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워싱턴에는 일요일주일예배가 잘못이며, 토요안식일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이 몇차례 신문광고에 나옴으로 많은 성도들을 혼란하게 하고 있다.
그 주장을 요약해보면, 토요안식일예배가 성경 십계명의 가르침이며, 기독교회의 주일예배는 132년 하드리안 박해 때 일부 변절 기독교인들에게서 시작되었고, 토요일예배를 말살하려는 321년 콘스탄틴 황제의 일요일 휴교령 때문이며, 또한 십계명의 안식일을 주일로 바꾼 로마 카톨릭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이 잘못된 주장에 대한 입장을 밝힘으로 성도들에게 성경적 바른 신앙을 제시하고자 한다. 주일예배와 안식일문제는 단순한 예배요일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이는 유대교와 기독교,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등 기독교 핵심 가르침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내용이 많게 된 것을 양해바라며 먼저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기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1. 유대교와 기독교
1.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직계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의 민족종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근거한다.(창17:1-7)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후에 율법과 성전을 주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할례, 율법, 성전을 하나님께 받은 언약백성의 표지로 여겼기에 자랑스러워했으며 이는 다른민족들과 유대인들을 구분짓는 배타적인 민족경계표시가 되었다. 이처럼 유대교는 할례, 율법(십계명, 안식일), 성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의 배타적 민족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여년전 유대 땅에 탄생하셨다. 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직계 자손으로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교의 가르침이 아닌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셨다. 당시 유대교는 언약의 표징(할례, 율법, 성전)을 문자적으로 지킴으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유대민족의 회복을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의 방법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하나님 백성됨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였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 바리새인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게부터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했다.(눅4:17-19) 유대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싫어했다. 또한 그의 가르침이 점점 세력을 얻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명기 율법을 가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사람들이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메시야가 아니라고 믿도록 의도하였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2-23)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면서 제자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인데,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받은 예수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그러면 모든 인류가 하나님 백성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그는 근심에 떠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40일동안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하나님 나라 구원을 다시 확인시키셨다. 그리고 승천하시며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고(행1:1-11) 약속대로 10일후 오순절에 다시 강림하셨다.(행2:1-4) 이때야 비로소 제자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였고, 그를 믿는 모든 자는 하나님 백성되는 구원을 얻는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은 유대인들이었던 제자들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바꾸는 대전환점 이었다.
1.2 구약과 신약
이때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성령이 구약 포로기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세에 임할 새언약의 성취임을 깨닫게 되었다. 새언약은 주로 예레미야와 에스겔, 요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다.
예레미야는 말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집에 새언약을 세우실 것이며, 그 새언약(신약)은 돌판에 새긴 옛언약(구약)과 다르게 사람 마음에 심어두어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게 할 것이라 예언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1-4)
에스겔은 그 새언약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새겨진 것임을 말하고, 성령이 임한 결과는 사람들이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예언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36:26-28)
요엘은 말세(주의 날)에 성령으로 임한 새언약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 백성되는 구원을 얻는다고 예언한다.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27-32)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임한 성령이 바로 포로기 선지자들이 말한 여호와의 날(말세)에 주시기로 약속한 새언약의 성취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바로 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한다.(행2:16) 그리고 성령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받아 보내신 것이기에,(행2:33) 그들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면 성령받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행2:38) 이것이 초대교회가 증거한 복음이었다.
이처럼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새언약의 성취와 완성으로 보는 가르침이다. 유대교는 하나님 나라 백성되는 구원을 아브라함 혈통을 따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제한하지만, 기독교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아담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 임한다고 선포한다. 즉 구약의 모든 내용을 영적 아브라함 자손, 새 이스라엘 백성, 참 유대인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이 신약이다.
1.3 율법과 복음
그러므로 기독교는 유대교가 가지고 있었던 언약증표인 할례, 율법, 성전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할례는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성령으로 하는 것(롬2:28-29), 율법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완성된 것(롬10:4),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개인(고전6:19)과 공동체(고전3:16)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을 가져왔고 핍박을 불러일으켰다. 스데반이 회당에서 유대인과 논쟁하다 체포되어 순교한 것이나(행6:13-14),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것이(행22:28) 바로 성전과 율법에 대한 이러한 혁명적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주로 복음이 이방세계로 전파될 때 발생하는 문제였다. 유대인들이었던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고 예수를 주로 믿는 것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유대교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지는 않지만 말이다. 율법은 유대인의 삶속에서 관습으로 남아있기에, 초대교회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성전가고,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이 당연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문화와 전통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은 달랐다. 그것은 단순한 삶의 문화가 아닌 복음 본질에 관한 문제였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는 책이다.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지킴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처럼 되어야 하나님 백성 된다고 가르치는 예루살렘 계열의 주장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완성되었기에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백성된다고 가르친다. 율법의 마침(롬10:4) 텔로스 노무우는 율법의 성취와 완성을 의미한다. 이는 율법주의(Legalism)나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을 말함이 아니다.
