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조진혜 씨(25)는 어머니와 여동생 조은혜 씨와 함께 2007년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미국으로 오기까지 총 4번의 강제 북송을 당했고, 마지막에는 북한에서 총살형까지 선고받았지만 윤요한 목사가 보낸 성금으로 극적으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첫 탈북시 진혜 씨의 나이는 10살이었습니다. 약할대로 약해진 몸을 이끌고 탈북을 결심한 어머니는 진혜 씨와 은혜 씨를 데리고 가는 것만으로도 벅찼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가장 어린 남동생 국철이를 이웃집에 맡겨두게 되었습니다. 바짓 가랑이를 붙들며 애원하는 국철이에게 ‘옥수수 떡’을 쥐어주며 5일 만 기다리면 데리고 오겠다고 당부했지요. 하지만 중국으로 넘어온 후 예상치 못한 홍수로 건너갈 수 없게 된 가족은 어머니 오기만 기다릴 국철이 생각에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결국 남동생 국철이는 이웃집에서 쫓겨나 갈대밭에서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영화같은 이야기. 풍족한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 지금도 북한과 북 접경 지역에서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이야기입니다.

조진혜 씨의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배고픔, 생명을 건 선택

함경북도 무산, 우리 식구는 원래 8명이었다. 외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언니, 나, 여동생, 남동생 국철이와 막내 국범이까지.

북한은 96년부터 배급 상태가 악화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저 할머니랑 같이 산에 가서 나물을 뜯어오는 것뿐이었다.

97년 우리 가족은 굶어죽기 직전까지 치달았다. 물만 마신지 한달 되니까 일어나지도 못하고 식구 8명이 꼼짝 못하고 다 누워만 있었다.

“진혜야 배고프니?”아버지가 물었다. “예, 아버지” 힘 없이 대답하는 나를 듣고,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셨다. 그리고는 나무 패는 손도끼를 허리춤에 차고 나가셨다.

그날 밤 12시까지 아버지가 오시지 않아 자지 않고 기다렸다.

한 밤 중 아버지는 한 배낭 가득 고기를 넣어가지고 돌아오셨다. 나라 농장에서 방목하는 10마리 소 중에 아버지가 새끼 한 마리를 훔친 것이다. 북한에서는 소 한마리를 죽이면 사람 죽인 것과 똑같이 벌을 준다. 가족을 살리려고 아버지가 목숨을 내놓고 소를 잡은 것이다.

아버지는 “소고기 잡아먹었다는 거 알려지면 아버지 없어지는 것이다. 동생들하고도 다 비밀이다.” 며 몇 번 언질을 주었다.

소고기를 다 먹고 먹을게 없어서 가죽을 가마에 몇 일을 삶았다. 삶으니까 소 가죽이 묵처럼 됐다. 큰 통뼈도 몇 날 몇 일을 고우니까 뼈가 물렁물렁해져 그 뼈를 다 먹었다. 뼈는 먹을 때는 고소하고 맛있는데, 뒤가 굳어 가지고, 온 가족이 변비가 심하게 걸렸었다.

# 아버지의 죽음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사라지셨다. 중국에 가신 것이다. 고향이 중국인 아버지는 형님 한 분이 중국에 살아계셔서 때때마다 식량을 얻어가지고 오셨다. 그런 생활이 계속될 때쯤, 어머니와 언니가 식량을 얻으러 시장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아버지랑 같이 시장으로 향했다.

마침 집에 있던 풋콩을 옥수수로 바꿔올 겸, 떠난 길이었다.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먼 길을 걸어본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는 노래도 듣고, 따뜻한 등에 업혀도 봤다.

시장에 도착해, 아버지는 콩을 팔아야 되는데, 멀뚱히 서서 어쩔줄 몰라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꼬마였던 내가 선수를 쳤다. 아줌마들 한테가서 풋콩 한 자루를 흥정해서 옥수수를 받아서 온 것이다. 그런 나를 보고 아버지는 말없이 우셨다. 그 때는 “왜 우시지” 하고 지나갔는데, 지금은 9살 짜리가 장사를 할 줄 알고, 흥정도 할 줄 아니까 아버지가 너무 가슴아팠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날 장마당 정문에서 아버지가 체포됐다. 중국에 다녀오신 것을 보위부가 알아차린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안전부(파출소)에 들어가니 이미 언니와 어머니는 체포돼 있었다.

