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콩은 남의 콩이 더 커보이고 자식은 내 자식이 더 커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내가 주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객관적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동안 몇 번 우리 집 뒷마당에 관하여 설교와 칼럼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일 년에 두 차례씩 굵은 열매를 무수히 맺는 오렌지나무, 늘 제 아내와 열매 숫자에 대하여 언쟁을 하는 단감나무, 조금 과장하면 작은 사과만큼 크게 열리는 대추나무, 지난 1년동안 식탁에 열매를 제공해 온 아보카도나무, 그리고 작년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매실나무와 레몬나무, 특별히 돌보지도 않지만 모두 건강하게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선물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집을 방문하신 집사님이 뒷마당을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는 자랑스럽게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께서 “에고, 나는 목사님이 하도 자랑하셔서 큰 정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쬐그마한 마당이예요”하며 실망스런 눈길로 쳐다 보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렌지나무를 제외하고는 모두 키가 작은 나무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동안 제가 너무 과장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 머리 속에 거대한 과목이 울창한 정원을 그려 드렸던것 같습니다.

목회자는 자주 그런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제 눈에는 우리집 뒷마당이 최고의 과수원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왜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일까?’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오렌지나무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가 심고 길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큰 오렌지 나무보다 형편없이 허실해 보이는 감나무를 더 좋아합니다. 그것도 값이 싼, 겨우 새끼 손가락 굵기의 묘목을 심어서 그만큼 자랐으니까요. 금년에도 최소한 5백개 이상은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도 이처럼 주관적입니다. 그의 아들의 피로 값주고 사신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누구와 비교하지 않으시고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사랑받을만한 일을 해드리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사랑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고난 주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주간’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