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인간관계에서 가장 많이 화두가 되는 말이 있다면 상처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그래서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전반에 걸쳐서 소통과 상생이라는 말이 요즈음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처가 왜? 생기는가? 입니다.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은 상처는 지나친 애착에서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애착을 버리면 아픔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남자에게 얼굴이 못생겼다하면 별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남자에게 몸매가 그게 뭐냐고 말해도 별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남자는 얼굴이나 몸매에 그리 크게 애착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자에게 얼굴이 못생겼다고 한다면 크게 상처를 받습니다. 심지어 몸매를 들먹였다가는 더 이상 그 여자와 원만한 관계를 지속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유는? 여자는 얼굴이나 몸매에 남자보다 더 크게 애착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처를 받지 않는 비결은 무엇인가? 스스로 애착 갖는 부분을 멸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발버둥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각한 공격도 별로 상처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초연한 성도의 삶의 이유를 갈5:24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목회자가 사역의 연수와 깊이를 더 하다보면 점점 자기를 부인하는 쪽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점점 성화되어간다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역자가 자기 자존심과 자기체면과 자기 교만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집중적인 공격을 받을 때 크게 상처 입게 됩니다. 이때에 겪는 상처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해서 나중에는 피하게 됩니다.

그러면 공격으로 인한 상처를 피하는 길이 무엇인가?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자신이 살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나를 대적하는 공격조차도 나의 성숙과 나의 변화에 촉매 작용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도우시는 모든 상황들이 나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쁜 상황이라고 무조건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항상 복음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헌신된 사람일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그가 자기 의를 붙들고 자기주장으로 서 있었다면 과연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는 배경이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요. 나중에 사도가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의 사도 성까지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은 자기 부인이 없었다면 생존이 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움과 공격조차도 거룩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에게 물어보라, 목회가 평탄하냐고?, 당신 마음대로 목회를 하냐고?, 사사기 12장에는 입산, 엘론, 압돈 등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사사들의 일대기가 나옵니다. "입산이 사사가 되었고 죽었다. 엘론이 사사가 되었고 죽었다." 라는 식의 묘사만이 반복됩니다. 설교를 피하고 싶은 본문입니다. 그러나 연속 설교는 피할 수 없기에 인 사이트를 써 갑니다. '입산, 할 말이 없다. 엘론, 할 말이 없다. 압돈, 할 말이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인 사이트가 생겼습니다. 그때 설교제목이 "할 말이 없는 인생을 살지 말자" 였다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도 나쁜 상황은 없습니다. 정직하게 부딪히면 그 나쁜 상황 속에서도 가치 있는 열매가 나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