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산 역사인 원로 방지일 목사가 17일 뉴욕효신교회를 방문, 주일예배 설교를 전했다. 효신교회는 방지일 목사의 사촌동생인 방지각 목사가 원로로 있는 교회이기도 하다. 방지일 목사는 10시15분에 시작되는 3부 주일예배에서 30분간 설교했다.
이날 방지일 목사는 전혀 노쇠함이 느껴지지 않는 힘있는 목소리로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이날 설교 제목은 ‘먼저 사랑해 주심’으로 본문은 요한일서 4장 10절이었다. 다음은 방지일 목사 설교 주요 내용.
‘먼저 사랑해 주심’(요한일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자기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다. 오늘 요한일서 4장10절 말씀을 다 외웠으면 좋겠다. 중국 사람들 중에 시편을 다 외우는 사람도 있고 신구약 성경을 다 외우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길선주 목사가 요한계시록을 1만독을 했다. 그 때의 설교를 녹음해서 지금 틀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다.
동양 3국 한중일 중 한국이 4천만명 중에 1천만 명이 믿는다. 이만큼 더 되기도 한다고 하고 덜 되기도 한다고 하지만 어쨌든 한국 사회는 믿는 사람이 많다. 일본은 100명 중 1명도 안된다. 참으로 유감이다. 중국은 제가 있을 때만해도 3~4% 가 믿었지만 지금은 1억 명이 믿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이 통계를 다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은 얼마나 믿던지 참 성경적이고 깊게 믿는다.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화목제물은 감사의 제물이고, 속죄제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고, 속건제는 한국에서 깊이 보지 않는데 이것은 속죄+보상이다. 내가 영등포교회 20년 목회를 하면서 속건제를 때를 따라 말했는데 처음에는 잘 받아들이지 않더니 나중에 가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속건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저는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거의 하루 종일 부른다. 외국 가서도 이렇게 하루 종일 부른다. 어떤 장로님이 듣더니 하나님이 좋으시기만 한 분이냐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 엄하신 하나님 이렇게도 불러보자는 제의를 하더라. 물론 심판과 구원은 동시에 있는 것이다. 내가 죄를 고백하면 그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그것이 구원인데 거기에 앞서 심판이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오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이삭을 번제로 들리러 갈 때 사흘 길을 갔다고 했다.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는 기다리라고 했다. 나와 아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돌아온다고 했다. 하인들도 순종했다. 그리고 이삭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운다. 어린 이삭이 처음으로 짐을 지고 간다. 그 말씀을 볼 때도 주님 말씀이 기억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와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삭이 묵묵히 올라가다가 갑자기 이야기한다. 걱정을 하는데 장작을 가져가는데 손에 화로도 있지만 번제물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번제물을 가져와야 하지 않겠냐는 것인데 아브라함은 대답할 말이 없어서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다. ‘여호와 이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대답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랑이 여기 있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했고, 하나님이 먼저 택하신 것이다. 여호와 이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공중의 새도 들풀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가 늘 들었고 아멘이라고 하면서도 이 여호와 이레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가 있다.
구원에는 내 몫이 없다. 거저 주는 것이다. 누구에게 주는 것인가. 죄인에게 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구원에는 내 몫이 없다.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라는 것을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을 깊이 알아야 한다. 내 몫은 없다. 이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운 일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신 것이다.
요한복음을 몇 달을 봤는데 얼마나 찬란한 복음인지 모른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봤다. 요한복음 1장을 계속 보면 요한복음이 다 보인다. 요한복음을 다 보면 신약이 다 보인다. 몇 천번 읽으니 다 보인다. 요한복음이 다 볼려다보니 신구약이 다 보인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살았고 능력이 있어 좌우의 날 선 검보다 예리하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다.
나를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 복음이다. 이 구원에 내 몫은 없다. 나는 찬송가를 볼 때마다 나의 공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한다. 구원에는 공로가 없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사도바울의 말씀은 더 죄를 짓자는 말이 아니다. 기도하고 올라가니 2천배의 현미경으로 보니 죄가 보인다. 더 올라가니 2만 배의 현미경으로 보니 또 죄가 보인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을 때에는 죄가 없을 수 없다. 우리는 구원을 똑똑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죄를 말하면 싫어하는 성도가 있다. 왜 이렇게 자극을 주느냐는 것이다. 좀 편하게 교회를 다니고 싶다고 한다. 꼭 이렇게 찔러야 하느냐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죄를 씻으며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 화목제를 드리면 하나님이 마땅히 드시는 음식이 따로 있고 그 뒤에 제사장이 먹는 음식이 있다. 나머지 갈비는 제사장과 모든 백성에게 준다. 그 남은 것은 그대로 두지 않는다. 온 동네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에게 보내서 먹게 한다. 조지 뮬러의 빵 하나 놓고 기도하는 사진이 가정마다 다 있다. 조지 뮬러가 아무것도 없이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데 딱 시간이 되니까
사랑은 여기 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이 없다. 주님께 시집갔다는 수녀들, 나는 주님과 결혼했다는 신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성경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먼저 그가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의 내 몫은 없다. 이것은 분명하다.
