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과마음선교회(이사장 최덕순 목사)가 발행하는 계간 <손과마음> 제4호에 실린 글을 연재한다. 손과마음선교회는 변화와 해방을 꿈꾸는 북한 동포들에게 생명과 자유와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인도적 구호단체다.
② 원시적 생활환경이 가져오는 고통
북한을 공식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보여주는 곳은 바로 여의도 몇 배 크기의 평양 중심부다. 거대한 김일성 동상과 주체사상탑을 중심으로 김일성광장에 즐비하게 들어선 웅장한 석조건물의 평양 중심부를 바라보면 누구나 그 위세에 눌릴 만하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를 뺨칠 만큼 화려한 평양 창광거리와 백화점들을 들러본 사람들은 흔히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 최근 개장한 평양의 놀이동산은 ‘평양에도 자유와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표방함으로서 세계인들에게 화제가 된 바 있다.
하지만 평양 중심부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해외방문객들을 선전선동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한 위장시설에 불과하다. 평양 중심부의 온갖 편의시설들은 평양의 지배계층 인구 200만명을 위해 특별 운영되는 것들이다. 평양 밖에 사는 나머지 2천만명의 북한사람들은 이 시설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평양 시민들은 스스로 김정일 장군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하지만 평양의 허위성은 골목으로 조금만 접어들어도 바로 탄로난다. 그 예가 평양대로를 병풍처럼 둘러 싼 20층 고층 아파트들이다. 이 아파트의 실상을 보면 북한의 현실이 얼마나 열악하며 형편없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이 아파트에는 수도와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다. 초저녁에 2시간 정도 전기가 공급되지만 30촉 정도의 희미한 전등 아래 살아야 하다. 심지어 유리창이 없는 경우가 많다. 거의 판잣집 수준의 이런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은 차라리 고통 그 자체라고 해야 한다.
매일 먹을 물을 길어와야 하고, 그나마 밥을 짓고 물이라도 끓이려면 장마당에서 석탄덩이를 사 와서 불을 지펴야 한다. 화장실이 있지만 수도공급이 안되니 용변을 볼 수 없다. 변을 종이뭉치에 싸서 길에 버려야 한다. 고층에 사는 노인들은 겨울이면 아예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려야 비로소 땅 밟기를 한다고 한다.
북한 전체는 이런 원시적 수준의 생활환경이 일반화되어 있다. 평양 이외의 지역에서는 주거시설, 교통시설, 각종 편의시설 등이 거의 원시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북한에서 살아가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평양 뿐 아니라 북한 전역을 잇는 대중교통도 원시적 상태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은 기차 뿐이다. 시외버스, 고속버스 등의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로 자체가 개발되어 있지 않고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어 있지 않아서 대중교통이라는 개념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화물트럭이 고작이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는 일도 북한에서는 어렵다. 다행히 병원에 갔다 해도 의사의 처방은 받지만 주사도 약도 없다. ‘처방된 약은 병원에 없으니 알아서 장마당에서 구해 복용하라’는 것이다. 상처를 치료할 소독약도 솜도 붕대도 없다. 주사바늘도 없어 물에 대충 닦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장마당은 북한 사람들의 편의를 유일하게 충족시키는 통로가 되고 있다. 장마당에 가면 중국제든 남조선제든 없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남한 사람 수준에서 인정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북한의 실상을 알 수 없다. 그들이 평생 당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불편과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기차 객실의 의자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빈대에 대한 얘기라든가, 깨끗한 식당이나 여관, 심지어 화장실조차 찾기 어렵다는 얘기라든가, 또 틈만 보이면 도난을 당하고 강도당하기 일쑤라는 얘기를 듣다 보면 북한 여행은 엄두도 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이런 원시적 환경 가운데 매일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③ 까닭을 모른 채 추방당하는 고통
“매일 아침이면 만나던 옆집 할아버지가 그 가족들과 함께 온다간다는 인사 한 마디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들이 남한으로 달아나 온 가족이 교화소에 수용되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고 한 탈북자는 말했다. 이처럼 한밤중에 검은 트럭이 와서 이웃집 가족과 짐을 실어가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많다. 이처럼 영문을 모른 채 자신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는 고통은 직접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황당한 일이다. 한 가족이 수십 년을 살아온 정든 고향 땅에서 갑자기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은 북한 땅이 아니고는 세상 어디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막힌 현실이다.
