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온보육원 박국자 원장(좌측)과 최윤권 목사(우측) ⓒ정상우 기자 | |
최윤권 목사는 “성서로 돌아가자, 교파도 헌장도 내던지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으로 1965년 서울기독교대학교를 설립하고, 한국기독교원로목사회 회장과 국제 키와니스클럽 한국총재를 역임했으며, 40년간 극동방송 “이 형과 더불어”와 “복음의 메아리”라는 아침예배 설교를 맡아왔다.
특히 극동방송에서 송출되는 설교는 북한 주민들에게도 라디오로 전해져, 암암리에 그의 설교를 챙겨듣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 설교는 5시 10분부터 방송된다. 북한 주민들은 보통 6시부터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그 시간대가 가장 듣기 편한 시간대라고 한다. 북한 주민들은 건전지가 없어서 극동방송측에서 보내준, 자가발전이 가능한 라디오로 방송을 듣는다.
최윤권 목사의 부친은 故 최상현 목사로,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 문학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생애 마지막 날까지 목회와 신학교 교수직에 전념하다, 6•25동란 때 납북돼 소식이 끊겼다. 최윤권 목사는 부친을 통해 애국심과 신학생 양성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고, 이산가족들과 탈북자들의 사정이 남 일 같지가 않다. 전쟁통에 고아가 된 아이들을 거두다가, 오늘날 79명의 아이를 거느린 ‘지온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고아와 혼혈아들에 대한 편견과 성장 환경 개선됐으면
국경서 만난 북한 사람, 눈물만 가득한 채 하는 말이…
-지온보육원이 세워진 배경을 듣고 싶다.
“마포구 도원동은 아주 빈민촌이었다. 그래서 굶어죽는 아이가 많았다. ‘갔어요’ 하면 끝이었다. 그곳에 천막교회로 첫 목회를 했다. 하루는 주일학교 중에 걸어 들어오는 학생한테서 술 냄새가 풍겼다. ‘술 마셨느냐’며 혼내려 하는데 그 애 대답이 ‘너무 배고파 술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아침식사로 먹었다’고 했다. 사연이 이렇다 보니 굶어서 다 죽어가는 아이 하나 둘 데려와 살기 시작했고, 아이가 많이 모여 1966년에 보육원을 개원했다. 그리고 1975년 강서구 개화동에 지금의 지온보육원을 신축•이전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어떤 때 가장 보람을 느끼나?
“1965년 서울기독대학교를 설립해 내가 돌보던 아이들을 신학생으로 입학시켰다. 그 때의 아이들은 현재 50세가 넘었고, 서울기독대학교 교수가 됐다. 목사가 된 아이들도 13명이다. 여자아이들은 사회복지사가 많이 됐다. 내게는 즐거움이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쉽지 않다. 크면 클수록 방황할 수도 있고……. 어떻게 힘을 주느냐가 숙제다. 우선 고아는 미래 보장이 안 돼 있다. 우리 사회는 고아에 대한 편견이 있다. 입사준비할 때 면접시험까지 통과했는데 ‘부모님 안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전화로 ‘나오지 말라’고 했다는 뼈아픈 경험이 있다. 그런 일이 자주 있다. 고아에 대한 인식이 개선됐으면 좋겠다. 미국은 동등하다. 그곳에서 한국인 혼혈아가 성공한 경우가 많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는 혼혈아의 성장환경 자체가 힘들다.”
▲지온보육원생들이 만든 작품. ⓒ정상우 기자 | |
▲학생들의 꿈을 적은 사과나무. ⓒ정상우 기자 | |
-요즘엔 어떤 경로로 아이들이 이곳에 오나?
“고아 혹은 가정이 파괴돼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 핍박받는 아이들도 더러 온다. 탈북한 여성들은 중국에서 자립할 여건이 안 돼, 중국인과 결혼하고 임신한 채 한국에 올 때도 있다. 서울시 아동보호소에서 연락이 왔다. 엄마는 한국에 오는 과정에서 정신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아이만 남겨진 상태였다. 아이를 보는데 희한하게도 웃지도 울지도 않고 표정이 없었다. 아이라면 낯선 환경과 배고픔에 울어야 하는데 울지 않았다. 이곳에 데려와 지내면서 이제야 겨우 웃기 시작한다.”
-부친 고 최상현 목사님이 훌륭한 독립운동가이자, 목회자셨다.