나는 감옥에 잡혀 있으면서 너무 무서워 막 떨었다. 아버지는 감이 있었는지 나에게 노래 하나를 배우라고 했다. 봄이 되면 계속 우는 “소쩍새”라는 노래였다. 노래 내용은 아버지 없이 홀로 계신 어머니를 돌봐야 되고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 안되서 경찰이 옥수수 배낭을 갖고 가야 되지 않느냐고 나를 끌고 나왔다. 밖에서는 이미 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몇달 후 어머니는 풀려났지만 아버지는 끝내 풀려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후 연사에서 무산까지 후송 도중에 굶어 돌아가셨다고 같이 기차에 타고 있었다는 북한 사람이 알려줬다. 하지만 당원이었던 아버지 직장에서 날아온 통지서에는 아버지가 후송 도중 굶어 돌아 가신 것을 속이고 탈출을 시도해 쏴 죽였다고 기록돼 있었다.

# 탈북,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

그 일 후에는 마을길 지나가는 것도 힘들었다. 지나가기만 해도 ‘나라 배반자’라며 돌총을 쏘고, 때리고 놀렸다. 마을 사람에게 외면 당해 소금 하나 얻어 먹기도 힘들었다. 어머니는 그 때쯤 기다리시던 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해산했고, 76세인 할머니와 10살 되는 내가 천을 자르는 가위로 태줄을 자르며 어머니의 해산을 도왔다.

어머니는 해산 후 먹을 게 없어 끓는 물만 마시고 있었다. 배고픔을 참으려고 배낭끈으로 바짝 배를 옭아매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언니가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해산한 지 일주일 만에 언니를 찾으러 나갔다. 180리가 되는 길을 밥도 못드신 상태에서 걸어내려갔다 돌아왔다. 다시 언니를 어디서 봤다는 소식을 들어 다시 내려가서 찾았지만 결국 못찾고 돌아오셨다. 그 사이, 내가 돌보던 막내는 어머니의 젖을 애써 찾다가 내 품에서 굶어 죽었다. 태어난 지 2개월 만이다.

그 후에 외할머니도 삶은 감자 한알 드셔 보는 것을 원으로 남기시고 굶어 돌아가셨다. 또한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아이들 살아서 여기를 걸어나가는 것을 보고 싶으니 무덤을 산등성이에 해달라’는 거였다. 우리는 그 유언을 지키기 위해 할머니 돌아가시고, 몇일 만에 그 산등성이를 지나 탈북했다.

걸어서 마을을 내려왔는데 그 때 내 나이 10살이었다. 신발이 다 구멍나서 자꾸 돌이 들어와 너무 아팠다. 언니를 찾으러 중국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잘 걷지도 못하셨다. 동생 두 명을 다 데리고 가는 게 무리라는 판단으로 은혜만 같이 가고, 남동생 국철이는 아는 집에 맡기고 닷새만 있다가 데리러 오기로 하고 떠났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엄청 내려 강이 너무 불어서 건너갈 수가 없게된 것이다. 그 때 마침 김정일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북한도 형식적으로 주기적으로 선거를 치르는데, 그 때가 아마 처음으로 하는 선거라 더 엄하게 대했다. ‘이번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인민은 다 총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닷새만에 동생을 찾으러 갔다가 투표를 하고 돌아오려는 속셈이었는데, 비가 내리는 바람에 계획이 무산됐다.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한 참 후에야 아는 분한테 부탁해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아저씨는 혼자 돌아왔다. 동생은 이미 굶어서 죽었다고 했다. 그렇게 6형제 중에 다 죽고, 실종돼 나와 동생만 남았다.

탈북을 했지만, 진혜 씨는 알 수 없는 우울감에 시달렸습니다. 조선족 마을로 내려가면 ‘탈북자’‘내가 버린 헌 옷을 입는다’며 놀려댔지요. 북한에서도 중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그녀에게 ‘쉼’은 없었습니다.

진혜 씨는 주로 혼자 산에 올라가 염소를 먹이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중국말을 배워야 겠기에 천자문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 외우며 시간을 때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산을 내려가다 알 수 없는 피아노 연주를 듣고 주저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 우리에게 쉼은 없었다

탈북을 하고 중국에서 한 3년 째를 살 때, 조선족 한분이 저희를 굉장히 불쌍히 여기셔서 그 분과 같이 4년을 살았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굉장히 우울했다.

마을에 내려가면 탈북자라고 늘 마을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됐다. 마을에서도 탈북자들을 위해 옷을 몇 번 걷어 주었는데, 그것이 자기 자식들이 입다가 싫증난 옷이었기 때문에 어쩌다 그 옷을 입고 마을로 내려가면 동생 뻘 되는 애들에게도 “내가 버린 옷 쟤들이 입고 다닌다고” 늘 놀려댔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증상이 우울증이다. 말도 안하고 혼자 있거나, 비오면 산에 가서 가만히 앉아있거나 염소 방목하며 밭에 가서 김매고, 그렇게만 살았다. 그래도 중국말을 해야 되니까 산에 천자문을 갖고 가서 계속 그것을 외웠었다.