북한에서의 추방에는 ‘공개 추방’과 ‘비공개 추방’이 있다. 공개 추방은 범죄 내용이 분명한 생계형 범죄자들을 교화형에 처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공개재판을 통해 추방령을 내릴 경우 해당한다. 이때 범죄자와 가족들은 노동단련대나 교화소로 들어간다. 그러나 최근에는 비밀리에 감찰하는 각종 검열단속에 걸리면 사정없이 추방되는데, 아무도 모르게 비공개로 추방된다. 당사자들이 추방 소식을 알면 중국이나 다른 곳으로 달아나기 때문에 비밀리에 추방을 집행하는 것이다.
지난 2002년경 진행된 함경북도 국경연선(국경선)에 대한 검열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방됐다. 남한으로 탈북한 사람들의 가족들이나 중국과 전화로 연계하면서 밀수를 하던 사람들, 인신매매 브로커, 마약밀수자 등이 추방됐다. 그러나 돈이 있고 배경이 있는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다.
또 함경북도 무산군에서는 약 50여세대가 추방된 일이 있다. 중국과 마주 하고 있는 무산군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은 절대로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대상자 명단을 비밀로 한 채 깊은 밤에 불시에 가택을 습격하는 방식으로 추방을 집행했다. 집에 있는 각종 가구나 물건들은 불법적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일부는 몰수하고 나머지는 트럭에 사람들과 함께 싣고 가서 무산역에 세워둔 열차에 옮겨 실었다. 그러나 전기가 자주 정전이 돼 열차가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한 달이나 역에서 노숙하며 고생해야 했다. 이후 함경남도를 비롯해 다른 곳으로 추방되었던 그들은 뇌물을 바치고 다시 함경북도 지역으로 들어왔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현재 남한으로 온 사람도 있다.
정치범들의 가족 추방은 조금 다르다. 보다 은밀하게 진행된다. 한번은 함경북도 지방총국장을 지낸 한 고위관리가 간첩으로 몰려 국가보위부에 잡혀갔는데, 그 후 남겨진 아들도 아무도 모르게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당시 재판소에서 근무하던 아들은 아버지가 체포된 그날부터 일체 출장도 금지 당한 채, 재판소 내에서만 사무를 보다 3살짜리 아들과 함께 어느 날 사라졌다. 그의 아내는 보위부로 불려가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보위부 담당자는 남편이 단순히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귀띔해주자 그의 아내는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② 원시적 생활환경이 가져오는 고통
▲북한 지하교회 교인들이 사용했던 불에 탄 성경책 |
하지만 평양 중심부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해외방문객들을 선전선동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한 위장시설에 불과하다. 평양 중심부의 온갖 편의시설들은 평양의 지배계층 인구 200만명을 위해 특별 운영되는 것들이다. 평양 밖에 사는 나머지 2천만명의 북한사람들은 이 시설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평양 시민들은 스스로 김정일 장군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하지만 평양의 허위성은 골목으로 조금만 접어들어도 바로 탄로난다. 그 예가 평양대로를 병풍처럼 둘러 싼 20층 고층 아파트들이다. 이 아파트의 실상을 보면 북한의 현실이 얼마나 열악하며 형편없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이 아파트에는 수도와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다. 초저녁에 2시간 정도 전기가 공급되지만 30촉 정도의 희미한 전등 아래 살아야 하다. 심지어 유리창이 없는 경우가 많다. 거의 판잣집 수준의 이런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은 차라리 고통 그 자체라고 해야 한다.
매일 먹을 물을 길어와야 하고, 그나마 밥을 짓고 물이라도 끓이려면 장마당에서 석탄덩이를 사 와서 불을 지펴야 한다. 화장실이 있지만 수도공급이 안되니 용변을 볼 수 없다. 변을 종이뭉치에 싸서 길에 버려야 한다. 고층에 사는 노인들은 겨울이면 아예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려야 비로소 땅 밟기를 한다고 한다.