이와 같은 유대교와 기독교,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우리에게 안식일과 주일문제로 연결된다.
2.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2.1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친다.
먼저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예수님은 유대인이었다. 그는 당연히 할례를 받았고, 안식일에 성전예배에 참석했으며,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교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내용의 본질을 지키심이었다. 특히 안식일에 관한 말씀은 너무도 강력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을 보고 예수께 비난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다 시장하여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들의 음식을 먹은 것과,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일하는 것이 죄가 없음을 예로 드시며, 안식일에 시장하여 밀이삭을 먹은 제자들에게 죄가 없다고 하시며 충격적인 선언을 하신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1-8) 이 말씀은 크게 두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결코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한다. 만일 다윗이 율법을 "범할"권을 가지고 있고, 제사장도 안식일에 일할 수 있다면, 다윗보다 크시고, 제사장들보다 높으신 메시야 자신은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는 로돌프(Rordorf)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의 은밀한 메시야 선언이었다.
둘째,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실체이시다. 본래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출20:11)와 구속(신5:15)을 기억하기 위하여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심과 우리를 구원한 구속자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죄로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구속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날이다. 이것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는 직전 말씀과 연결되어(막2:22,눅5:38) 안식일이 요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날임을 알게한다.
2.2 폐기된 의식법과 영원한 도덕법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십계명 안식일)은 폐기된 것인가? 이것은 율법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율법이 문자적으로 지키는 유대교의 율법을 의미한다며, 그 율법은 폐기되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지키는 기독교의 율법이라면, 그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율법은 통상 세가지로 구분된다. 구약의 의식법(제사법, 절기법...), 시민법(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되는 희년법 토지법...), 도덕법이다. 이중 의식법은 폐지되고, 시민법은 그 정신만 남았으되, 도덕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영원히 유효하다.
할례, 제사, 안식일, 각종 절기는 대표적인 구약의 의식법이다. 따라서 십계명의 의식법인 안식일은 폐지되었고, 십계명의 나머지 계명들은 도덕법으로 우리에게 영원히 유효하다. 물론 우리가 안식일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적인 것과 미신적인 것이지, 안식일의 근본적인 목적과 본질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2.3 일곱째 날과 여덟째 날
구약의 안식일은 일곱째 날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창2:1) 출애굽기 20장은 안식일을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기 위함으로 말하고 신명기 5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신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라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안식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들과 언약을 맺어주신 창조주 하나님과 또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구속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임을 말한다. 이처럼 구약의 안식일, 일곱째 날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세워진 언약의 증표이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기억하는 날이다.
신약의 주일은 여덟째 날이다. 이는 다시 일주일의 첫째 날로 돌아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신하였다. 창조의 성삼위 하나님이 구속의 하나님으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성자 하나님이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는 죄와 사망의 손에서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가 첫째 날, 주일에 시작되었듯, 인류를 구속하신 새창조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 여덟째 날 주일에 시작된다. 또한 성령께서 다시 강림하신 오순절도 주일이다. 이처럼 주일은 인류 구속을 위한 성삼위 하나님의 날임을 깨닫고, 초대교회는 여덟째 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The Lord's day)로 부르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하고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3. 안식일에서 주일로
3.1 성경의 기록들(1세기)
초대교회가 안식일을 버리고 주일예배로 정착된 것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거친 점진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다음날부터 즉시 안식일을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초기 기독교회가 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에게 율법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물론 약간 혁신적이긴 했지만, 이들은 안식일에 성전예배에 참석했고, 할례와 각종 율법들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기에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처럼 초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과 주일예배를 모두 기념했다. 그러나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예배만 드렸다.
