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세이지는 1935년 만주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으로 그의 음악공부에 동기를 부여했던 분이다. 그는 여타한 서양 유명 음악인에 비해 비교적 늦게 음악공부를 시작하였다. 15세에 일본 토호 음악학교에 입학 졸업한 후에 파리로 가서 브장송 지휘 콩쿠르에 참가 1등상을 탔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던 보스턴 관현악단의 지휘자 샤를르 뮌시의 초청으로 보스턴의 탱글우드 지휘 경연대회에서 쿠세비츠키상을 받고 레너드 번스타인의 관심을 끌게 된다. 1960년에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가 되었고, 1963년에는 토론토 관현악단의 지휘자, 6년 후에는 샌프란시스코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1970년에는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973년에는 보스턴 심포니의 음악감독직을 맡아 29년동안이나 보스토니안들의 사랑을 받는다. 1994년에는 소니 등의 후원으로 보스턴 심포니의 주 무대인 탱글우드에 1,180석 규모의 '세이지 오자와 홀'이 개관한것만 보아도 보스턴인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를 알수 있게 한다. 그는 보스턴 심포니를 경음악으로 세계화 하는데 공헌한 독특한 지휘자이다. 그의 경쾌한 지휘동작은 청중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기 일수여서 사람들은 음악을 듣기보다 그의 지휘를 보기위해 몰려 들고는 했다. 2002년 빈 신년음악회에서 라테츠키 행진곡을 맨손으로 거의 춤추듯 지휘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유태계가 아닌 지휘자를 손꼽는 것이 더 쉬운 지휘계에서 정명훈과 그는 동양의 2대 거장으로 꼽을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한국의 호사가들 가운데는 오자와와 정명훈 가운데 누가 더 연주 공력이 세냐는 미묘한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자와는 그저 미국에 녹아든 겉만 일본인 일뿐이다. 아니, 그는 일본인이거나 미국인이기전에 세계인이 된 것이다. 그가 보스톤 심포니의 임기를 거의 마치려는 순간에 식도암이 발견되어 절제수술을 한 후 음악활동이 대폭 제한되었다. 게다가 요통이 심해 장시간 연주해야 하는 교향곡을 더이상 지휘 할 수 없게 되었다.
정명훈(鄭明勳)은 서울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여 일곱 살 때 서울 시립 교향악단과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해 화제가 되었다. 1961년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968년에서야 뉴욕의 메네스 음악원에 입학해 나디아 라이젠버그와 칼 밤베르거에게 각각 피아노와 지휘를 배웠다. 1974년에는 차이코프스키 국제 음악 콩쿨에 피아니스트로 참가해 2위로 입상해 국제음악계에 불모지였던 한국에 큰 서광을 비추었다. 김포 공항에서 서울 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던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1975년에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하였고 재학 중이던 1976년에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을 지휘해 지휘자로 공식 데뷔했고, 1980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 1984년에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 1988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상을 수상했고, 1989년에는 바스티유 감옥 부지에 새로 건립한 오페라극장의 전속 오페라단인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현 파리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1998년에는 한국 KBS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았지만 악단원들과 갈등을 빚어 불과 수 개월 후 사임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에 취임했고, 이듬해에는 신성 일본 교향악단을 흡수해 재구성된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특별 예술 고문을 맡았다. 2005년에는 서울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세 직책을 현재까지 유임하고 있다. 그밖에도 아시아인 혹은 아시아계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비상설 관현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도 맡고 있다.
그의 두 누나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첼리스트 정명화도 세계적인 연주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음악가족인데 이는 전적으로 그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의 헌신적인 뒷받침으로 가능케 된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93세까지 장수하면서 자녀들을 모두 성공시켰다.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하루 1달러씩 모은 돈으로 아들 명훈에게 피아노를 사준 일화도 유명하다. 그도 역시 한국인이거나 미국인이라기 보다는 세계인이 된 까닭에 그에게 한국식 민족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오자와 세이지나 정명훈의 음악성의 첫 발견은 그들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세계적 음악인으로 키워 냈던 것이다. 자녀들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것은 어머니가 최적인 것이다.
유태계가 아닌 지휘자를 손꼽는 것이 더 쉬운 지휘계에서 정명훈과 그는 동양의 2대 거장으로 꼽을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한국의 호사가들 가운데는 오자와와 정명훈 가운데 누가 더 연주 공력이 세냐는 미묘한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자와는 그저 미국에 녹아든 겉만 일본인 일뿐이다. 아니, 그는 일본인이거나 미국인이기전에 세계인이 된 것이다. 그가 보스톤 심포니의 임기를 거의 마치려는 순간에 식도암이 발견되어 절제수술을 한 후 음악활동이 대폭 제한되었다. 게다가 요통이 심해 장시간 연주해야 하는 교향곡을 더이상 지휘 할 수 없게 되었다.
정명훈(鄭明勳)은 서울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여 일곱 살 때 서울 시립 교향악단과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해 화제가 되었다. 1961년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968년에서야 뉴욕의 메네스 음악원에 입학해 나디아 라이젠버그와 칼 밤베르거에게 각각 피아노와 지휘를 배웠다. 1974년에는 차이코프스키 국제 음악 콩쿨에 피아니스트로 참가해 2위로 입상해 국제음악계에 불모지였던 한국에 큰 서광을 비추었다. 김포 공항에서 서울 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던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1975년에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하였고 재학 중이던 1976년에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을 지휘해 지휘자로 공식 데뷔했고, 1980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 1984년에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 1988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상을 수상했고, 1989년에는 바스티유 감옥 부지에 새로 건립한 오페라극장의 전속 오페라단인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현 파리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1998년에는 한국 KBS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았지만 악단원들과 갈등을 빚어 불과 수 개월 후 사임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에 취임했고, 이듬해에는 신성 일본 교향악단을 흡수해 재구성된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특별 예술 고문을 맡았다. 2005년에는 서울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세 직책을 현재까지 유임하고 있다. 그밖에도 아시아인 혹은 아시아계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비상설 관현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도 맡고 있다.
그의 두 누나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첼리스트 정명화도 세계적인 연주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음악가족인데 이는 전적으로 그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의 헌신적인 뒷받침으로 가능케 된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93세까지 장수하면서 자녀들을 모두 성공시켰다.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하루 1달러씩 모은 돈으로 아들 명훈에게 피아노를 사준 일화도 유명하다. 그도 역시 한국인이거나 미국인이라기 보다는 세계인이 된 까닭에 그에게 한국식 민족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오자와 세이지나 정명훈의 음악성의 첫 발견은 그들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세계적 음악인으로 키워 냈던 것이다. 자녀들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것은 어머니가 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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