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절 하반절에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한다”는 말은 부활은 확실히 있는 것이며, 그 부활은 신의 세계에서 영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부활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심판을 받기 위한 부활이고, 또 하나는 하늘나라의 영생을 보장받기 위한 생명의 부활입니다.
요한복음 5:28-29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부활(復活, Resurrection)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원론이라는 신학적 학설에 의하면 사람은 영과 육의 결합체로서, 영은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되어졌고 육은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육체는 흙을 의지해야 먹고 삽니다. 그리고 육체의 생명의 수한이 끝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한 것처럼 그 영과 육체가 잘 결합해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아담, 즉 사람으로 이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은 영과 육이 다시 분리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야고보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약2:26)”이라고 한 것처럼 영혼이 우리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이 말이 옳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1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가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하고 답했지만 그는 하나님은 능히 그 뼈들을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의 절대적이고 확실한 믿음을 일깨우기 위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명하시길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고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했고 에스겔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까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살리시는 생기를 공급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공급이 중단된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문으로 나가시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셨을 때 그 나무는 뿌리부터 말라죽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음을 교훈하시기 위해 생기공급을 중단하신 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29-31)”는 말씀처럼 우리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생기를 공급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심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실현의 가능성은 과학적인 뒷받침도 있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시적 부활과 예수님을 통해 실질적인 견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부활을 믿지 못해 부활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심판을 위한 부활을 하게 됩니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사망과 음부에서 죽은 자를 내어줄 때 그들의 영이 나오게 되며 세상에 흩어져 있던 원소가 재결합해서 몸이 다시 사는 부활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보좌 앞에서 행위록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 불못에 던지워져서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믿음의 용사이며 영웅같은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공적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를 정탐하기 위해 갔다가 위기에 처한 정탐꾼들의 말을 믿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음으로 그들을 피신시켜 가족들의 목숨과 자기의 목숨을 구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우리에게 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목숨을 거는 신앙 모험이 있을 수 있다면 예수님은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여러분들의 영생복락을 구원이라는 조건에서 책임지고 보장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300명의 용사를 모아 여리고 성을 함락했고,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한 것처럼 신앙적 용사들의 예는 허다합니다.
산헤립이 18만 5천명을 이끌고 유대를 쳐들어 왔을 때 선지자의 기도로 하나님은 그들끼리 서로를 도륙하는 비극을 맞게 하셨으며 유대는 안전한 구원을 보장받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되어졌기 때문에 신앙 영웅적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사자들의 입을 봉할 수 있는 믿음이 다니엘에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믿음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교한 신하들에 의해 보통 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단3:27)” 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불기운을 이겨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35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했다”는 말은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이 엘리야를 통해 다시 살게 된 것과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섬기며 살다 얻게 된 아들이 죽었다 다시 살게 된 것을 말합니다.
부활신앙의 확신이 절대적인 믿음으로 믿어지는 사람이라야 악형을 받는 과정에서 믿음을 버리기를 강요당하더라도 그 상황을 구차히 벗어나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활신앙의 소망을 더 나은 자격으로 이룰 수 있기 위하여 현실 속에서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것들을 다 빼앗겨도 초월하여 희생과 영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기를 바라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신앙용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했습니다. 바라는 것은 육신이 요구하는 세상조건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 앞에 서게 되는 그날에 더 나은 부활을 위한 절대적인 신앙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다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진리의 말씀에 여러분들의 심령이 붙잡혀 매인 바 되시길 바랍니다.
열거한 많은 믿음의 용사들과 같이 살게 된다면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염려하신 말씀 중에 “너희 몸을 죽이려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영과 육을 한꺼번에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영과 육의 결합체이지만 우리의 육체는 질그릇에 불과하고 영의 가치는 질그릇 속에 들어있는 보배라고 비유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육체적 입장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살아온 것은 가치관의 잘못을 저질러왔음을 깨닫고 영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고 재건하고 개발하여 발전시켜 가기 위해 이제 우리는 더 좋은 부활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귀가 항상 우리를 위협하는 무기는 죽이고, 빼앗고, 망신을 주며,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인간적인 입장에 해당되는 위협의 수단입니다. 이것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영적 가치 기준뿐임을 깨달을 때 어떠한 환란과 행패를 당해도 육체는 흙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체에서 파생되어져 온 내 영의 가치가 영원무궁토록 소망적이어야 하고 더 나은 자격으로 예수님 품에 안길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남은 생애는 영적 가치 수호와 개발, 발전을 위해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귀가 죽인다고 해도 이미 육신의 가치기준은 흙더미에 불과한 것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그 영혼은 순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함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 즉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더 좋은 부활을 목적으로 웃으며 찬송하며 기꺼이 죽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마귀를 굴복시키길 바랍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며 지낸다 하더라도 그들의 영적 가치는 천하보다 귀하고 보배로움을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먼저 가치관을 재정립하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귀한 것은 내 속에 있는 영의 가치뿐입니다. 