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황필남, 몽골을 위해 인생을 바치기로 한 자랑스런 한국 선교사다. 20년 전 첫 몽골 땅을 밟았던 그 때처럼 동일한 마음으로 워싱턴 버지니아크리스천대학 몽골학과 교수로 제직하며 몽골 신학생들을 양육하고 있는 그. 황 목사는 지난 세월 동안 몽골 땅을 섬겼듯이, 남은 인생을 몽골인들을 위해 바칠 작정이다.
마굿간에 태어난 예수님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서구 선교사처럼, 교회의 명맥은 끊어지고 겨우 한 개 교회만 근근히 존재했던 몽골, 그 두려운 땅을 처음 밟은 것이 횟수로 벌써 스무해가 지났다. 공산주의체제가 붕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내부사회는 철저히 공산주의체제 아래 움직이고 있던 시절, 몽골국립의과대학 대학원생으로 위장해 들어간 선교의 첫 출발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숙소는 의과대학기숙사. 바닥은 노란색 장판색이 다 벗겨지고 공산당을 연상시키는 낡고 붉은 커튼이 을씨년 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학생들이 먹고 버린 양, 염소 뼈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심지어 머리뼈가 방 바닥에 널부러진 모습을 보고는 “내가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살러 왔는데…” 라는 생각에 참을 수 없어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하나님, 제가 이런 곳에 살아야 합니까?”
순간 예수님은 성령으로 찾아오셨다.
“얘야 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단다.”
선교사로 왔지만 아직 마음이 낮아지지 않고, 선교지로 온전히 성육신 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주님 앞에 철저히 엎어져 회개하고 시작한 선교다.
몽골, 너는 내 운명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둘인 아픔을 겪었다. 16세 때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군대를 다녀온 후 한차례 방황하기도 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 깨어져 흩어져 버린 모교회를 보면서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던 중 깨어진 모교회 어린이들을 모아 주일학교를 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응답은 시작됐다. 하나님은 그를 목사로 부르시고 신학교에 가게 됐다. 신학교 지하 기숙사에서 끼니를 겨우 떼우며 175cm 52kg의 허약한 몸을 지탱하며 3년 간 신구약 10번을 정독했다. 10번을 읽은 후 깨달은 성경의 결론은 하나였다. “선교”였다. 예수님이 오시려면 선교를 통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돼야 한다는 것. 그는 투자하기로 했다. 자신의 전 인생을….
그에게 몽골은 운명이었다. CCC(한국대학생선교회)와 CEF(어린이전도협회), KHE(한국외항선교회)에서 선교훈련을 받았다. 파송단체였던 KHE에서 처음엔 그리스로 가기로 했다가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인도로 가기로 결정하고 준비하는 도중 몽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파송선교단체인 KHE가 몽골로 단기선교를 다녀온 후 목사가 한 명도 없고 한인 선교사가 없는 몽골 땅을 소개했다. 신약성경만 번역돼 있고 교회가 하나 밖에 없는 몽골로 가라는 추천이 있었다. ‘YES’를 외친 황 선교사 앞에 몽골 땅의 문이 열렸다.
돌 맞고, 불 질러도 수는 불어나고
무신론자와 정령숭배, 라마불교 문화가 뒤섞인 교회는 1개 뿐인 몽골 땅에서 선교사로 산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핍박도 많았다. 기숙사와 사무실, 자동차에 총 4번의 돌멩이가 날아들어왔고 한번은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던 아내에게 날아들어온 돌멩이가 창문을 깨고 온 방에 흩어져 얼굴이 벌개진 아내가 기숙사를 뛰쳐나온 일도 있었다. 자동차 뒷바퀴가 3번이나 빠져 나갔고, 한번은 자동차에 불이 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다행히 모래사장에 정거해 살아난 일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성경을 나눠주면 어떤 사람들은 한 장 한 장 찢어 산 열매를 싸서 파는 종이로 썼다. 또 어떤 이는 버리고 어떤 이는 불사질렀다. 그런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읽고 회개하고 친척을 전도해 18년 간 동역자가 되어준 고마운 이들도 끼여있다.
굴하지 않고 첫 5년을 사역한 결과 15개의 교회가 개척, 1천명 이상의 교인들로 불어났고, 수 백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줬다. 첫 7년 간을 합하면 총 900명에게 세례를 줬다. 핍박 속에도 선교 사역은 끊임없이 확장, 진행형이었다.
“복음에 빚진 자”… 되뇌고 또 되뇌는 말
‘왜 나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열매를 주실까’ 물었다.