“부친은 남포 출신으로 기독교계와 독립운동, 특히 기독교 문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삼승학교, 숭실중학교 및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1회 졸업)를 나와 조교수 및 동문회장으로 후배 조병옥 박사, 이윤영(대한민국 초대 사회부장관) 씨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며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번역하다 발각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감리교신학대학을 마치고 아현감리교회, 체부동교회, 동대문교회 등에서 목회를 하면서 최남선•방인근 등과 더불어 문학활동을 했다. 1938년 돈암동 그리스도의교회를 설립했고 신학교에서 강의에 주력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선교사들이 축출되고 교회가 신사참배를 강요당할 때 거절하며 지하로 들어갔다. 광복 후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은 선친으로 하여금 다시 모든 관직을 버리고 목회와 신학교 교수직에 전념하게 했다. 6.25 동란 때 가족들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하다가 공산당에 납치돼 9.28 수복 때 북쪽으로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 공산당에게 끌려가는 중에 아버지께서 ‘이 아이를 돌봐주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을 누이가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와 보면 9남매가 모두 목사•장로•권사로 주님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께서 부친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그게 정말 감사하다.
그 후 아버지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시체들을 얼마나 뒤져봤는지 모른다. 동두천•연천 등지에 시체만 무더기였다. 찾다 보니 피난민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고, 길가에 버려진 아이들을 많이 봤다. 우리 가족이 데려와 한때는 150명이 넘은 적도 있다. 아버지를 찾다가 지온보육원을 세우게 된 것이기도 하다.”
-극동방송 아침설교를 40년간 해오셨다. 그것이 북한 복음전파에 힘을 싣고 있다고 하는데.
“‘성서로 돌아가자, 교파도 헌장도 내던지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이 내 목회의 방향이고 이를 위해 설교방송을 시작했다. 이 운동만이 교회 단합의 지름길이요, 한국교회의 소망이다. ‘성경에 있는 것만 말하고 성경에 없는 것은 잠잠하자’ 혹은 ‘기본적인 것에는 통일이요, 비기본적인 것에는 자유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자’를 푯대로 하는 환원운동이다.”
-고 최상현 목사님이 하신 환원운동을 이어받은 것인가?
“그렇다. 선친에 이어 2대째 지난 40여 년간 대학강단•설교•방송•신문•잡지•저서 등을 통해 끊임없이 전하고 있다. 미국 5만 교회, 그리고 우리나라 5백 교회에서 이 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한다.”
-북한선교는 어떻게 하고 있나?
“중국선교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다. 그 가운데 2명이 국경지대에서 ‘한겨레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선교하고 있고 내가 총재로, 유현목 목사가 회장으로 수고하고 있다. 지하교회 성도와도 만나왔다. 공산당의 감시가 얼마나 심한지 모른다. 그래도 청년들은 신앙을 지키려고 바닥에 누워 예배를 드린다. 나도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곳에서도)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는데 현재 11명이 있다. 거기서 자란 청년들은 믿음이 좋아 중국 대학 내에 모임을 만들어 기도 혹은 전도활동을 하고 각자 알아서 신앙을 지키고 있다. 대학 내에서 감시와 불이익을 줄 때도 있지만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 요즘은 국경지대는 전기철조망 등으로 점점 넘어오기가 힘들어졌다.
아직은 미비하게 진행되고 있는 남북교역 물품 반출, 반입 과정 중에 북한상품검사기관을 통과할 때 어떤 할머니는 사탕을 성경종이에 말아 넣어 통과한다. 경계지역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데, 북한에 들어가면 다시는 못 보기 때문에 한 자라도 더 기억하기 위함이다. 밤새도록 성경공부한다. 쉬라고 해도 안 쉬고 눈이 빨개지도록 본다. 뇌와 눈에 새기려고 한단다. 눈물 날 때가 참 많았다. 북한에서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은 상상도 못한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워했다. 눈물만 가득한 채 ‘아버지’라고 한다.
(어떤 북한인을) 경계선에서 헤어진 후 10년 만에 만났다. 그런데 얼굴이 죽어 있었다. 돌아간 후 고문당한 것이다. 전기고문을 머리에 받아 관자놀이가 까맣게 탔더라. 그래도 기독인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최윤권 목사의 보물이라고 밝힌 예수조각상. 그가 만난 북한 사람이 옛날에 봤었던 예수상을 기억을 더듬어 조각했다고 한다. ⓒ정상우 기자 | |
-서울기독학교, 지온보육원, 한겨레선교회까지 많은 사역으로 복음전파를 하시는데 소망은 무엇인가.
“서울기독대에도 탈북자와 외국인을 최대한 받으려 애쓴다. 공산주의 국가를 살릴 자들이다. 아시아복음선교회도 만들어 아프리카, 중국, 미얀마, 월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선교사들을 돕는다. 복음 전파가 어려운 나라 선교 전략은 우선 기독교 대학에 입학하는 것인데, 현실은 어렵다. 합격을 위해 토플 550점을 받으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기독교 복음 전파는 한 시가 급하다.
우리 지온보육원 표어가 ‘배워야 한다. 도와야 산다. 믿어야 넘어지지 않는다.’이다. 아이들이 이해할 만한 말로 선택했다. 내 소망은 아이들이 전부 사회복지사,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실제 이곳 출신 아이가 어린이집 원장이 된 경우도 많다. 또 앞서 말했듯 교수, 목회자도 많다. 아이들이 모두 기독 봉사자들이 되어 천국 만드는 일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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