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인 이기주의적 사고에 젖어 자기 밖에 모르며 살아가던 사람이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상담자를 찾아갔다. 사람들과 융화 되지 못하고 고독에 몸부림치는 자기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상담자는 사무실 창가로 걸어가보라고 그 사람에게 주문을 했다.
창가에 선사람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자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나무, 건물, 자동차등이 보인다고 말한다. 상담자는 다시 그에게 그 옆에 걸려있는 거울을 보라고 말한다. 이어서 거기엔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자 자기의 얼굴만 보인다고 대답했다.
상담자는 상담을 받으러온이에게 말했다. “똑 같은 유리인데 한쪽은 투명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이는 것이고, 한쪽은 같은 유리지만 뒷면에 무엇을 발라놓아서 당신 얼굴만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의 창에 이끼가 잔뜩 끼어서 이웃이 보이질 않고, 이웃들이 당신에게 다가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라고 진단을 했다는 말이 있다.
정말 그렇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마음의 유리창에 이물질이 잔뜩 끼어 자기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맑고 투명한 영혼으로 창문너머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을 방문하셔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값진 나드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린다. 방안에는 순식간 나드 향유의 냄새가 진동을 하게 되었고, 주님은 그 여인의 값진 헌신에 감격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 현장을 목격한 제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혈기를 부렸다. 나름대로 그들의 분 냄은 당위성이 있었다.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는 장정이 일년 동안 일해서 먹지도, 쓰지도 못하고 모아야 하는 고가였을 뿐 아니라 그 향유는 왕의 즉위식이나, 제사장 등을 세우는 거룩한 예식, 그리고 죽은 시신에 바르는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것이 허비로 보였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면 얼마나 값지게 쓰일 터인데 그 향유가 예수님께 지금 왜 필요하냐는 항변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서 불평하고 따지는 이들에겐 저마다 실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허비의 때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시기가 어느 때였는가? 예수님께서 그토록 목이 터지게 당신의 구속사역을 설명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당할 것을 말씀하시며 함께 기도하자고 권고하셨건만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왕권을 차지하시면 자신들이 누릴 특권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달랐다. 그녀는 예수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헌신의 시기기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전 재산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허비한다고 불평하고 화를 내는 제자들에게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노라’말씀하시며 온 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함도 전파되리라 축복하셨다. 오늘날 교회는 자신의 모든 소유와 몸을 드려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진정한 제자를 필요로 한다.
참된 제자는 허비와 헌신을 구분할 수 있는 자이다. 무엇이 헌신일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면 헌신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과 정열과 물질을 투자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일이라면 그것은 허비일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여인의 생명과 같은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리며 눈물 흘렸던 그 여인은 진정 값진 허비를 한자요, 진정한 헌신자가 아닐까 싶다.
작년 아프리카 단기선교에 이어 금년에도 한번 더 아프리카를 다녀오기 위해 기도 중에 준비하고 있다. 크지 않은 교회에서, 재정도 넉넉지 못한 교회에서 목사의 선교열정이 성도들에게 다소 부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인간적인 기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하는 사역이기에 진정 값진 헌신이라 생각된다.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내 배를 곯으며 남의 입에 밥을 떠 넣어 주는 허비라 할지라도 생명의 진액을 자내서라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영혼의 창문을 맑게 닦아 놓으면 아프리카가 보이고, 사마리아가보이고, 땅끝이 보여지고,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보여지게 마련이다
.
오늘 내 영혼의 유리창엔 예수님 제자들처럼 헌신이 허비로 보이는 이기심에 가득 찬 이물질이 끼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겠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해 좀더 값진 허비를 즐겨 하는 교회가 되고 개인심령이 되어 지기를 소원해본다.
크리스찬라이프 제공
창가에 선사람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자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나무, 건물, 자동차등이 보인다고 말한다. 상담자는 다시 그에게 그 옆에 걸려있는 거울을 보라고 말한다. 이어서 거기엔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자 자기의 얼굴만 보인다고 대답했다.
상담자는 상담을 받으러온이에게 말했다. “똑 같은 유리인데 한쪽은 투명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이는 것이고, 한쪽은 같은 유리지만 뒷면에 무엇을 발라놓아서 당신 얼굴만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의 창에 이끼가 잔뜩 끼어서 이웃이 보이질 않고, 이웃들이 당신에게 다가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라고 진단을 했다는 말이 있다.
정말 그렇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마음의 유리창에 이물질이 잔뜩 끼어 자기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맑고 투명한 영혼으로 창문너머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을 방문하셔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값진 나드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린다. 방안에는 순식간 나드 향유의 냄새가 진동을 하게 되었고, 주님은 그 여인의 값진 헌신에 감격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 현장을 목격한 제자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혈기를 부렸다. 나름대로 그들의 분 냄은 당위성이 있었다.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는 장정이 일년 동안 일해서 먹지도, 쓰지도 못하고 모아야 하는 고가였을 뿐 아니라 그 향유는 왕의 즉위식이나, 제사장 등을 세우는 거룩한 예식, 그리고 죽은 시신에 바르는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것이 허비로 보였다.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면 얼마나 값지게 쓰일 터인데 그 향유가 예수님께 지금 왜 필요하냐는 항변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서 불평하고 따지는 이들에겐 저마다 실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허비의 때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시기가 어느 때였는가? 예수님께서 그토록 목이 터지게 당신의 구속사역을 설명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당할 것을 말씀하시며 함께 기도하자고 권고하셨건만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왕권을 차지하시면 자신들이 누릴 특권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달랐다. 그녀는 예수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헌신의 시기기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전 재산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허비한다고 불평하고 화를 내는 제자들에게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노라’말씀하시며 온 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함도 전파되리라 축복하셨다. 오늘날 교회는 자신의 모든 소유와 몸을 드려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진정한 제자를 필요로 한다.
참된 제자는 허비와 헌신을 구분할 수 있는 자이다. 무엇이 헌신일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면 헌신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과 정열과 물질을 투자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일이라면 그것은 허비일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여인의 생명과 같은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리며 눈물 흘렸던 그 여인은 진정 값진 허비를 한자요, 진정한 헌신자가 아닐까 싶다.
작년 아프리카 단기선교에 이어 금년에도 한번 더 아프리카를 다녀오기 위해 기도 중에 준비하고 있다. 크지 않은 교회에서, 재정도 넉넉지 못한 교회에서 목사의 선교열정이 성도들에게 다소 부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인간적인 기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하는 사역이기에 진정 값진 헌신이라 생각된다.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내 배를 곯으며 남의 입에 밥을 떠 넣어 주는 허비라 할지라도 생명의 진액을 자내서라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영혼의 창문을 맑게 닦아 놓으면 아프리카가 보이고, 사마리아가보이고, 땅끝이 보여지고,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보여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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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 영혼의 유리창엔 예수님 제자들처럼 헌신이 허비로 보이는 이기심에 가득 찬 이물질이 끼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겠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해 좀더 값진 허비를 즐겨 하는 교회가 되고 개인심령이 되어 지기를 소원해본다.
크리스찬라이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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