# 외톨이 진혜, 교회를 만나다

어느 날은 염소 끌고 산에 갔다 강에 가서 물먹이고 돌아오는데, 피아노 반주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 소리가 너무 좋아서 염소를 옆에 끌어매고 앉아서 멍하니 듣고 있는데, 노래 소리가 너무 슬퍼서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하고 앉아있었다. 그 안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와서 들어가자고 했다. 무서워서 싫다고 거절했다. 할머니는 “여기는 세상에서 버림 받고 상처받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무서울 게 전혀 없다. 따라와라”며 끌고 들어가다시피 함께 들어갔다.

내가 넋을 빼고 들었던 그 노래는 나중에 알고 보니 찬송가 “천부여 의지없어서” 였다. 조그만 시골 조선족교회에 성도가 한 20명 정도 있었다. 그렇게 처음 교회라는 곳을 가기 시작했다. 수요일 일요일 계속 다녔다. 어느날은 어머니 한테 들켰다. 어머니는 엄청 화내면서 “가지말라, 나쁜 사람들 사는 곳이다”고 했다. 나는 왜 나쁘다 하는 지 이해가 안돼 계속 갔다.

어느 날 교회를 가다가 또 들켰다. 어머니는 옛날에 북한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를 해줬다. “미국 선교사가 북한 평양에 배를 타고 왔는데 키도 크고 코가 뾰족하고 눈이 파란사람인데, 그렇게 악했다고 했다. 사과나무가 그 사람 담장 안에 있었는데, 담장 밖에 사과가 떨어져 굴러나온 것을 어떤 남자아이가 한 입 베어먹었을 때 선교사가 나와서 사과나무에 비끌어 매놓고, 살이 타드는 청강수로 이마에다 도적이라고 쓰고 때렸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사과 하나로 도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믿는 게 교회다. 그러니 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렸다.

그런데 그 때도 나는 교회에 갔다. 그 때 사람은 그랬을 지 몰라도 지금은 교회 할머니들 다 좋고 안그런다면서.

# 14살, 성경으로 한글을 깨치다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나를 보시고 나이가 14살인데 공부도 못하고 산에만 가고 있으니까 불쌍했던 것 같다. 그 집사님은 “한 전도사님 집에 가 있으라. 거기서는 공부도 할 수 있고, 잘하면 미국도 간다”고 귀뜸해줬다. 어머니한테 말하니 절대 반대했다. “무슨 일을 해도 다 하겠는데 이것만은 하게 해달라”며 매달렸고 어머니도 방법없이 승인하셨다. 그 분 집에 가서 한 일년을 살았다. 애들이 모이고 모여 탈북자 10명까지 있었다. 전도사님 부부가 젓가락 공장에서 일해서 애들 10명을 다 키웠다. 집세 내고, 쌀 사고. 북한 애들은 여기 애들보다 3배는 먹는다. 그러니 아무리 사도 양식이 모자라 죽을 쒀서 먹거나, 반찬으로 간장 아니면 무, 된장에다 찍어먹을 때도 있었다.

전도사님 댁에 온 첫 날에 전도사님은 일 다녀올 동안 집에서 성경 10장을 읽으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한글이라고는 전연 모르는데 10장이 태산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받침 없는 글은 읽는데, 받침 두개씩 있는 것은 못 읽고 다 동그라미를 쳐놨다. 그랬더니 전도사님이 오셔서 그것을 보시고 너무 화가 나셨다. 하나님 말씀에 왜 낙서를 했냐고 많이 혼내셨다.

후에 사모님이 내가 울고 있으니까 왜 그랬냐고 방에서 조용히 물어보셔서, 사실 글자를 몰라서 물어보려고 했다고 그제야 말했다. 사모님이 막 우시면서 아까 말하지 왜 혼나고 있냐고 안아주셨다. 그 후로 사모님이 한 두 주간 휴가를 받아와 못 알아보는 글을 따라 읽기를 시켰다.

한국어를 모르니까 성경에서 ‘예수님,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세계 지도 뒷부분을 칠판으로 해서 성경구절을 가르치면서 성경 필기를 시켰다. 20글자를 하루에 다 통달하게. 글 자체를 성경으로 배우고 공부를 성경으로 다 했다.