내 생애에 어려움도 핍박도 당했지만 돌아보면 복음은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다. 나는 받기만 하는 것이었다. 보혜사 성령께서 하심으로 받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은 요한일서에도 그 증거가 나와 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가 독생자를 보내셔서 화목제로 보내셨음을 잊지 말고, 나의 공로를 주장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이날 방지일 목사는 전혀 노쇠함이 느껴지지 않는 힘있는 목소리로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이날 설교 제목은 ‘먼저 사랑해 주심’으로 본문은 요한일서 4장 10절이었다. 다음은 방지일 목사 설교 주요 내용.
‘먼저 사랑해 주심’(요한일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자기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다. 오늘 요한일서 4장10절 말씀을 다 외웠으면 좋겠다. 중국 사람들 중에 시편을 다 외우는 사람도 있고 신구약 성경을 다 외우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길선주 목사가 요한계시록을 1만독을 했다. 그 때의 설교를 녹음해서 지금 틀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다.
동양 3국 한중일 중 한국이 4천만명 중에 1천만 명이 믿는다. 이만큼 더 되기도 한다고 하고 덜 되기도 한다고 하지만 어쨌든 한국 사회는 믿는 사람이 많다. 일본은 100명 중 1명도 안된다. 참으로 유감이다. 중국은 제가 있을 때만해도 3~4% 가 믿었지만 지금은 1억 명이 믿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이 통계를 다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은 얼마나 믿던지 참 성경적이고 깊게 믿는다.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화목제물은 감사의 제물이고, 속죄제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고, 속건제는 한국에서 깊이 보지 않는데 이것은 속죄+보상이다. 내가 영등포교회 20년 목회를 하면서 속건제를 때를 따라 말했는데 처음에는 잘 받아들이지 않더니 나중에 가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속건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저는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거의 하루 종일 부른다. 외국 가서도 이렇게 하루 종일 부른다. 어떤 장로님이 듣더니 하나님이 좋으시기만 한 분이냐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 엄하신 하나님 이렇게도 불러보자는 제의를 하더라. 물론 심판과 구원은 동시에 있는 것이다. 내가 죄를 고백하면 그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그것이 구원인데 거기에 앞서 심판이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오셨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이삭을 번제로 들리러 갈 때 사흘 길을 갔다고 했다.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는 기다리라고 했다. 나와 아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돌아온다고 했다. 하인들도 순종했다. 그리고 이삭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운다. 어린 이삭이 처음으로 짐을 지고 간다. 그 말씀을 볼 때도 주님 말씀이 기억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와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삭이 묵묵히 올라가다가 갑자기 이야기한다. 걱정을 하는데 장작을 가져가는데 손에 화로도 있지만 번제물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번제물을 가져와야 하지 않겠냐는 것인데 아브라함은 대답할 말이 없어서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다. ‘여호와 이레’라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대답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랑이 여기 있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했고, 하나님이 먼저 택하신 것이다. 여호와 이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공중의 새도 들풀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가 늘 들었고 아멘이라고 하면서도 이 여호와 이레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가 있다.
구원에는 내 몫이 없다. 거저 주는 것이다. 누구에게 주는 것인가. 죄인에게 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구원에는 내 몫이 없다.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라는 것을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을 깊이 알아야 한다. 내 몫은 없다. 이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운 일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신 것이다.
요한복음을 몇 달을 봤는데 얼마나 찬란한 복음인지 모른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봤다. 요한복음 1장을 계속 보면 요한복음이 다 보인다. 요한복음을 다 보면 신약이 다 보인다. 몇 천번 읽으니 다 보인다. 요한복음이 다 볼려다보니 신구약이 다 보인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살았고 능력이 있어 좌우의 날 선 검보다 예리하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다.
나를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 복음이다. 이 구원에 내 몫은 없다. 나는 찬송가를 볼 때마다 나의 공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한다. 구원에는 공로가 없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사도바울의 말씀은 더 죄를 짓자는 말이 아니다. 기도하고 올라가니 2천배의 현미경으로 보니 죄가 보인다. 더 올라가니 2만 배의 현미경으로 보니 또 죄가 보인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을 때에는 죄가 없을 수 없다. 우리는 구원을 똑똑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죄를 말하면 싫어하는 성도가 있다. 왜 이렇게 자극을 주느냐는 것이다. 좀 편하게 교회를 다니고 싶다고 한다. 꼭 이렇게 찔러야 하느냐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죄를 씻으며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 화목제를 드리면 하나님이 마땅히 드시는 음식이 따로 있고 그 뒤에 제사장이 먹는 음식이 있다. 나머지 갈비는 제사장과 모든 백성에게 준다. 그 남은 것은 그대로 두지 않는다. 온 동네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에게 보내서 먹게 한다. 조지 뮬러의 빵 하나 놓고 기도하는 사진이 가정마다 다 있다. 조지 뮬러가 아무것도 없이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데 딱 시간이 되니까
사랑은 여기 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이 없다. 주님께 시집갔다는 수녀들, 나는 주님과 결혼했다는 신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성경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먼저 그가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의 내 몫은 없다. 이것은 분명하다.
내 생애에 어려움도 핍박도 당했지만 돌아보면 복음은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다. 나는 받기만 하는 것이었다. 보혜사 성령께서 하심으로 받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은 요한일서에도 그 증거가 나와 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가 독생자를 보내셔서 화목제로 보내셨음을 잊지 말고, 나의 공로를 주장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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