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집 서재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는데 제 뒤로 조용하게 아들이 다가 왔습니다. 그리고는 제 어깨를 쓰다듬어 주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 아마 그 맛에 아이들을 키우는 모양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들 녀석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제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을 준 말들 중 하나입니다. “Dad, you are getting bold.” 즉시 화장실에 가서 머리를 숙이고 거울을 들여다 보니까 정말 아들의 말이 맞았습니다. 숱이 많아 빗도 안 들어가던 제 머리가 어느덧 전등불을 반사할 정도로 옅어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때가 바로 제가 처음으로 “심지어는 나까지도 늙는구나”하고 느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절대로 안 늙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혹 없으신지요? 우리는 종종 얼굴 팩을 한다든지, 주름을 제거하는 수술을 한다든지, 머리에 염색을 한다든지, 혹은 점점 나이 들어 비대해져 가는 몸에서 기름을 뺀다든지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러한 수고를 한들 우리 나이가 조금이라도 줄어지는지요? 우리가 (물론 젊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나이 들면 더욱 새로운 마음으로 준비하여야 하는 것은 좀 도 영적인 준비가 아닐까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 6:33).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싫거나 좋거나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좀 더 많이 살거나 좀 더 빨리 죽는다 뿐이지요. 그러기에 전도서의 저자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요?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2-13).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소망은 영생의 소망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21).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크리스천”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였을까요?
물론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과거의 죄에서부터 앞으로 지을 모든 죄들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나 혹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죄의 대가를 가르쳐 주는 구절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즉 “그래도 죄를 짓겠느냐?”는 도전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러한 믿음의 양심이 결여되어 있다면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살고 있는가? 내가 받은 구원이 참 구원인가? 혹 단지 영생을 위한 “생명 보험”(“Life Insurance”)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에스키모들이 늑대를 사냥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날카롭게 갈은 칼에 짐승의 피를 흥건하게 묻힌 후 얼린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또 피를 묻혀 다시 얼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하면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툼하게 되는데, 그렇게 된 칼을 날이 위로 가도록 얼음 땅 위에 세워 놓는다고 합니다. 늑대는 피에 코가 상당히 예만한 동물입니다. 그 피 냄새를 맡은 늑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 중에 몰래) 찾아 와서는 그 칼을 핥기 시작하는데, 한 번 피 맛을 본 늑대는 그 피 맛에 정신까지 잃고 만다는 것입니다. 정신 없이 그 칼을 핥아 대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 칼에 묻은 피를 핥다가는, 한참 후에는 자기의 혀가 칼날에 찢어지는 것도 모르고 핥아 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의 피를 밤 새 정신 없이 핥아 대다가, 아침쯤에는 차디 찬 시체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도 죄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러한 우리들의 종말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그리고 그러한 악의 모양 중에는 경건의 모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그러한 경건의 흉내나 냄새보다는, 우리에게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상한 심령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상한 심령 만이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9). 그럴 때 우리에게는 기쁨도 함께 회복이 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그리고 기도의 응답까지도 회복됩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18-20). 뿐만 아니라 믿음의 간증까지도 회복할 수 있게 되어, 우리로 하여금 능력 있는 크리스천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김성국(리빙워드 한인 침례교회) 목사 제공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절대로 안 늙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혹 없으신지요? 우리는 종종 얼굴 팩을 한다든지, 주름을 제거하는 수술을 한다든지, 머리에 염색을 한다든지, 혹은 점점 나이 들어 비대해져 가는 몸에서 기름을 뺀다든지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러한 수고를 한들 우리 나이가 조금이라도 줄어지는지요? 우리가 (물론 젊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나이 들면 더욱 새로운 마음으로 준비하여야 하는 것은 좀 도 영적인 준비가 아닐까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 6:33).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싫거나 좋거나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좀 더 많이 살거나 좀 더 빨리 죽는다 뿐이지요. 그러기에 전도서의 저자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요?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2-13).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소망은 영생의 소망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21).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크리스천”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였을까요?
물론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과거의 죄에서부터 앞으로 지을 모든 죄들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나 혹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죄의 대가를 가르쳐 주는 구절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즉 “그래도 죄를 짓겠느냐?”는 도전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러한 믿음의 양심이 결여되어 있다면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살고 있는가? 내가 받은 구원이 참 구원인가? 혹 단지 영생을 위한 “생명 보험”(“Life Insurance”)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에스키모들이 늑대를 사냥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날카롭게 갈은 칼에 짐승의 피를 흥건하게 묻힌 후 얼린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또 피를 묻혀 다시 얼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하면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툼하게 되는데, 그렇게 된 칼을 날이 위로 가도록 얼음 땅 위에 세워 놓는다고 합니다. 늑대는 피에 코가 상당히 예만한 동물입니다. 그 피 냄새를 맡은 늑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 중에 몰래) 찾아 와서는 그 칼을 핥기 시작하는데, 한 번 피 맛을 본 늑대는 그 피 맛에 정신까지 잃고 만다는 것입니다. 정신 없이 그 칼을 핥아 대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 칼에 묻은 피를 핥다가는, 한참 후에는 자기의 혀가 칼날에 찢어지는 것도 모르고 핥아 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의 피를 밤 새 정신 없이 핥아 대다가, 아침쯤에는 차디 찬 시체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도 죄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러한 우리들의 종말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그리고 그러한 악의 모양 중에는 경건의 모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그러한 경건의 흉내나 냄새보다는, 우리에게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상한 심령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상한 심령 만이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9). 그럴 때 우리에게는 기쁨도 함께 회복이 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그리고 기도의 응답까지도 회복됩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18-20). 뿐만 아니라 믿음의 간증까지도 회복할 수 있게 되어, 우리로 하여금 능력 있는 크리스천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김성국(리빙워드 한인 침례교회)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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