북한 전체는 이런 원시적 수준의 생활환경이 일반화되어 있다. 평양 이외의 지역에서는 주거시설, 교통시설, 각종 편의시설 등이 거의 원시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북한에서 살아가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평양 뿐 아니라 북한 전역을 잇는 대중교통도 원시적 상태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은 기차 뿐이다. 시외버스, 고속버스 등의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로 자체가 개발되어 있지 않고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어 있지 않아서 대중교통이라는 개념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화물트럭이 고작이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는 일도 북한에서는 어렵다. 다행히 병원에 갔다 해도 의사의 처방은 받지만 주사도 약도 없다. ‘처방된 약은 병원에 없으니 알아서 장마당에서 구해 복용하라’는 것이다. 상처를 치료할 소독약도 솜도 붕대도 없다. 주사바늘도 없어 물에 대충 닦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장마당은 북한 사람들의 편의를 유일하게 충족시키는 통로가 되고 있다. 장마당에 가면 중국제든 남조선제든 없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남한 사람 수준에서 인정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북한의 실상을 알 수 없다. 그들이 평생 당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불편과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기차 객실의 의자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빈대에 대한 얘기라든가, 깨끗한 식당이나 여관, 심지어 화장실조차 찾기 어렵다는 얘기라든가, 또 틈만 보이면 도난을 당하고 강도당하기 일쑤라는 얘기를 듣다 보면 북한 여행은 엄두도 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이런 원시적 환경 가운데 매일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③ 까닭을 모른 채 추방당하는 고통
▲한 어린이가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오길남 박사 딸의 북한 입국 전 바이올린을 켜는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는 오 박사의 두 딸 혜원·규원이를 수용소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대웅 기자 |
“매일 아침이면 만나던 옆집 할아버지가 그 가족들과 함께 온다간다는 인사 한 마디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들이 남한으로 달아나 온 가족이 교화소에 수용되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고 한 탈북자는 말했다. 이처럼 한밤중에 검은 트럭이 와서 이웃집 가족과 짐을 실어가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많다. 이처럼 영문을 모른 채 자신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는 고통은 직접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황당한 일이다. 한 가족이 수십 년을 살아온 정든 고향 땅에서 갑자기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은 북한 땅이 아니고는 세상 어디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막힌 현실이다.
북한에서의 추방에는 ‘공개 추방’과 ‘비공개 추방’이 있다. 공개 추방은 범죄 내용이 분명한 생계형 범죄자들을 교화형에 처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공개재판을 통해 추방령을 내릴 경우 해당한다. 이때 범죄자와 가족들은 노동단련대나 교화소로 들어간다. 그러나 최근에는 비밀리에 감찰하는 각종 검열단속에 걸리면 사정없이 추방되는데, 아무도 모르게 비공개로 추방된다. 당사자들이 추방 소식을 알면 중국이나 다른 곳으로 달아나기 때문에 비밀리에 추방을 집행하는 것이다.
지난 2002년경 진행된 함경북도 국경연선(국경선)에 대한 검열에서 많은 사람들이 추방됐다. 남한으로 탈북한 사람들의 가족들이나 중국과 전화로 연계하면서 밀수를 하던 사람들, 인신매매 브로커, 마약밀수자 등이 추방됐다. 그러나 돈이 있고 배경이 있는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다.
또 함경북도 무산군에서는 약 50여세대가 추방된 일이 있다. 중국과 마주 하고 있는 무산군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은 절대로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대상자 명단을 비밀로 한 채 깊은 밤에 불시에 가택을 습격하는 방식으로 추방을 집행했다. 집에 있는 각종 가구나 물건들은 불법적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일부는 몰수하고 나머지는 트럭에 사람들과 함께 싣고 가서 무산역에 세워둔 열차에 옮겨 실었다. 그러나 전기가 자주 정전이 돼 열차가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한 달이나 역에서 노숙하며 고생해야 했다. 이후 함경남도를 비롯해 다른 곳으로 추방되었던 그들은 뇌물을 바치고 다시 함경북도 지역으로 들어왔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현재 남한으로 온 사람도 있다.
정치범들의 가족 추방은 조금 다르다. 보다 은밀하게 진행된다. 한번은 함경북도 지방총국장을 지낸 한 고위관리가 간첩으로 몰려 국가보위부에 잡혀갔는데, 그 후 남겨진 아들도 아무도 모르게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당시 재판소에서 근무하던 아들은 아버지가 체포된 그날부터 일체 출장도 금지 당한 채, 재판소 내에서만 사무를 보다 3살짜리 아들과 함께 어느 날 사라졌다. 그의 아내는 보위부로 불려가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보위부 담당자는 남편이 단순히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귀띔해주자 그의 아내는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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