초대교회가 안식일과 주일을 모두 기념한 것은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2)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행20:7-11)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고전16장에서 바울은 매주일 첫날에 미리 준비된 헌금을 하라고 한다. 여기서 매주일 첫날은 안식 후 첫날과 같은 의미로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을 말하기에 주일예배 때 헌금을 말한다. 또한 사도행전 20장 드로아의 안식후 첫날 모임은 성경공부를 위한 특별집회가 아닌 정기주일예배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떡을 떼기 위한 성찬모임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장의 주의 날은 초대교회가 이미 일요일을 주의 날(주일)로 부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주일예배는 132년 바르 코흐바 저항으로 촉발된 하드리안 박해 때가 아닌 이미 처음부터 초대교회와 사도들에 의해 드려지고 있었다.
이처럼 초대 교회는 처음에 안식일과 주일 모두를 예배일로 지켰다. 대부분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쫓겨날 때까지 계속 성전과 회당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복음이 점점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면서 예배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바뀌어 갔다. AD 70년 성전파괴는 초대교회가 자연스럽게 유대 공동체와 단절하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황제들의 유대인 박해로 인해 안식일 모임이 금지되자, 초대교회는 점차 주일을 공식적인 예배일로 지키게 되었다.
3.2 니케아 이전 교회사(2-3세기)
사도요한이후 니케아까지 초대교회사 기록들을 살펴보면 역시 주일예배가 드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14권 p118-119>
2세기 초엽, 사도요한의 제자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마그네시아인에게 편지하며 유대교적 배경을 지닌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고 주일을 준수하며 살아간다고 기록했다.(Magenesians 9:1-3) 역시 디다케(Didache 14: 1)와 바나바 서신에서도 주일날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 기록들이 발견된다(Epistle of Barnabas, 15: 1).
또한 2세기 중엽의 순교자 저스틴은 일요일에 드려진 기독교 예배의 비교적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이유를 하나님이 창조사역을 시작하신 날이 일요일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도 바로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First Apology, ch. 67)
3세기 초엽에 활동했던 유명한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우리(그리스도인들)는 안식일 혹은 다른 유대인이 준수하는 절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더구나 이방인의 절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의식, 예를 들어 주일과 오순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On Idolatry ch. 14).
또한 3세기 중엽 키프리안은 교회서한을 통해 난지 8일 만에 행하는 유대교의 할례관습을 기독교의 주일준수를 제시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제 8일은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던 날이었고...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할례를 주신 날이기 때문에... 제 8일, 즉 주일은 전에 이미 있었다”(Epistle 64:4)
이와 같은 교회사의 기록을 종합해볼 때,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3세기에 들어오면 이미 교회는 구약의 안식일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주일을 예배일로 지켰던 것을 알 수 있다.
3.3 콘스탄틴의 일요일 휴교령(4세기)
321년 콘스탄틴 황제는 일요일 휴교령을 내렸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유스럽게 주일예배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기독교회가 안식일을 버리고 주일예배를 드리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일요일을 주일예배 날로 정한 것이 아니라, 일요일을 주(week)의 공휴일로 선포한 것일 뿐이다. 일요일 휴교령은 기독교의 주일예배와 아무런 상관없다.
여기서 콘스탄틴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사람이건, 그가 어떤 의도로 일요일 휴교령을 내렸건, 주일예배는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초대교회의 확고한 신학적 결론에 의해 것이지 교회가 콘스탄틴에 굴복하거나 속아서 주일예배로 바꾼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주일예배를 드려오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일요일을 휴일로 정한 것밖에 없다.
오히려 콘스탄틴의 일요일 휴교령은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주일예배가 완전하게 정착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당시 로마는 그들이 태양신을 섬기던 일요일을 공휴일로 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주일예배가 완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반증할 뿐이다. 뛰어난 정치가는 언제나 대중의 뜻을 살핀다.