그 물음 가운데 잠시 방문한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자신이 살던 강원도 강릉 작은 시골 마을에 처음 복음을 전한 미국 선교사 리차드 래시 덕 선교사와 우상 숭배가 가득하던 마을에 첫 교회를 세운 최종묵 전도사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신앙의 뿌리, 빚진 자의 삶을 깨닫는 지혜”에 있었다.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은 제 공로가 아니고, 미국인 선교사의 공로, 두번째는 시골 마을에 교회를 세워준 최종묵 전도사 부부, 세번째는 경상도 출신의 최종만 목사님 때문입니다. 최종만 목사님은 5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복음을 전하며 내게 세례를 주신 분인데 아이들에게는 밀가루로 풀죽을 쑤어 먹이고, 목사님 부부는 굶으면서 복음을 전해 줬지요. 16살 때 교회에 처음 나갔던 저는 가득한 평안과 영적인 만족을 느끼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육체적으로 굶주리면서도 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설교가 제 영혼의 만족과 한없는 평안을 주었기 때문이죠.”
생명이 끊어진 백성에 생명줄 대다
몽골 땅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다. 600년 간 생명의 말씀이 끊긴 땅.
제 1대 왕인 징기스칸 전에 10만명의 해러이트 레이망이란 부족이 있었다. 왕과 부족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었다. 세가 있는 이 부족을 젊은 징기스칸이 장악하고 부족들의 공주와 자기 아들과 손자들을 정략 결혼 시켰다. 왕가에도 모계사회를 타고 크리스천들이 내려오다가 제 5대 왕이었던 쿠빌라이칸 당시 중국 북경을 점령하고 원나라를 설립한 후 대몽골제국의 통일된 종교를 갖기로 결정하면서 만장일치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가결했다.
쿠빌라이칸이 (종교개혁 이전이었기 때문에)로마 교황청에 100명의 훈련된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나중에 총 3명의 선교사를 보냈다. 그 중에서도 한 명은 도중에 돌아갔고, 한 명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다가 죽었고, 한 명은 몽골에까지 왔다가 척박한 땅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갔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복음을 전해줄 선교사가 오지 않자 쿠빌라이칸은 티벳에서 소승불교(라마불교)를 수입해 국교로 삼게 된다. 그 이후 몽골은 복음 없이 캄캄한, 우상 숭배와 무신론과 정령숭배 속에서 탄식하며 수백년을 살아야 했다.
1921년 몽골이 공산화될 때, 몽골 수도 울란바트르에 단 한개의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라마교도인지 무신론 공산주의자인지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 의해 화재가 일어나 그 교회 조차 타 버리고 선교사들은 도망 갔다. 그 이후 지난 600년 간 교회가 없었던 몽골, 1920년 대 유럽선교사에 의해 단 하나의 교회로 부활했다가, 핍박에 의해 싹이 잘린 몽골 기독교가 1990년도 영국 선교사 존 기븐스에 의해 부활하게 된다.
그가 선교사로 들어간 해인 1991년도. 갓 부활한 교회가 있었지만 여전히 척박했던 몽골. 야만적인 미신 문화와 정령 숭배가 가득하던 땅에서 기독교의 뿌리를 내리는 일을 감당한 것은 지금 돌아봐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모슬렘 대상 선교의 숨겨진 보석 땅
몽골이 세계 선교에 중요한 땅인 이유로 2가지를 꼽은 황 선교사. 첫째는 지리적인 이유로 다양한 종교가 뒤섞인 문화적 요소를 꼽았다.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몽골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스탄’이 붙은 13개 나라와 러시아 중국과 함께 불교의 부흥과 기독교 세력, 무슬림 세력 그리고 무당 및 정령숭배 등이 만나는 영적 전쟁터입니다.”
복음이 서진한다고 볼 때 모슬렘 권 선교는 동진하고 있다는 그는 “서진하는 복음과 동진하는 모슬렘 권이 만나는 지점이 몽골과 우즈벡,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권역”이라고 말한다.
두번째는 뛰어난 언어습득력과 적응력이다. 몽골인들은 모음과 자음이 36개로 구성돼 대다수의 언어의 발음을 쉽게 구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타국 언어를 배우는 데 탁월하다. 유목민족이라 적응력이 뛰어나고 급한 성격으로 속도가 빠른 민족성을 지니고 있다. “몽골 민족에 복음이 들어가면 모슬렘 권이나 무신론 권이나 힌두교 권이나 불교권이나 어떤 지역에도 선교사로 쉽게 파송하고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기질을 갖고 있습니다.”
