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에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다. 참빛교회를 담임 목회하던 안태호 목사가 폐렴으로 두 달간 투병하다가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주님의 나라로 먼저 갔다.

그는 나와 동갑내기로 나는 2월, 그는 12월생이어서 평소에 그와는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나는 오뉴월 하루 빛이 얼마나 긴데 열 달이나 먼저 났으니 내가 형이라 우겼고 그는 사모끼리의 나이에서 자기의 아내가 위의 연배라고 나를 제낭이라 불렀다.

그러나 우리를 가깝게 묶어 준 것은 같은 나이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후덕한 인품에 끌려 늘 그와 가까이 하길 원했고 그러는 나를 그는 언제나 푸근하게 받아 주었다. 그는 나의 신학교 한 해 후배였지만 모든 면에서 나의 선배였다. 학식도 그랬고 신앙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그의 사람 됨됨이는 중후한 면이 있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매력적인 면이 있었다. 한번은 버릇없이 구는 대학 후배를 향해 점잖게 타이르는 것을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어떻게 그와같이 인격적으로 후배에게 대해 주었는지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 같으면 폭발했을만한 상황이었는데…

그런 그가 좋아 나는 좋고 궂은 모든 이야기를 그와 나누었다. 이메일은 우리를 밤낮없이 이어주는 좋은 수단이었다. 나의 노회 총무시절에는 내가 알게 된 정보를 그에게 소개해 주어 현재의 참빛교회 건물을 구입하게 되기도 하였다.

나는 그가 아무리 힘든 상황을 당해도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지독한 관절염과 싸우며 살았다. 그래서 그는 평생 고단위 관절염 치료제를 복용하며 살았다. 그 약을 복용하는 중에 아이를 가지면 정상적인 아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아이도 없이 오직 목양일념으로만 살았다.

그런데 평생 복용해 온 바로 그 관절염 치료제 때문에 항생제에 내성이 생겨 폐렴에 걸렸을 때 염증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를 치료하던 폐 전문의는 발달된 현대 의약을 통해 유익을 얻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댓가를 치루기도 하는데 바로 그로 인해 염증 치료가 잘 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병원을 옮겨가며 치료를 했는데 처음에는 상당히 차도가 있어서 중환자실(ICU) 에서 회복실로 옮겨 치료를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한 달 이상을 마취상태로 치료를 했고 기관지를 절개하여 목 아랫부분에 구멍을 내어 산소튜브를 연결함으로써 폐의 산소흡수 기능을 높여 주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의식이 회복되고 상태가 호전되어 회복실로 옮겼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쁨도 잠깐, 바로 그 회복실에서 재차 병균에 감염이 되었고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서 처음 입원했을 때와 같이 마취치료를 했지만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주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시는 것이지 내(우리의) 뜻대로 떼를 쓰는 것은 아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사람들이 안목사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나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병원을 방문하여 치료 상황을 부지런히 이메일로 알려 교단의 목회자들과 지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차도가 있을 때에는 감사와 기쁨을 전했고 어려울 때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를 부탁했다. 한 목사님은 중간에서 나의 이메일을 받아 이 지역의 목회자들에게 부지런히 전달해 주셨다.

미국장로교단의 총회장을 지낸 목사님, 감리교단의 감독을 지낸 목사님들이 문병을 하며 쾌유를 빌었으나 그는 결국 우리보다 앞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져 마취에 들어가기 전, 그는 가족들을 한 사람씩 차례로 불러 유언을 남겼다. 가족들은 그가 너무도 고통이 심해서 그런 것으로 알고 유언이라 생각지 않았지만 그는 때를 알았던 것 같다. 평생 간병하느라 수고한 아내에게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감사를 표했다고 안숙자 사모가 전해 주었다.

그가 투병 중간에 잠시 상태가 좋아졌을 때 나는 그의 병실을 찾아 그와 모처럼의 대화를 나누었다. 기관지 절개로 인해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입모양과 손으로 쓰는 필담으로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의 병실에 들어섰을 때 그가 내게 한 첫 마디는 “축하해!”였다. 뭘 축하해? 내가 물었더니 “아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지난 연초에 스토니포인트 수양관에 함께 기도하러 올라갔을 때 신학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루기 위해 한국에 가는 우리 집 아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는데 그는 병상에서 합격소식을 듣고 나를 보자마자 첫마디로 축하를 해 준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미주 전역에서 목사님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과 또 뉴욕의 교계 소식을 알리는 웹사이트에 그를 위한 긴급 기도제목이 올라와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더니 그는 그 기관에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입원한지 두 달에서 이틀이 모자라는 3월 21일 수요일 아침 8시 반쯤 새벽기도를 마친 나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보니 환자의 몸에 연결해 놓은 모든 계기는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산소 호흡기가 기계적으로 호흡을 계속케 하여 심장의 박동만 계속될 뿐 몸의 다른 기능은 이미 멈추어 있었다. 안목사의 사모와 한국에서 달려오신 큰 형님이 마지막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안목사의 가슴에 손을 대고 주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드렸고 이어 담당 간호사가 가족들에게 호흡기의 튜브를 제거하기를 원하는지 확인한 후 튜브를 제거하였다. 그로부터 약 2분 후 오전 8시 47분, 내 사랑하는 친구 안 목사는 주님의 품에 안겼다.

참빛교회와 미국장로교 동북대회 한인교회협의회(KPC-NE)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목요일에 입관예배, 금요일에 발인 및 하관예배를 드림으로 모든 장례식 일정을 마쳤다.

사람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람을 아는가 보다. 장례식 첫날 밤, 뷰잉을 하는데 그 행렬이 끝날 줄 몰랐다. 너무 길어져서 예배 인도를 하던 내가 고인의 관 앞에서 기도하지 말 것과 절하지 말 것을 당부해야 했을 정도였다. 입관예배 순서지를 500장 인쇄하도록 했는데 모자라서 350장을 추가로 인쇄했으나 그것도 금세 모자랐으니 조문객이 최소한 900명은 넘었던 것 같다.

이제 내 사랑하는 친구는 가고,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모습만 떠오르는 지금, 그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 귀에 맴돈다.

“축하해! 감사를 전해 줘!” 참 멋있게 살고 간 친구이다.

나는 무슨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게 될까?

2007년 4월 1일(주일)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