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90세인 김윤국 목사. 그의 책상에는 히브리어 성경과 각종 주석책들이 즐비하게 펼쳐져 있었다. 1950년 미국에 유학와 미국에서 목회자, 교수, 변호사로 활동했던 학자의 면모가 아직도 낡지 않았는지 그는 최근 구약 39권의 개요와 주요 줄거리를 정리한 ‘구약해석’의 초안을 완성하기도 했다.
“히브리어 성경을 정독하면서 옛날 공부한 것을 정리한 거에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지 모르겠지만….”
90년의 삶이 어찌 짧은 인터뷰에 담길 수 있을까? 대신 김 목사는 자신의 목회 여정과 삶을 그린 저서 ‘태평양을 건너며’를 지그시 건넸다. 이 책은 한 목회자의 여정이 한국 역사 흐름과 함께 잘 그려졌다는 평을 받으며 워싱턴주립대 동아시아 역사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온 김윤국 목사는 자신의 인생 여정을 담은 ‘태평양을 건너서’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 짓고 있다. “사람들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남들과 어울려 가며 역사를 이루는 동안, 그들 뒤에서 우주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역사가 과거사로 고정된 후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배후에서 사역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무신론자로 변하는 기독교인 보며 목사되기로 결심
그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해방 직후인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면서 공산당을 퍼뜨리고 신자들까지 무신론자로 변하는 모습을 목도하며 당시 교사로 제직하던 그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반공 사상을 교육하다가 공산 경찰에 붙들려 시베리아 소환을 기다리던 중 야간도주해 목숨을 구하기도 했었지요. 평양신학교 학생 시절엔 미-소 공동위원회 조직 이후 유엔 보호 아래 권리를 인정받아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하다 공산 경찰에 붙잡혀 1달 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4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을 탈출해 남한으로 가족과 함께 도망쳐 왔습니다.” 벌써 60년이 넘은 이야기. 오래돼 빛바랜 사진을 보여주는 듯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연구와 교육, 목회만을 위해 달려온 반세기
교수로 16년, 목회자로 18년. 그의 반세기는 연구와 교육, 그리고 목회 3가지에 전심전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 대구사범대학 영문학과, 프린스턴신학대학원 신학석사와 박사를 거쳐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마샬 법과대학 법학박사를 지낸 별난 이력의 목회자. 그는 195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 목사 안수를 받고 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부교수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이민와 미국교회인 크레어톤 제일장로교회와 임마누엘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이후 애쉬랜드 대학교 및 신학대학원 종교학 교수로 활동, 78년 오하이오주 변호사 고시에 합격하고 이후 시카고 한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했으며 서울 영락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또 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강사 등으로도 활약했다.
“목회는 힘든 것이 자기 시간이 많이 없어요. 모든 것은 다 자기 교인들에게 할애해야 하고, 매 주일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목회자로서 생활의 본을 보여야 한다는 면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반면 교수는 가르치는 시간 외에는 자기 시간이 많고, 같은 내용을 준비해서 다른 학생들에게 가르치니까 쉬운 면이 있지요.”
그는 개인적으로 교수를 더 좋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남겨진 흔적은 교수로 생활한 16년보다 18년 목회 인생에서 훨씬 깊게 새겨졌다고 했다.
“교수로서 인간에게 주는 도움은 극히 제한이 돼 있거든요. 아직까지 교수님의 설교를 듣고 인생이 변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후에 당시 그 교회를 섬겼다면서 저녁을 대접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의 인생이 그 때 변화됐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보람을 느끼지요. 목회 만큼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 교회 담임… 이민 오는 한인 돕기 위해 변호사 시험쳐
김 목사는 1963년부터 1970년까지 미국교회 목회자로 사역했다. 한국 사람이란 미국에도 찾아보기 힘들던 60년 대였지만 미국 교회에서는 그의 첫 설교를 듣고 만장일치로 그를 담임 목사로 받아들였다. 한가지 에피소드는 담임 목사를 한 지 3달이 지난 후 고백할 죄가 있다면서 노인 2분이 김 목사를 찾아왔다. 도대체 그 죄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No’를 써서 냈다는 것이다. 대표 장로가 그 두 분의 표가 반대로 나왔으나 만장일치로 말하겠다고 해서 그리 통보를 한 것인데, 그 때 우리는 ‘중국 사람에게 우리 장례식을 맡길 수 없다’며 ‘반대’를 써서 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이 이야기를 하며 미소를 띠었다. 한국인을 알지도 못하던 때, 그는 미국 목회를 하며 교회를 성공적으로 일궈나갔다.
“나는 걱정이 하나 있어요. 한국교회에 목회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후배들이 미국에서 목회하려면 미국 사람을 위해서 목회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한인들은 적은데 너무 한인 목사가 많아요.”
