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의 새벽은 두려움으로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막연하지만 약간의 기대감이라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주님께서 일을 벌이시는 것이 아니가? 마지막 순간에 역전을 예상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에서 멀찍이, 먼발치에서 사건의 시종을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면서 예수님은 사태를 역전시키는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큰 허탈감과 좌절감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느꼈던 감정은 좌절과 절망 끝에 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절망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絶望은 끊을 절자로,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끊는 사람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처하고 있는 그때그때의 상황이 소망을 끊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소망을 끊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절망과 낙망을 그냥 구분 없이 쓰고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단어는 절망이 아니고 낙망입니다.

落望은 떨어질 낙을 사용하여 소망이 떨어진 상태, 소망을 우리가 놓아버린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소망을 놓아버리시면 그것이 절망인데,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절대로 절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가 놓아버리고 포기하기에 낙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낙망에서 오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2007년이 1907년 평양 부흥운동 후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교계 일각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도 준비하며 100년 전의 영광을 회복하자는 기치 하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안타까운 소식들을 접하면서 우리 모두의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과 회한이 자리 잡는 것을 어쩔 수가 없는 우리 모두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환희의 새벽은 누가 맞이할 수 있습니까? 환희의 새벽은 낙망과 좌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새벽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아픔, 그리고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활의 새벽은 평범한 아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끝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어둠의 터널에서 어슴푸레 밀려오는 새벽의 빛은 고통과 아픔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절망은 없다고 다짐하면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 소망을 놓아버리지 않고 붙들면서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그 새벽은 환희의 새벽입니다.

일주일 간 금식하며, 일주일 동안 즐기던 coffee를 절제하고 끊었다가 환희의 새벽에 먹고 마시는 그 호박죽과 커피는 기가 막힌 환희의 호박죽과 커피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한 컵의 호박죽, 한 잔의 커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고통과 아픔 속에서 새로움으로 맞이하는 부활 주일의 새벽은 환희의 새벽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어두움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일 수 없습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오직 낙망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긴 터널을 빠져나와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환희의 새벽을 경험하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