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는 전통적으로 성악의 강국이며 몇명의 위대한 작곡가를 배출하였다. 이를테면 작곡가로서는 오페라의 베르디와 푸치니 협주곡으로는 비발디가 있다. 성악가는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많은데 근래에 작고한 파파로티 그리고 맹인가수 안드레아 보첼리가 유명하고 전시대에는 전설적 테너 카루소, 마리오 란자등 기라성같은 가수들이 군집해 있다. 거기다 오페라 가수까지 거론하면 입이 아플지경에 이를 것이다.
반면에 지휘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으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와 리카르도 무티(Ricard Muti)야말로 이태리가 낳은 지휘영웅들이다. 아바도는 1933년 6월 26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16세가 되어서야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 입학 19세에 졸업하고 이후에도 지휘와 작곡를 2년 더 공부하였다. 졸업한 그 해 여름에 시에나에서 열린 「Accdemia Chigiana」의 계절 지휘자 학교에서 쥬빈메타를 만나 같은 선생에게서 배운다. 그들은 장차 세기의 위대한 지휘자로 성장할 싹으로 만났던 것이다. 아바도는 그후 오스트리아 빈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면서 그 시대의 위대한 지휘자들, 즉 브루노 발터나 오토 클렘페러•요젭 크리프스•칼 뵘•카라얀 같은 사람들이 리허설 하는 것을 보면서 지휘자로서의 소양을 쌓게된다. 1958년 비인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해 여름에 보스턴의 탱글우드 지휘콩쿠르에 참가하여 지휘자 부문에서 일등상인 「쿠세비츠키」상을 받는다. 그러나 지휘자로서의 길은 멀고도 험하여 1965년에야 베를린 방송관현악단의 지휘를 하게 되었는데, 이를 들은 카라얀은 그를 잘츠부르크 축제에 초청, 거기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파리•런던•부다페스트 등 각지에서 초청이 쇄도하였고, 더욱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성공한 이후인 1968년에는 「라스칼라」의 관현악단 상임지휘자로 초청되었다. 1981년에는 시카고 관현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로 지명되었고 그 해에 런던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된다. 그리고 1989년에는 카라얀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로 선출된다. 그는 전임이었던 카라얀과 달리 단원들과의 민주적인 소통을 통해 그들에게서 최고의 음악을 끌어내는 멋진 지휘자였다. 그의 아내에게 맹장염에 걸린 단원의 문병을 매일 하도록 부탁한 것으로 보아 그의 인품을 알 수있다. 그는 또한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청소년들을 기르는 일에 주력했다. 그는 유럽공동체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휴가를 반납하며 무보수로 이들을 이끌었다. 그는 직접 아이들을 위한 클래식 음악 입문서인 '음악이 울리는 집'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카라얀 보다는 번스타인에 가까운 지휘자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청소년 육성에 힘쓴 공로로 1994년 지멘스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2000년 위암으로 위 절제 수술을 받고 베를린 필 수석지휘자 직을 내놓는다. 그는 수많은 대곡들을 그만의 음악색깔로 지휘하였다. 그중에 손꼽으라 한다면 그는 아무래도 말러의 대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카르도 무티 (Ricardo Muti )는 그 자신 스스로 100 퍼센트 이탈리아인이라고 말하는 전형적인 라틴인이다. 그는 아바도가 태어난지 8년후인 1941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바도와는 달리 부유한 의사가정에서 자랐으므로 부족함 없는 음악교육을 받게된다. 8세 때부터 바이올린 수업을 받았고, 4년 후에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무티가 다닌 음악학교의 교장은 도니제티였고 그의 피아노 스승은 빈첸쪼 비탈레로였다. 그가 지휘자로서 꿈을 꾸게 된것은 베르디 음악원에 입학, 안토니노 보토로부터는 지휘를, 브루노 벨리니로부터는 성악에 대한 전문지식과 작곡을 배우면서 부터이다. 10년이 걸리는 과정을 5년만에 끝낸 그는 1967년 귀도 칸텔리 지휘콩쿠르에 도전하여 1등을 차지, 1969년에는 유진 올먼디의 눈에 띄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직까지 겸하게 된다. 1972년 무티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는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1973년부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1982년 7월까지 이 교향악단의 음악감독과 상임지휘자로 모든 정력을 쏟는다. 그리고 그 공로로 「계관지휘자」라는 칭호를 받는다. 1986년에는 유럽 최고의 오페라극장인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 소속의 교향악단 라 스칼라 필을 맡는다. 뉴욕 필하모닉이 쿠르트 마주어의 후임으로 그를 청빙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 자리에 로린 마젤이 갔던 것이다. 