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전당, 게다가 미션스쿨이기도 한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반경 1마일 안에 점치는 곳이 2백 곳이 넘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점치는 것을 쉽게 생각하고, 재미 중의 하나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무당의 이론이 참 재미있습니다. 귀신을 불러서 귀신을 내쫓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강한 귀신이 최영 장군 귀신이랍니다. 최영장군 귀신을 모시고 있는 무당이 잡귀들을 물러가라고 하면 잡귀들이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한동안은 괜찮을지 모르지요. 그런데 조금 있으면 최영 장군 귀신이 그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럼 더 강한 귀신을 불러와야 합니다. 최영 장군보다 강한 귀신이 강감찬 장군 귀신이랍니다. 그럼 강감찬 장군 귀신을 모시고 있는 무당이 최영 장군 귀신을 내쫓는 것입니다.
그럼 한동안 잠잠합니다. 그러다가 강감찬 장군 귀신이 또 괴롭히면 더 강한 귀신을 불러와야 하는데, 한국에는 없어서 중국 관우 귀신을 모시고 있는 무당을 불러와야 합니다. 그럼 잠잠해지는가 하다가 또 괴롭힙니다. 어떻습니까? 그 사람의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까? 악화되고 있습니까? 계속 귀신과 함께 해야 합니다. 제가 재미있게 이야기했지만, 무당의 이론은 논리적으로 허술하고, 말이 안되는 겁니다. 같은 귀신끼리 싸우면 그 귀신의 나라가 서겠습니까? 귀신끼리 싸울 리도 없거니와 귀신이 붙어 있는데 그 사람의 형편이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시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불러서 귀신을 내쫓는다”고 말합니다. 무당이론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논리에서 허점을 단번에 짚어 내십니다.
“귀신이 서로 내쫓으면 같은 나라끼리 분쟁하는 것인데, 그러면 귀신의 나라가 서겠느냐? 그럼 너희들도 귀신을 힘입어서 귀신을 내쫓느냐? 더 강한 힘과 권세를 가지신 성령을 힘입어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겠느냐?(마12:26-28)” 귀신을 내 쫓으려면 적어도 귀신보다 강하고, 귀신과는 반대편에 있는 성령을 힘입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실 때 귀신들은 반항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군대 귀신이 돼지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하면서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나이까?(마8:29)”라고 묻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종말에 자신들을 지옥 불에 멸하실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망할 것을 알고 있고, 망할 것이 분명한 귀신들에게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묻겠다는 것입니까?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물어서 무슨 이익을 얻겠습니까? 몰상식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무당을 찾는 이유는 미래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무당이 미래를 맞출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미래를 조금 일찍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습니까? 사울 왕이 엔돌의 여인 무당에게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 귀신을 불러 왔습니다. 그러자 사무엘 귀신이 사울의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사울의 종말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미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당이 다시 반복하는 것일 뿐입니다.
무당이 불러낸 사무엘은 실재로 천국에서 온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 분명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사무엘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귀신들의 장난입니다. 귀신은 이렇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이 아니라 천사겠지요.
언제까지 귀신에게 물을 것입니까? 언제까지 귀신놀음에 돈을 바치고, 시간과 열정을 허비할 것입니까? 가나안 사람들도 결국 무당놀음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국에서 강한 귀신이 최영 장군 귀신이랍니다. 최영장군 귀신을 모시고 있는 무당이 잡귀들을 물러가라고 하면 잡귀들이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한동안은 괜찮을지 모르지요. 그런데 조금 있으면 최영 장군 귀신이 그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럼 더 강한 귀신을 불러와야 합니다. 최영 장군보다 강한 귀신이 강감찬 장군 귀신이랍니다. 그럼 강감찬 장군 귀신을 모시고 있는 무당이 최영 장군 귀신을 내쫓는 것입니다.
그럼 한동안 잠잠합니다. 그러다가 강감찬 장군 귀신이 또 괴롭히면 더 강한 귀신을 불러와야 하는데, 한국에는 없어서 중국 관우 귀신을 모시고 있는 무당을 불러와야 합니다. 그럼 잠잠해지는가 하다가 또 괴롭힙니다. 어떻습니까? 그 사람의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까? 악화되고 있습니까? 계속 귀신과 함께 해야 합니다. 제가 재미있게 이야기했지만, 무당의 이론은 논리적으로 허술하고, 말이 안되는 겁니다. 같은 귀신끼리 싸우면 그 귀신의 나라가 서겠습니까? 귀신끼리 싸울 리도 없거니와 귀신이 붙어 있는데 그 사람의 형편이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시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불러서 귀신을 내쫓는다”고 말합니다. 무당이론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논리에서 허점을 단번에 짚어 내십니다.
“귀신이 서로 내쫓으면 같은 나라끼리 분쟁하는 것인데, 그러면 귀신의 나라가 서겠느냐? 그럼 너희들도 귀신을 힘입어서 귀신을 내쫓느냐? 더 강한 힘과 권세를 가지신 성령을 힘입어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겠느냐?(마12:26-28)” 귀신을 내 쫓으려면 적어도 귀신보다 강하고, 귀신과는 반대편에 있는 성령을 힘입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실 때 귀신들은 반항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군대 귀신이 돼지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하면서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나이까?(마8:29)”라고 묻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종말에 자신들을 지옥 불에 멸하실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망할 것을 알고 있고, 망할 것이 분명한 귀신들에게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묻겠다는 것입니까?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물어서 무슨 이익을 얻겠습니까? 몰상식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무당을 찾는 이유는 미래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무당이 미래를 맞출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미래를 조금 일찍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습니까? 사울 왕이 엔돌의 여인 무당에게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 귀신을 불러 왔습니다. 그러자 사무엘 귀신이 사울의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사울의 종말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미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당이 다시 반복하는 것일 뿐입니다.
무당이 불러낸 사무엘은 실재로 천국에서 온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 분명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사무엘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귀신들의 장난입니다. 귀신은 이렇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이 아니라 천사겠지요.
언제까지 귀신에게 물을 것입니까? 언제까지 귀신놀음에 돈을 바치고, 시간과 열정을 허비할 것입니까? 가나안 사람들도 결국 무당놀음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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