풍성한 열매는 선물처럼… 앞으로는 신학교와 문서사역에 매진
몽골에 있는 600개 교회 중에 황 선교사와 그 제자들이 세운 교회가 약 100여개, 그 중 50여개를 현지 사역자에게 이양해 주고 직접 목회했던 2개 교회도 하나는 7년 전 이양하고 금년 2월에 350명으로 불어난 나머지 교회를 이양해 줬다. 제일 큰 교회는 한 교회에 1300명이 모이기도 한다. 미국에 세운 몽골교회가 3군데이고, 1군데 몽골교회 개척을 도왔다. 독일, 베를린, 체코, 스웨덴, 호주에 몽골교회를 세우고, 러시아 브리야트공화국과 중국, 티벳에 제자들을 파송했다. 한국에도 제자들이 목회하는 몽골교회가 3개가 있다. 이 중 호주와 스웨덴 몽골교회는 지도자가 없어 무너졌으나 곧 다시 가서 세워주고 올 계획이다.
현재는 워싱턴몽골교회 담임으로 버지니아크리스천유니버시티 몽골 학과를 세우는 데 주요 교수로 일하고 있는 황필남 목사. 그는 워싱턴 지역에서 정착 렌트비를 지원해 준 성광교회,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올네이션스교회, 세미한교회, 워싱턴순복음제일교회에 특별한 감사를 돌린다고 했다.
미국에 세워진 몽골교회 10여개를 포함, 현재까지 전세계에 몽골 교회가 720개 정도가 있다. 그 중 현지 목사가 170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신학 교육이 부족했던 전도사들이다. 앞으로는 이들의 영적 탈진과 갈급함을 채워주기 위해 문서사역과 신학교 사역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모든 길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지만, 꿈이 있다면 앞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설교집이나 주석이나 신앙서적을 집필 내지 번역을 해서 지도자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비전입니다. 현지 양떼들을 먹이는 사역을, 은혜를 공급하는 지원 사역을 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몽골유목문화에 맞는 간증집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나머지 아홉은 어디있느냐> 2권을 집필한 그는 문서선교사역을 위해 책들을 공급하고 신학교 사역을 통해 미래 몽골교회지도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들에 종사하고 싶다고 했다.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몽골교회를 돌며 권면하고 지속적으로 세워주는 일과 함께 그가 마지막 여생을 보내고 싶은 일들이다. 신학생 시절 허약한 체질은 20년 선교사역을 잘도 버텨줬지만, 육도 지쳐 탈진할 대로 탈진한 상태. 그러나 제 2의 선교사역을 위해 다시 안간힘을 쓰고 일어나는 것은 신학생 때 다짐한 ‘확실한 인생 투자’인 선교에 바쳐진 그의 헌신 때문일 것이다.
문의) 황필남 선교사 pnhwang@hotmail.com
마굿간에 태어난 예수님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서구 선교사처럼, 교회의 명맥은 끊어지고 겨우 한 개 교회만 근근히 존재했던 몽골, 그 두려운 땅을 처음 밟은 것이 횟수로 벌써 스무해가 지났다. 공산주의체제가 붕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내부사회는 철저히 공산주의체제 아래 움직이고 있던 시절, 몽골국립의과대학 대학원생으로 위장해 들어간 선교의 첫 출발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워싱턴몽골교회 담임이자 버지니아크리스천유니버시티 몽골학과를 세우는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황필남 몽골선교사. | |
“하나님, 제가 이런 곳에 살아야 합니까?”
순간 예수님은 성령으로 찾아오셨다.
“얘야 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단다.”
선교사로 왔지만 아직 마음이 낮아지지 않고, 선교지로 온전히 성육신 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주님 앞에 철저히 엎어져 회개하고 시작한 선교다.
몽골, 너는 내 운명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둘인 아픔을 겪었다. 16세 때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군대를 다녀온 후 한차례 방황하기도 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 깨어져 흩어져 버린 모교회를 보면서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던 중 깨어진 모교회 어린이들을 모아 주일학교를 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응답은 시작됐다. 하나님은 그를 목사로 부르시고 신학교에 가게 됐다. 신학교 지하 기숙사에서 끼니를 겨우 떼우며 175cm 52kg의 허약한 몸을 지탱하며 3년 간 신구약 10번을 정독했다. 10번을 읽은 후 깨달은 성경의 결론은 하나였다. “선교”였다. 예수님이 오시려면 선교를 통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돼야 한다는 것. 그는 투자하기로 했다. 자신의 전 인생을….