그러면서 김 목사는 미국 교회 사역의 경험을 나눠줬다.
“미국교회는 심방이 없기 때문에 심방을 가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목사에 대한 마음의 대우가 좋고, 인간적으로 대하는 부분이 좋습니다. 한인교회도 그렇지만요.”
그는 목사가 직업으로 전락하는 것이 우려스럽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으면 바울 처럼 자비량 선교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7년 간 미국교회 목회 후 그는 애쉬랜드 대학교 및 신학대학원 종교학 교수로 제직했다.
남다른 김 목사의 학구열과 봉사정신은 그가 57세의 나이에 미국 변호사가 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갓 이민 온 한국 여성이 법적 지식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본 김 목사의 아들이 “아버지 같은 분이 법관이 되면 많은 교포를 도울텐데…”라고 지나가면서 한 말에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한인들은 점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다 생각했어요. 막상 합격을 했지만 변호사 개업은 하지 않았습니다. 한인들을 많이 만나서 도와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한인교회로 가게 됐지요.”
한인들을 돕기 위해 찾아간 곳이 바로 시카고한미장로교회였다. 실제로 변호사 활동은 하지 않았다. 목회자로서 한인들을 대변해주며 미국인들과 말싸움 아닌 싸움을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상담을 해주고 알맞은 변호사와 연결해 주는 일을 주로 감당했다.
1985년에는 서울 영락교회 당회장으로 청빙받아 서울로 들어갔지만 건강의 악화로 3년 만에 당회장 직을 조기 은퇴하게 된다.
인간의 지혜 의지할 수 없어… 다만 찬송받으실 이는 하나님 한 분
김 목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하나님은 자상하신 분이고 보이지도 않고 말씀도 들리지 않으시지만 의지하고 살아갈 분이지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 목사는 지난 90세 생일에 자녀, 손자, 증손자까지 34명이 모인 자리에서 꼭 3가지를 말해줬다고 했다.
“첫째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것이에요. 어떤 형편이든지 보이지도 않고 말씀이 들리지도 않지만 우리의 생명의 주가 하나님인 줄 알아서 늘 그 분을 의지하고 살아가라. 둘째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즉 선택을 하라는 말인데 때로는 내 욕심을 따라가며 욕심과 반대되는 길은 원치 않는 길인 것 같아도 늘 좋은 것, 선한 길을 좇아 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실수한다. 김 목사는 90 인생에서 깨달은 진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고달픈 삶 속에서 갈피를 잃고 허덕이며 이루어 놓은 내 역사를 돌이켜 보며,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깨닫고 바울처럼 절규하게 되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언은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 1:17) 하는 것 뿐이다”라고.
“히브리어 성경을 정독하면서 옛날 공부한 것을 정리한 거에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지 모르겠지만….”
90년의 삶이 어찌 짧은 인터뷰에 담길 수 있을까? 대신 김 목사는 자신의 목회 여정과 삶을 그린 저서 ‘태평양을 건너며’를 지그시 건넸다. 이 책은 한 목회자의 여정이 한국 역사 흐름과 함께 잘 그려졌다는 평을 받으며 워싱턴주립대 동아시아 역사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온 김윤국 목사는 자신의 인생 여정을 담은 ‘태평양을 건너서’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 짓고 있다. “사람들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남들과 어울려 가며 역사를 이루는 동안, 그들 뒤에서 우주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역사가 과거사로 고정된 후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배후에서 사역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무신론자로 변하는 기독교인 보며 목사되기로 결심
그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해방 직후인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면서 공산당을 퍼뜨리고 신자들까지 무신론자로 변하는 모습을 목도하며 당시 교사로 제직하던 그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반공 사상을 교육하다가 공산 경찰에 붙들려 시베리아 소환을 기다리던 중 야간도주해 목숨을 구하기도 했었지요. 평양신학교 학생 시절엔 미-소 공동위원회 조직 이후 유엔 보호 아래 권리를 인정받아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하다 공산 경찰에 붙잡혀 1달 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4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을 탈출해 남한으로 가족과 함께 도망쳐 왔습니다.” 벌써 60년이 넘은 이야기. 오래돼 빛바랜 사진을 보여주는 듯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연구와 교육, 목회만을 위해 달려온 반세기
교수로 16년, 목회자로 18년. 그의 반세기는 연구와 교육, 그리고 목회 3가지에 전심전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 대구사범대학 영문학과, 프린스턴신학대학원 신학석사와 박사를 거쳐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마샬 법과대학 법학박사를 지낸 별난 이력의 목회자. 그는 195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 목사 안수를 받고 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부교수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이민와 미국교회인 크레어톤 제일장로교회와 임마누엘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이후 애쉬랜드 대학교 및 신학대학원 종교학 교수로 활동, 78년 오하이오주 변호사 고시에 합격하고 이후 시카고 한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했으며 서울 영락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또 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강사 등으로도 활약했다.