그 영의 가치는 생명의 부활에 참예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기를 넘치도록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가 사는 것은 세상적 물질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사시어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신 순간부터 우리를 영원히 살도록 책임지고 공급해 주시는 부활생기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남은 생애가 그러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5:28-29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부활(復活, Resurrection)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원론이라는 신학적 학설에 의하면 사람은 영과 육의 결합체로서, 영은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되어졌고 육은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육체는 흙을 의지해야 먹고 삽니다. 그리고 육체의 생명의 수한이 끝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한 것처럼 그 영과 육체가 잘 결합해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아담, 즉 사람으로 이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은 영과 육이 다시 분리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야고보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약2:26)”이라고 한 것처럼 영혼이 우리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이 말이 옳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1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가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하고 답했지만 그는 하나님은 능히 그 뼈들을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의 절대적이고 확실한 믿음을 일깨우기 위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명하시길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고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했고 에스겔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까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살리시는 생기를 공급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공급이 중단된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문으로 나가시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셨을 때 그 나무는 뿌리부터 말라죽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음을 교훈하시기 위해 생기공급을 중단하신 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29-31)”는 말씀처럼 우리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생기를 공급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심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실현의 가능성은 과학적인 뒷받침도 있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시적 부활과 예수님을 통해 실질적인 견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부활을 믿지 못해 부활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심판을 위한 부활을 하게 됩니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사망과 음부에서 죽은 자를 내어줄 때 그들의 영이 나오게 되며 세상에 흩어져 있던 원소가 재결합해서 몸이 다시 사는 부활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보좌 앞에서 행위록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 불못에 던지워져서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믿음의 용사이며 영웅같은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공적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를 정탐하기 위해 갔다가 위기에 처한 정탐꾼들의 말을 믿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음으로 그들을 피신시켜 가족들의 목숨과 자기의 목숨을 구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우리에게 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목숨을 거는 신앙 모험이 있을 수 있다면 예수님은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여러분들의 영생복락을 구원이라는 조건에서 책임지고 보장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300명의 용사를 모아 여리고 성을 함락했고,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한 것처럼 신앙적 용사들의 예는 허다합니다.
산헤립이 18만 5천명을 이끌고 유대를 쳐들어 왔을 때 선지자의 기도로 하나님은 그들끼리 서로를 도륙하는 비극을 맞게 하셨으며 유대는 안전한 구원을 보장받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되어졌기 때문에 신앙 영웅적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사자들의 입을 봉할 수 있는 믿음이 다니엘에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믿음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교한 신하들에 의해 보통 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단3:27)” 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불기운을 이겨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35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했다”는 말은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이 엘리야를 통해 다시 살게 된 것과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섬기며 살다 얻게 된 아들이 죽었다 다시 살게 된 것을 말합니다.
부활신앙의 확신이 절대적인 믿음으로 믿어지는 사람이라야 악형을 받는 과정에서 믿음을 버리기를 강요당하더라도 그 상황을 구차히 벗어나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활신앙의 소망을 더 나은 자격으로 이룰 수 있기 위하여 현실 속에서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것들을 다 빼앗겨도 초월하여 희생과 영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기를 바라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신앙용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했습니다. 바라는 것은 육신이 요구하는 세상조건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 앞에 서게 되는 그날에 더 나은 부활을 위한 절대적인 신앙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다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진리의 말씀에 여러분들의 심령이 붙잡혀 매인 바 되시길 바랍니다.
열거한 많은 믿음의 용사들과 같이 살게 된다면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염려하신 말씀 중에 “너희 몸을 죽이려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영과 육을 한꺼번에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영과 육의 결합체이지만 우리의 육체는 질그릇에 불과하고 영의 가치는 질그릇 속에 들어있는 보배라고 비유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육체적 입장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살아온 것은 가치관의 잘못을 저질러왔음을 깨닫고 영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고 재건하고 개발하여 발전시켜 가기 위해 이제 우리는 더 좋은 부활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귀가 항상 우리를 위협하는 무기는 죽이고, 빼앗고, 망신을 주며,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인간적인 입장에 해당되는 위협의 수단입니다. 이것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영적 가치 기준뿐임을 깨달을 때 어떠한 환란과 행패를 당해도 육체는 흙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체에서 파생되어져 온 내 영의 가치가 영원무궁토록 소망적이어야 하고 더 나은 자격으로 예수님 품에 안길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남은 생애는 영적 가치 수호와 개발, 발전을 위해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귀가 죽인다고 해도 이미 육신의 가치기준은 흙더미에 불과한 것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그 영혼은 순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함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 즉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더 좋은 부활을 목적으로 웃으며 찬송하며 기꺼이 죽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마귀를 굴복시키길 바랍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며 지낸다 하더라도 그들의 영적 가치는 천하보다 귀하고 보배로움을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먼저 가치관을 재정립하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귀한 것은 내 속에 있는 영의 가치뿐입니다. 그 영의 가치는 생명의 부활에 참예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기를 넘치도록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가 사는 것은 세상적 물질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사시어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신 순간부터 우리를 영원히 살도록 책임지고 공급해 주시는 부활생기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남은 생애가 그러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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