또한 기독교의 주일예배를 로마의 태양신 숭배의 날과 연관시키는 것도 타당성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토요일이 로마신화에서 농업의 신인 Saturn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사실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주일이 로마에서 태양의 날이라 불리우건 말건, 로마의 일요일은 기독교의 주일예배와 아무 연관이 없다. 주일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새언약의 성취로 확인한 초대교회의 신앙에 따른 것이다. 로마의 일요일은 기독교의 주일과 우연히 일치되었을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4. 결론
주일예배와 토요안식일예배는 단순한 요일의 차이가 아니다. 이는 복음과 율법, 신약과 구약의 차이이며 더 나아가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이다. 우리는 성경과 교회사를 통하여 주일예배가 성경적임을 확인한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창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새창조(구속)된 하나님 백성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참된 안식을 소망한다. 우리는 주일예배를 통해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한다. 그리고 매일 삶을 주님께 드린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에게 모든 요일은 주의 날이요 거룩한 날이되 그중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은 특별히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모인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6-17)
그 주장을 요약해보면, 토요안식일예배가 성경 십계명의 가르침이며, 기독교회의 주일예배는 132년 하드리안 박해 때 일부 변절 기독교인들에게서 시작되었고, 토요일예배를 말살하려는 321년 콘스탄틴 황제의 일요일 휴교령 때문이며, 또한 십계명의 안식일을 주일로 바꾼 로마 카톨릭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이 잘못된 주장에 대한 입장을 밝힘으로 성도들에게 성경적 바른 신앙을 제시하고자 한다. 주일예배와 안식일문제는 단순한 예배요일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이는 유대교와 기독교,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등 기독교 핵심 가르침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내용이 많게 된 것을 양해바라며 먼저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기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1. 유대교와 기독교
1.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직계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의 민족종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근거한다.(창17:1-7)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후에 율법과 성전을 주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할례, 율법, 성전을 하나님께 받은 언약백성의 표지로 여겼기에 자랑스러워했으며 이는 다른민족들과 유대인들을 구분짓는 배타적인 민족경계표시가 되었다. 이처럼 유대교는 할례, 율법(십계명, 안식일), 성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의 배타적 민족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여년전 유대 땅에 탄생하셨다. 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직계 자손으로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교의 가르침이 아닌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셨다. 당시 유대교는 언약의 표징(할례, 율법, 성전)을 문자적으로 지킴으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유대민족의 회복을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의 방법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하나님 백성됨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였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 바리새인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게부터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했다.(눅4:17-19) 유대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싫어했다. 또한 그의 가르침이 점점 세력을 얻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명기 율법을 가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사람들이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메시야가 아니라고 믿도록 의도하였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2-23)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면서 제자들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인데,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받은 예수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그러면 모든 인류가 하나님 백성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그는 근심에 떠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40일동안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하나님 나라 구원을 다시 확인시키셨다. 그리고 승천하시며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고(행1:1-11) 약속대로 10일후 오순절에 다시 강림하셨다.(행2:1-4) 이때야 비로소 제자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였고, 그를 믿는 모든 자는 하나님 백성되는 구원을 얻는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강림은 유대인들이었던 제자들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바꾸는 대전환점 이었다.
1.2 구약과 신약
이때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성령이 구약 포로기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세에 임할 새언약의 성취임을 깨닫게 되었다. 새언약은 주로 예레미야와 에스겔, 요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다.
예레미야는 말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집에 새언약을 세우실 것이며, 그 새언약(신약)은 돌판에 새긴 옛언약(구약)과 다르게 사람 마음에 심어두어 그들로 하나님을 섬기게 할 것이라 예언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1-4)
에스겔은 그 새언약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새겨진 것임을 말하고, 성령이 임한 결과는 사람들이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예언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36:26-28)
요엘은 말세(주의 날)에 성령으로 임한 새언약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 백성되는 구원을 얻는다고 예언한다.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27-32)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임한 성령이 바로 포로기 선지자들이 말한 여호와의 날(말세)에 주시기로 약속한 새언약의 성취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바로 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한다.(행2:16) 그리고 성령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받아 보내신 것이기에,(행2:33) 그들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면 성령받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행2:38) 이것이 초대교회가 증거한 복음이었다.
이처럼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새언약의 성취와 완성으로 보는 가르침이다. 유대교는 하나님 나라 백성되는 구원을 아브라함 혈통을 따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제한하지만, 기독교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아담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 임한다고 선포한다. 즉 구약의 모든 내용을 영적 아브라함 자손, 새 이스라엘 백성, 참 유대인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이 신약이다.
1.3 율법과 복음
그러므로 기독교는 유대교가 가지고 있었던 언약증표인 할례, 율법, 성전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할례는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성령으로 하는 것(롬2:28-29), 율법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완성된 것(롬10:4),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개인(고전6:19)과 공동체(고전3:16)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을 가져왔고 핍박을 불러일으켰다. 스데반이 회당에서 유대인과 논쟁하다 체포되어 순교한 것이나(행6:13-14),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것이(행22:28) 바로 성전과 율법에 대한 이러한 혁명적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주로 복음이 이방세계로 전파될 때 발생하는 문제였다. 유대인들이었던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고 예수를 주로 믿는 것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유대교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지는 않지만 말이다. 율법은 유대인의 삶속에서 관습으로 남아있기에, 초대교회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성전가고,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이 당연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문화와 전통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은 달랐다. 그것은 단순한 삶의 문화가 아닌 복음 본질에 관한 문제였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는 책이다.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지킴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처럼 되어야 하나님 백성 된다고 가르치는 예루살렘 계열의 주장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완성되었기에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백성된다고 가르친다. 율법의 마침(롬10:4) 텔로스 노무우는 율법의 성취와 완성을 의미한다. 이는 율법주의(Legalism)나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을 말함이 아니다.
