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이 찌른 창에 심장이 터져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가장 암울하기만 한 순간입니다. 모든 분위기는 살벌하고 조심스럽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나타났습니다.

누구에게나 절망과 부정과 비탄의 상징일 뿐인 시체를 치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은 시체는 계속 매달아 놓고 새들이 시신을 쪼아 먹도록 하는 로마의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로마 총독에게 가서 유대인의 율법을 따라 안식일 전에 시체를 치우기 위해 사형수의 시체를 요구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의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예비해 놓았던 ‘새 무덤’에 시신을 모시고 가서 니고데모와 함께 값 비싼 향품과 세마포 옷으로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러 드렸습니다. 나타나야 할 때 나타나는 이것이 참된 제자의 모습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그림자 같이 따르는 멋진 호위병 같은 사람은 잘 안 보이는 곳에 있지만 그러나 나타나야 할 때 잘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처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훌륭한 제자인 것은 나타나야 할 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타나야 할 때 나타나야 하는 이 문제에 대해 3가지 반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1)나타날 때가 아닌데 나섰다가 오히려 화를 당한 기억이 있어서 주저합니다. 2)집중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야 할 때를 잘 몰라서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3)막상 나타나야 할 때를 알아도 상황을 보며 겁이 나고 두려워서 잠잠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의 참 제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타나야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평소의 삶에 충성되어야 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 말은 그가 중요한 사람이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마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막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눅23: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그는 신앙과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리더였고, 선하고 의로운 부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놀라운 평가를 받고 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교회가 맥없이 휘둘림을 당하곤 하는 것은 나타나야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제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위해 뜨거운 가슴으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에 흥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출타라도 하신 것처럼 너무 경솔하고 가볍습니다. 신앙의 영적 깊이가 너무 낮고 신앙인의 신의가 너무 천박합니다. 다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흥분하는 척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결국 자기 이익, 기껏해야 자기 가족이나 친구나 아는 사람의 이익을 위해 흥분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예수님을 위해, 교회와 힘없고 연약한 이웃들을 위해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고 헌신할 수 있습니까? 입바른 소리는 쉽게 하면서 정말 내 것을 먼저 희생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역사는 나타나야 할 때 나타나는 충성된 사람을 통해 증거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나타나고, 무엇에 흥분하고 있습니까?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