“목회는 힘든 것이 자기 시간이 많이 없어요. 모든 것은 다 자기 교인들에게 할애해야 하고, 매 주일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목회자로서 생활의 본을 보여야 한다는 면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반면 교수는 가르치는 시간 외에는 자기 시간이 많고, 같은 내용을 준비해서 다른 학생들에게 가르치니까 쉬운 면이 있지요.”
그는 개인적으로 교수를 더 좋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남겨진 흔적은 교수로 생활한 16년보다 18년 목회 인생에서 훨씬 깊게 새겨졌다고 했다.
“교수로서 인간에게 주는 도움은 극히 제한이 돼 있거든요. 아직까지 교수님의 설교를 듣고 인생이 변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후에 당시 그 교회를 섬겼다면서 저녁을 대접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의 인생이 그 때 변화됐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보람을 느끼지요. 목회 만큼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 교회 담임… 이민 오는 한인 돕기 위해 변호사 시험쳐
김 목사는 1963년부터 1970년까지 미국교회 목회자로 사역했다. 한국 사람이란 미국에도 찾아보기 힘들던 60년 대였지만 미국 교회에서는 그의 첫 설교를 듣고 만장일치로 그를 담임 목사로 받아들였다. 한가지 에피소드는 담임 목사를 한 지 3달이 지난 후 고백할 죄가 있다면서 노인 2분이 김 목사를 찾아왔다. 도대체 그 죄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No’를 써서 냈다는 것이다. 대표 장로가 그 두 분의 표가 반대로 나왔으나 만장일치로 말하겠다고 해서 그리 통보를 한 것인데, 그 때 우리는 ‘중국 사람에게 우리 장례식을 맡길 수 없다’며 ‘반대’를 써서 냈다는 것이다. 김 목사는 이 이야기를 하며 미소를 띠었다. 한국인을 알지도 못하던 때, 그는 미국 목회를 하며 교회를 성공적으로 일궈나갔다.
“나는 걱정이 하나 있어요. 한국교회에 목회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후배들이 미국에서 목회하려면 미국 사람을 위해서 목회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한인들은 적은데 너무 한인 목사가 많아요.”
그러면서 김 목사는 미국 교회 사역의 경험을 나눠줬다.
“미국교회는 심방이 없기 때문에 심방을 가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목사에 대한 마음의 대우가 좋고, 인간적으로 대하는 부분이 좋습니다. 한인교회도 그렇지만요.”
그는 목사가 직업으로 전락하는 것이 우려스럽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으면 바울 처럼 자비량 선교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7년 간 미국교회 목회 후 그는 애쉬랜드 대학교 및 신학대학원 종교학 교수로 제직했다.
남다른 김 목사의 학구열과 봉사정신은 그가 57세의 나이에 미국 변호사가 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갓 이민 온 한국 여성이 법적 지식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본 김 목사의 아들이 “아버지 같은 분이 법관이 되면 많은 교포를 도울텐데…”라고 지나가면서 한 말에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한인들은 점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다 생각했어요. 막상 합격을 했지만 변호사 개업은 하지 않았습니다. 한인들을 많이 만나서 도와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한인교회로 가게 됐지요.”
한인들을 돕기 위해 찾아간 곳이 바로 시카고한미장로교회였다. 실제로 변호사 활동은 하지 않았다. 목회자로서 한인들을 대변해주며 미국인들과 말싸움 아닌 싸움을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상담을 해주고 알맞은 변호사와 연결해 주는 일을 주로 감당했다.
1985년에는 서울 영락교회 당회장으로 청빙받아 서울로 들어갔지만 건강의 악화로 3년 만에 당회장 직을 조기 은퇴하게 된다.
인간의 지혜 의지할 수 없어… 다만 찬송받으실 이는 하나님 한 분
김 목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하나님은 자상하신 분이고 보이지도 않고 말씀도 들리지 않으시지만 의지하고 살아갈 분이지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 목사는 지난 90세 생일에 자녀, 손자, 증손자까지 34명이 모인 자리에서 꼭 3가지를 말해줬다고 했다.
“첫째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것이에요. 어떤 형편이든지 보이지도 않고 말씀이 들리지도 않지만 우리의 생명의 주가 하나님인 줄 알아서 늘 그 분을 의지하고 살아가라. 둘째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즉 선택을 하라는 말인데 때로는 내 욕심을 따라가며 욕심과 반대되는 길은 원치 않는 길인 것 같아도 늘 좋은 것, 선한 길을 좇아 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실수한다. 김 목사는 90 인생에서 깨달은 진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고달픈 삶 속에서 갈피를 잃고 허덕이며 이루어 놓은 내 역사를 돌이켜 보며,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깨닫고 바울처럼 절규하게 되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언은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 1:17) 하는 것 뿐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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