# 윤요한 목사, 은인을 만나다

1년 동안 전도사님 댁에 살면서 제일 힘든 때가 있었다. 내가 저녁을 했는데, 3일을 내리 ‘죽’만 쒔다. 한번은 전도사님이 “쌀이 얼마나 남았니”라고 물으셨다. 보여드리니까 한숨을 푹푹 쉬셨던 기억이 난다. 쉘터에 수용하는 탈북자 아이들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그 때 윤요한 목사님, 변인복 목사님이 쉘터로 찾아 오셨다. 파인애플, 바나나를 처음 먹어 봤다. 쌀을 몇 자루를 사다 주시고 쇠고기, 돼지고기, 칼치를 잔뜻 사오셨다. 특히 칼치는 중국에서도 늘 거의 상해 뭉그러진 것만 사먹었는데, 한번도 못 먹었던 일등 칼치였다. 그 날은 정말 많이 먹어 모두 배탈이 나기도 했다. 쉘터에는 40~50명이 다녀갔지만, 꾸준히 끝까지 우리를 지원해주신 분은 윤요한 목사님 밖에 없었다. 이후 쉘터의 전도사님은 체포되고, 탈북자들은 모두 잡히거나 흩어져 버렸다. 당시 남은 아이들을 돕던 전도사님이 조선족이 다니는 신학교로 연결시켜 주셔서 다니기 시작했다.

진혜 씨는 길림성 신학교에 다니는 2년 동안 세례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늘 필요한 것이 있을때마다 “100원”을 쥐어주셔서 “100원 짜리 할아버지”라고 불리던 윤요한 목사님은 그녀가 믿음을 가진 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도록 결심하게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 분과 함께 탈북 이후에도 탈북자 망명을 돕던 진혜 씨는 2005년 윤 목사님과 함께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진혜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차 앞에 수갑을 차고 흰 수염을 하신 윤 목사님이 내리시는 것을 보고 저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때 윤 목사님은 참 멋진 말씀을 하셨습니다. ‘울지 마라. 진혜야. 우리는 살인자도 도적도 아니다. 좋은 일하다가, 남을 구하다가 이런 일을 당한 것이니, 하나님 상 주시는 일이다’ 저는 그때 ‘나도 목사님 같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4번이나 북송돼 살아나온 자체가 기적

-이빨 깨지는 것은 예사, 발로 차 실명까지

신학교를 다니면서, 잠시 집에 놀러갔다가 어머니랑 같이 잡힌 것이 첫번째 북송이다. 어머니는 감옥에 갔지만, 미성년자였던 나는 어린 아이들이 가는 수용소에 보내졌다. 미성년자라 심하지 않게 다룬다고 해도 때리고, 발로 차고, 머리 한 줌씩 다 빠지고, 남자 애들은 이빨이 다 부러진다. 여자애들은 덜 때리는데, 엉덩이나 배를 차거나 머리 잡아 끌고 다니거나 뺨을 때리는 정도다.

신학교를 다녀서 믿음이 있다보니까, 기도를 많이 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보위관을 좋은 사람을 주셔서 모면하게 하셨다. 내 옆에 한 탈북자 친구는 발로 맞았는데 눈이 파열되서 처음에는 눈에 핏물만 생기더니 나중에는 곪아서 너무 심해지니까 그때서야 병원을 데리고 갔는데, 다시는 못본다고 했다.

# 감옥에서도 찬양하고 예배하다

하나님을 제일 많이 체험했던 것이 2005년 1년 간 감옥 생활하면서다.

한번은 2개월 동안 대장염으로 설사를 해서 반 시체 되다시피한 사람이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아마 북한에서 죽는 사망원인 1위가 설사일 것이다. 이 사람이 계속 열이 나고 너무 추워서 많이 떠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 발만 동동 구르다가,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끼리 ‘한번 기도를 해보자’고 입이 모아졌다. 방에 7명은 모두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설사병으로 죽어가던 사람, 기도로 낫다

처음에는 빙 둘러앉아 손을 얹고 막 엉엉 울면서 기도를 했다. 끝마치고 돌아앉았는데, 15분인가 지났을까. 이불이 덥다고 5겹 이불을 하나씩 벗기 시작하더니, 2달 동안 설사해 뼈 밖에 없던 사람이 일어나서는 열이 다 내렸단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다들 놀랐다. 저녁시간 밥이 들어왔는데, 입이 써서 밥을 전혀 안 먹던 사람이 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렇게 3일 만에 완쾌가 됐다.

성경에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니 7명 다 믿음이 엄청 좋아지고, 저녁되면 구석구석에서 가족을 위해 개인을 위해 기도했다.