이와 같은 유대교와 기독교,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우리에게 안식일과 주일문제로 연결된다.
2.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2.1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친다.
먼저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예수님은 유대인이었다. 그는 당연히 할례를 받았고, 안식일에 성전예배에 참석했으며,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교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내용의 본질을 지키심이었다. 특히 안식일에 관한 말씀은 너무도 강력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을 보고 예수께 비난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다 시장하여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들의 음식을 먹은 것과,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일하는 것이 죄가 없음을 예로 드시며, 안식일에 시장하여 밀이삭을 먹은 제자들에게 죄가 없다고 하시며 충격적인 선언을 하신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1-8) 이 말씀은 크게 두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결코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한다. 만일 다윗이 율법을 "범할"권을 가지고 있고, 제사장도 안식일에 일할 수 있다면, 다윗보다 크시고, 제사장들보다 높으신 메시야 자신은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는 로돌프(Rordorf)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의 은밀한 메시야 선언이었다.
둘째,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실체이시다. 본래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출20:11)와 구속(신5:15)을 기억하기 위하여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심과 우리를 구원한 구속자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죄로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구속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날이다. 이것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는 직전 말씀과 연결되어(막2:22,눅5:38) 안식일이 요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날임을 알게한다.
2.2 폐기된 의식법과 영원한 도덕법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십계명 안식일)은 폐기된 것인가? 이것은 율법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율법이 문자적으로 지키는 유대교의 율법을 의미한다며, 그 율법은 폐기되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지키는 기독교의 율법이라면, 그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율법은 통상 세가지로 구분된다. 구약의 의식법(제사법, 절기법...), 시민법(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되는 희년법 토지법...), 도덕법이다. 이중 의식법은 폐지되고, 시민법은 그 정신만 남았으되, 도덕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영원히 유효하다.
할례, 제사, 안식일, 각종 절기는 대표적인 구약의 의식법이다. 따라서 십계명의 의식법인 안식일은 폐지되었고, 십계명의 나머지 계명들은 도덕법으로 우리에게 영원히 유효하다. 물론 우리가 안식일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적인 것과 미신적인 것이지, 안식일의 근본적인 목적과 본질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2.3 일곱째 날과 여덟째 날
구약의 안식일은 일곱째 날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창2:1) 출애굽기 20장은 안식일을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기 위함으로 말하고 신명기 5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신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라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는 안식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들과 언약을 맺어주신 창조주 하나님과 또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구속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임을 말한다. 이처럼 구약의 안식일, 일곱째 날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세워진 언약의 증표이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기억하는 날이다.
신약의 주일은 여덟째 날이다. 이는 다시 일주일의 첫째 날로 돌아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은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신하였다. 창조의 성삼위 하나님이 구속의 하나님으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성자 하나님이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는 죄와 사망의 손에서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가 첫째 날, 주일에 시작되었듯, 인류를 구속하신 새창조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 여덟째 날 주일에 시작된다. 또한 성령께서 다시 강림하신 오순절도 주일이다. 이처럼 주일은 인류 구속을 위한 성삼위 하나님의 날임을 깨닫고, 초대교회는 여덟째 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The Lord's day)로 부르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하고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3. 안식일에서 주일로
3.1 성경의 기록들(1세기)
초대교회가 안식일을 버리고 주일예배로 정착된 것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거친 점진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다음날부터 즉시 안식일을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초기 기독교회가 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에게 율법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물론 약간 혁신적이긴 했지만, 이들은 안식일에 성전예배에 참석했고, 할례와 각종 율법들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기에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처럼 초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과 주일예배를 모두 기념했다. 그러나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예배만 드렸다.
초대교회가 안식일과 주일을 모두 기념한 것은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2)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행20:7-11)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고전16장에서 바울은 매주일 첫날에 미리 준비된 헌금을 하라고 한다. 여기서 매주일 첫날은 안식 후 첫날과 같은 의미로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을 말하기에 주일예배 때 헌금을 말한다. 또한 사도행전 20장 드로아의 안식후 첫날 모임은 성경공부를 위한 특별집회가 아닌 정기주일예배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떡을 떼기 위한 성찬모임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장의 주의 날은 초대교회가 이미 일요일을 주의 날(주일)로 부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주일예배는 132년 바르 코흐바 저항으로 촉발된 하드리안 박해 때가 아닌 이미 처음부터 초대교회와 사도들에 의해 드려지고 있었다.