그에게 몽골은 운명이었다. CCC(한국대학생선교회)와 CEF(어린이전도협회), KHE(한국외항선교회)에서 선교훈련을 받았다. 파송단체였던 KHE에서 처음엔 그리스로 가기로 했다가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인도로 가기로 결정하고 준비하는 도중 몽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파송선교단체인 KHE가 몽골로 단기선교를 다녀온 후 목사가 한 명도 없고 한인 선교사가 없는 몽골 땅을 소개했다. 신약성경만 번역돼 있고 교회가 하나 밖에 없는 몽골로 가라는 추천이 있었다. ‘YES’를 외친 황 선교사 앞에 몽골 땅의 문이 열렸다.
돌 맞고, 불 질러도 수는 불어나고
무신론자와 정령숭배, 라마불교 문화가 뒤섞인 교회는 1개 뿐인 몽골 땅에서 선교사로 산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핍박도 많았다. 기숙사와 사무실, 자동차에 총 4번의 돌멩이가 날아들어왔고 한번은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던 아내에게 날아들어온 돌멩이가 창문을 깨고 온 방에 흩어져 얼굴이 벌개진 아내가 기숙사를 뛰쳐나온 일도 있었다. 자동차 뒷바퀴가 3번이나 빠져 나갔고, 한번은 자동차에 불이 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다행히 모래사장에 정거해 살아난 일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성경을 나눠주면 어떤 사람들은 한 장 한 장 찢어 산 열매를 싸서 파는 종이로 썼다. 또 어떤 이는 버리고 어떤 이는 불사질렀다. 그런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읽고 회개하고 친척을 전도해 18년 간 동역자가 되어준 고마운 이들도 끼여있다.
굴하지 않고 첫 5년을 사역한 결과 15개의 교회가 개척, 1천명 이상의 교인들로 불어났고, 수 백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줬다. 첫 7년 간을 합하면 총 900명에게 세례를 줬다. 핍박 속에도 선교 사역은 끊임없이 확장, 진행형이었다.
“복음에 빚진 자”… 되뇌고 또 되뇌는 말
‘왜 나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열매를 주실까’ 물었다.
그 물음 가운데 잠시 방문한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자신이 살던 강원도 강릉 작은 시골 마을에 처음 복음을 전한 미국 선교사 리차드 래시 덕 선교사와 우상 숭배가 가득하던 마을에 첫 교회를 세운 최종묵 전도사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신앙의 뿌리, 빚진 자의 삶을 깨닫는 지혜”에 있었다.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은 제 공로가 아니고, 미국인 선교사의 공로, 두번째는 시골 마을에 교회를 세워준 최종묵 전도사 부부, 세번째는 경상도 출신의 최종만 목사님 때문입니다. 최종만 목사님은 5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복음을 전하며 내게 세례를 주신 분인데 아이들에게는 밀가루로 풀죽을 쑤어 먹이고, 목사님 부부는 굶으면서 복음을 전해 줬지요. 16살 때 교회에 처음 나갔던 저는 가득한 평안과 영적인 만족을 느끼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육체적으로 굶주리면서도 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설교가 제 영혼의 만족과 한없는 평안을 주었기 때문이죠.”
▲몽골 교인들과 황필남 선교사. | |
생명이 끊어진 백성에 생명줄 대다
몽골 땅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다. 600년 간 생명의 말씀이 끊긴 땅.
제 1대 왕인 징기스칸 전에 10만명의 해러이트 레이망이란 부족이 있었다. 왕과 부족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었다. 세가 있는 이 부족을 젊은 징기스칸이 장악하고 부족들의 공주와 자기 아들과 손자들을 정략 결혼 시켰다. 왕가에도 모계사회를 타고 크리스천들이 내려오다가 제 5대 왕이었던 쿠빌라이칸 당시 중국 북경을 점령하고 원나라를 설립한 후 대몽골제국의 통일된 종교를 갖기로 결정하면서 만장일치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가결했다.
쿠빌라이칸이 (종교개혁 이전이었기 때문에)로마 교황청에 100명의 훈련된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나중에 총 3명의 선교사를 보냈다. 그 중에서도 한 명은 도중에 돌아갔고, 한 명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다가 죽었고, 한 명은 몽골에까지 왔다가 척박한 땅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갔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복음을 전해줄 선교사가 오지 않자 쿠빌라이칸은 티벳에서 소승불교(라마불교)를 수입해 국교로 삼게 된다. 그 이후 몽골은 복음 없이 캄캄한, 우상 숭배와 무신론과 정령숭배 속에서 탄식하며 수백년을 살아야 했다.
1921년 몽골이 공산화될 때, 몽골 수도 울란바트르에 단 한개의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라마교도인지 무신론 공산주의자인지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 의해 화재가 일어나 그 교회 조차 타 버리고 선교사들은 도망 갔다. 그 이후 지난 600년 간 교회가 없었던 몽골, 1920년 대 유럽선교사에 의해 단 하나의 교회로 부활했다가, 핍박에 의해 싹이 잘린 몽골 기독교가 1990년도 영국 선교사 존 기븐스에 의해 부활하게 된다.
