에는 ‘나’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부자는 오직 자신만을 앞세우는 이기적 인물이었다. 이기주의는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단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기적인 사람에게 나타는 두 가지 대표적인 현상이 있다.
(1) 첫째는, 감사의 대상인 하나님이 없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기에 누구에게도 감사할 수가 없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적절한 때에 비가 내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농사지을 다른 방도가 없음을 의미한다. 부자가 부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하나님이 안중에 없었고, 감사는 더더구나 있을 수 없었다.
(2) 둘째로, 함께 살아갈 이웃이 없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가난으로 고생하는 많은 이웃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부자의 눈에는 그런 이웃이 보이지 않았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함께 나눌 대상이 없었다. 당시 농사는 노동집약적이었기 때문에 이웃사람들의 직간접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노동에 대한 대가야 지불했겠지만, 그 외의 다른 배려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부자는 영혼의 주인이 누구이며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영혼과 생명에 관한 한 그는 백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였다. 물질은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며 요긴한 수단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이 없게 되면, 물질은 수단에서 목적으로 바뀐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부자의 쌓아 놓은 재산은 그의 삶을 지탱시키는 우상이었다. 그는 물질이 생명을 유지하거나 연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영혼의 평안과 즐거움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하였다.
그런 물질만능주의는 갖가지 위험성을 안고있다. 곧 물질을 모든 가치의 척도로 삼는 가치관의 도착, 이기주의, 지나친 경쟁, 관계성의 파괴, 하나님의 상실과 쾌락주의 등이다.
물질 의존적 삶의 마지막 도착지는 쾌락을 행복으로 혼동하는 향락주의이다. 행복과 쾌락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가치관이다. 행복이 영속성을 지닌 보람으로 삶의 창조적 원동력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면, 쾌락은 일시적이고 감각적이며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를 마비시켜 인간을 향락의 노예로 삼는 마력이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는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실존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자신을 절대화시킬 수 없다. 오히려 마음 중심의 왕좌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 이웃과 나누는 삶, 물질 우선적 가치관을 버리고 영혼을 귀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삶,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우면서도 행복하게 사는 삶이다.
*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 구약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바른 신앙과 건강한 삶의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를 제목으로 한 수필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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