그는 "나는 음악에서의 내셔널리즘을 믿지 않는다"며 "음악을 통해 전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바도나 무티는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 지휘자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지휘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으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와 리카르도 무티(Ricard Muti)야말로 이태리가 낳은 지휘영웅들이다. 아바도는 1933년 6월 26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16세가 되어서야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 입학 19세에 졸업하고 이후에도 지휘와 작곡를 2년 더 공부하였다. 졸업한 그 해 여름에 시에나에서 열린 「Accdemia Chigiana」의 계절 지휘자 학교에서 쥬빈메타를 만나 같은 선생에게서 배운다. 그들은 장차 세기의 위대한 지휘자로 성장할 싹으로 만났던 것이다. 아바도는 그후 오스트리아 빈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면서 그 시대의 위대한 지휘자들, 즉 브루노 발터나 오토 클렘페러•요젭 크리프스•칼 뵘•카라얀 같은 사람들이 리허설 하는 것을 보면서 지휘자로서의 소양을 쌓게된다. 1958년 비인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해 여름에 보스턴의 탱글우드 지휘콩쿠르에 참가하여 지휘자 부문에서 일등상인 「쿠세비츠키」상을 받는다. 그러나 지휘자로서의 길은 멀고도 험하여 1965년에야 베를린 방송관현악단의 지휘를 하게 되었는데, 이를 들은 카라얀은 그를 잘츠부르크 축제에 초청, 거기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파리•런던•부다페스트 등 각지에서 초청이 쇄도하였고, 더욱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성공한 이후인 1968년에는 「라스칼라」의 관현악단 상임지휘자로 초청되었다. 1981년에는 시카고 관현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로 지명되었고 그 해에 런던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된다. 그리고 1989년에는 카라얀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로 선출된다. 그는 전임이었던 카라얀과 달리 단원들과의 민주적인 소통을 통해 그들에게서 최고의 음악을 끌어내는 멋진 지휘자였다. 그의 아내에게 맹장염에 걸린 단원의 문병을 매일 하도록 부탁한 것으로 보아 그의 인품을 알 수있다. 그는 또한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청소년들을 기르는 일에 주력했다. 그는 유럽공동체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휴가를 반납하며 무보수로 이들을 이끌었다. 그는 직접 아이들을 위한 클래식 음악 입문서인 '음악이 울리는 집'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카라얀 보다는 번스타인에 가까운 지휘자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청소년 육성에 힘쓴 공로로 1994년 지멘스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2000년 위암으로 위 절제 수술을 받고 베를린 필 수석지휘자 직을 내놓는다. 그는 수많은 대곡들을 그만의 음악색깔로 지휘하였다. 그중에 손꼽으라 한다면 그는 아무래도 말러의 대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카르도 무티 (Ricardo Muti )는 그 자신 스스로 100 퍼센트 이탈리아인이라고 말하는 전형적인 라틴인이다. 그는 아바도가 태어난지 8년후인 1941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바도와는 달리 부유한 의사가정에서 자랐으므로 부족함 없는 음악교육을 받게된다. 8세 때부터 바이올린 수업을 받았고, 4년 후에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무티가 다닌 음악학교의 교장은 도니제티였고 그의 피아노 스승은 빈첸쪼 비탈레로였다. 그가 지휘자로서 꿈을 꾸게 된것은 베르디 음악원에 입학, 안토니노 보토로부터는 지휘를, 브루노 벨리니로부터는 성악에 대한 전문지식과 작곡을 배우면서 부터이다. 10년이 걸리는 과정을 5년만에 끝낸 그는 1967년 귀도 칸텔리 지휘콩쿠르에 도전하여 1등을 차지, 1969년에는 유진 올먼디의 눈에 띄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직까지 겸하게 된다. 1972년 무티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는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1973년부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1982년 7월까지 이 교향악단의 음악감독과 상임지휘자로 모든 정력을 쏟는다. 그리고 그 공로로 「계관지휘자」라는 칭호를 받는다. 1986년에는 유럽 최고의 오페라극장인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 소속의 교향악단 라 스칼라 필을 맡는다. 뉴욕 필하모닉이 쿠르트 마주어의 후임으로 그를 청빙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 자리에 로린 마젤이 갔던 것이다. 그는 "나는 음악에서의 내셔널리즘을 믿지 않는다"며 "음악을 통해 전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바도나 무티는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 지휘자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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