그가 선교사로 들어간 해인 1991년도. 갓 부활한 교회가 있었지만 여전히 척박했던 몽골. 야만적인 미신 문화와 정령 숭배가 가득하던 땅에서 기독교의 뿌리를 내리는 일을 감당한 것은 지금 돌아봐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모슬렘 대상 선교의 숨겨진 보석 땅
몽골이 세계 선교에 중요한 땅인 이유로 2가지를 꼽은 황 선교사. 첫째는 지리적인 이유로 다양한 종교가 뒤섞인 문화적 요소를 꼽았다.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몽골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스탄’이 붙은 13개 나라와 러시아 중국과 함께 불교의 부흥과 기독교 세력, 무슬림 세력 그리고 무당 및 정령숭배 등이 만나는 영적 전쟁터입니다.”
복음이 서진한다고 볼 때 모슬렘 권 선교는 동진하고 있다는 그는 “서진하는 복음과 동진하는 모슬렘 권이 만나는 지점이 몽골과 우즈벡,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권역”이라고 말한다.
두번째는 뛰어난 언어습득력과 적응력이다. 몽골인들은 모음과 자음이 36개로 구성돼 대다수의 언어의 발음을 쉽게 구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타국 언어를 배우는 데 탁월하다. 유목민족이라 적응력이 뛰어나고 급한 성격으로 속도가 빠른 민족성을 지니고 있다. “몽골 민족에 복음이 들어가면 모슬렘 권이나 무신론 권이나 힌두교 권이나 불교권이나 어떤 지역에도 선교사로 쉽게 파송하고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기질을 갖고 있습니다.”
풍성한 열매는 선물처럼… 앞으로는 신학교와 문서사역에 매진
몽골에 있는 600개 교회 중에 황 선교사와 그 제자들이 세운 교회가 약 100여개, 그 중 50여개를 현지 사역자에게 이양해 주고 직접 목회했던 2개 교회도 하나는 7년 전 이양하고 금년 2월에 350명으로 불어난 나머지 교회를 이양해 줬다. 제일 큰 교회는 한 교회에 1300명이 모이기도 한다. 미국에 세운 몽골교회가 3군데이고, 1군데 몽골교회 개척을 도왔다. 독일, 베를린, 체코, 스웨덴, 호주에 몽골교회를 세우고, 러시아 브리야트공화국과 중국, 티벳에 제자들을 파송했다. 한국에도 제자들이 목회하는 몽골교회가 3개가 있다. 이 중 호주와 스웨덴 몽골교회는 지도자가 없어 무너졌으나 곧 다시 가서 세워주고 올 계획이다.
현재는 워싱턴몽골교회 담임으로 버지니아크리스천유니버시티 몽골 학과를 세우는 데 주요 교수로 일하고 있는 황필남 목사. 그는 워싱턴 지역에서 정착 렌트비를 지원해 준 성광교회,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올네이션스교회, 세미한교회, 워싱턴순복음제일교회에 특별한 감사를 돌린다고 했다.
미국에 세워진 몽골교회 10여개를 포함, 현재까지 전세계에 몽골 교회가 720개 정도가 있다. 그 중 현지 목사가 170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신학 교육이 부족했던 전도사들이다. 앞으로는 이들의 영적 탈진과 갈급함을 채워주기 위해 문서사역과 신학교 사역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모든 길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지만, 꿈이 있다면 앞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설교집이나 주석이나 신앙서적을 집필 내지 번역을 해서 지도자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비전입니다. 현지 양떼들을 먹이는 사역을, 은혜를 공급하는 지원 사역을 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몽골유목문화에 맞는 간증집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나머지 아홉은 어디있느냐> 2권을 집필한 그는 문서선교사역을 위해 책들을 공급하고 신학교 사역을 통해 미래 몽골교회지도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들에 종사하고 싶다고 했다.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몽골교회를 돌며 권면하고 지속적으로 세워주는 일과 함께 그가 마지막 여생을 보내고 싶은 일들이다. 신학생 시절 허약한 체질은 20년 선교사역을 잘도 버텨줬지만, 육도 지쳐 탈진할 대로 탈진한 상태. 그러나 제 2의 선교사역을 위해 다시 안간힘을 쓰고 일어나는 것은 신학생 때 다짐한 ‘확실한 인생 투자’인 선교에 바쳐진 그의 헌신 때문일 것이다.
문의) 황필남 선교사 pnhw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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