-금식기도 후 먹고 싶은 것 말하니 그대로 나와, 주변 사람들 전도하기도

한번은 형(形)을 선고받기 전에 동생과 3일 금식기도를 했다. 금식기도가 끝난 날 점심 때쯤 ‘옥수수 국수’가 그렇게 먹고 싶었다. 큰소리로 ‘옥수수 국수 한번 먹으면 원이 없겠다’고 소리쳤다. 옆방 수감자들도 다 들었는데, 그날 옥수수 국수가 나왔다. 1년 3개월 형을 살면서 처음 먹어봤다. 주변에는 나를 보고 귀신이라고 했다.

감옥에서 주로 배급해주는 음식은 언 배추에 뿌리를 잘라 버리고, 물에 끓여 소금 한바가지 넣고 그것을 퍼준다. 굉장히 짠 배추국이나 무국을 주로 줬다. 또 샐러리 잎사귀만 뜯어서 물에 끓이면 물이 까맣고 한약 냄새가 나는 국을 주로 배급해준다.

옥수수 국수가 나온 그날, 저녁에는 콩나물 국이 너무 먹고 싶어 기도하면서 크게 콩나물국 먹고싶다고 말했는데, 기적처럼 이렇게 큰 통에다 콩나물 반을 채워서 내왔다.

그래서 전도를 많이 했다. 감방에서 찬양도 하고 예배도 같이 드렸는데, 그 다음 주일에는 사람이 확 불어나 7명이서 드리던 예배를 16명이 드렸다.

-골수염, 두번째 삶을 선물받다

넷째, 나를 찾아온 건 골수염이었다. 골수가 썩는 병이다. 발 끝에 감염돼 점점 올라오니까 발목까지 썩었다. 처음에는 뼈만 썩었는데, 열이 막 나니까 열을 식힐려고 찬물에다 발을 넣고 있었다. 늘 물에 넣고 있는 발은 불어서 갈라졌고, 갈라진 틈에 감염이 돼 자꾸 긁으니 고름이 넘쳐 발이 두 배로 커졌다. 동생은 내가 물을 담그고 있던 물이 뜨거워지면 또 떠오고 또 떠오고 해서, 6개월 동안 내 수발을 들었다. 80kg이던 몸무게가 40kg으로 줄어들었다.

신앙인으로서 나는 기도로 나았다고 믿는다. 6개월 만에 병원에 수술을 하러 갔다. 윤요한 목사님이 수술비용을 마련해 준 것이다. 의사는 잘라야 된다고 했다. 자르다가 죽을수도 있으니 죽으면 스테인관을 쓰냐, 나무관을 쓰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당시 나는 다리가 너무 아프니까 “하나님 빨리 잘라주세요. 나는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만 다리를 잘라서 내가 산다면 열심히 앉아서 공부할 거고 성경을 보겠으니까 다리 제발 잘라주세요”기도했는데 정작 자른다고 하니까 너무 겁이 났다. 수술대에 올라 2~3분 가슴을 파내리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 다리 좀 주세요. 그러면 가는 곳마다 제가 전도할 거고요. 제발 저 다리 좀 주세요.” 그런데 몇 분있다가 수술한다고 한 사람이 갑자기 못한다고 했다. 이미 피검사, CT촬영도 다 했는데….

그렇게 다리 절단 수술은 하지 않고 발에 엉겨붙은 고름 제거수술만 했다. 그 후 기적처럼 일주일 만에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완쾌된 것이다. 기적이었다. 윤요한 목사님이 1만불을 줘서 우리 3명(어머니, 나, 동생)을 빼내줬다. 그 후 UNHCR(유엔난민기구) 도움으로 북경에서 1년 3개월 있다가, 중국에서 바로 미국으로 건너왔다.

조진혜
(Photo : 기독일보) 최근 버지니아주에서 다시 만난 조진혜 씨(가운데) 가족과 윤요한 목사(왼쪽에서 두번째). 북한자유연합 헨리 송 씨.

올해로 미국 생활 4년 차인 진혜 씨 가족은 처음엔 지낼 곳이 없어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었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현재 잘 정착해 가고 있습니다. 진혜 씨는 버지니아주 한 간병사 회사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고, 동생 은혜 씨는 미국 야간 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자유아시아방송 기자와 간병사 회사 사무원직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차도 생기고, 작은 집에서 조금 큰 집으로 이사를 갈 형편이 되었지만, 진혜 씨는 여전히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을 향한 마음은 놓치지 않을 작정입니다. 진혜 씨는 오는 4월 북한 자유 주간에 서울에서 열리는 행사에 미국 대표팀원 중 한 명으로 참석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