이처럼 초대 교회는 처음에 안식일과 주일 모두를 예배일로 지켰다. 대부분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쫓겨날 때까지 계속 성전과 회당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복음이 점점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면서 예배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바뀌어 갔다. AD 70년 성전파괴는 초대교회가 자연스럽게 유대 공동체와 단절하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황제들의 유대인 박해로 인해 안식일 모임이 금지되자, 초대교회는 점차 주일을 공식적인 예배일로 지키게 되었다.
3.2 니케아 이전 교회사(2-3세기)
사도요한이후 니케아까지 초대교회사 기록들을 살펴보면 역시 주일예배가 드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14권 p118-119>
2세기 초엽, 사도요한의 제자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마그네시아인에게 편지하며 유대교적 배경을 지닌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고 주일을 준수하며 살아간다고 기록했다.(Magenesians 9:1-3) 역시 디다케(Didache 14: 1)와 바나바 서신에서도 주일날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 기록들이 발견된다(Epistle of Barnabas, 15: 1).
또한 2세기 중엽의 순교자 저스틴은 일요일에 드려진 기독교 예배의 비교적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이유를 하나님이 창조사역을 시작하신 날이 일요일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도 바로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First Apology, ch. 67)
3세기 초엽에 활동했던 유명한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우리(그리스도인들)는 안식일 혹은 다른 유대인이 준수하는 절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더구나 이방인의 절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의식, 예를 들어 주일과 오순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On Idolatry ch. 14).
또한 3세기 중엽 키프리안은 교회서한을 통해 난지 8일 만에 행하는 유대교의 할례관습을 기독교의 주일준수를 제시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제 8일은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던 날이었고...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할례를 주신 날이기 때문에... 제 8일, 즉 주일은 전에 이미 있었다”(Epistle 64:4)
이와 같은 교회사의 기록을 종합해볼 때,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3세기에 들어오면 이미 교회는 구약의 안식일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주일을 예배일로 지켰던 것을 알 수 있다.
3.3 콘스탄틴의 일요일 휴교령(4세기)
321년 콘스탄틴 황제는 일요일 휴교령을 내렸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유스럽게 주일예배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기독교회가 안식일을 버리고 주일예배를 드리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일요일을 주일예배 날로 정한 것이 아니라, 일요일을 주(week)의 공휴일로 선포한 것일 뿐이다. 일요일 휴교령은 기독교의 주일예배와 아무런 상관없다.
여기서 콘스탄틴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사람이건, 그가 어떤 의도로 일요일 휴교령을 내렸건, 주일예배는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초대교회의 확고한 신학적 결론에 의해 것이지 교회가 콘스탄틴에 굴복하거나 속아서 주일예배로 바꾼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주일예배를 드려오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일요일을 휴일로 정한 것밖에 없다.
오히려 콘스탄틴의 일요일 휴교령은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주일예배가 완전하게 정착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당시 로마는 그들이 태양신을 섬기던 일요일을 공휴일로 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주일예배가 완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반증할 뿐이다. 뛰어난 정치가는 언제나 대중의 뜻을 살핀다.
또한 기독교의 주일예배를 로마의 태양신 숭배의 날과 연관시키는 것도 타당성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토요일이 로마신화에서 농업의 신인 Saturn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사실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주일이 로마에서 태양의 날이라 불리우건 말건, 로마의 일요일은 기독교의 주일예배와 아무 연관이 없다. 주일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새언약의 성취로 확인한 초대교회의 신앙에 따른 것이다. 로마의 일요일은 기독교의 주일과 우연히 일치되었을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4. 결론
주일예배와 토요안식일예배는 단순한 요일의 차이가 아니다. 이는 복음과 율법, 신약과 구약의 차이이며 더 나아가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이다. 우리는 성경과 교회사를 통하여 주일예배가 성경적임을 확인한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창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새창조(구속)된 하나님 백성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참된 안식을 소망한다. 우리는 주일예배를 통해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한다. 그리고 매일 삶을 주님께 드린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에게 모든 요일은 주의 날이요 거룩한 날이되 그중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은 특별히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모인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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